404화. 소울푸드 (2)
회사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동호 선배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한테도 연락 오던데.”
“그래요?”
“아름이도 초청받았고.”
“아름 씨가요?”
“MFW 요즘 핫하잖아. 유럽 패션회사들과 계약도 많이 했고.”
하긴, 패션하면 유럽 아니겠나?
“그런데 언제부터 아름이라고 불렀어요?”
동호 선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아저씨 입맛 까다롭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거든. 그래서 메뉴는 어떻게 하려고?”
“현지 음식 먹는 걸 좋아한다니 한식으로 대접해줘야죠.”
“흠, 한식이라.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식이라면 K-치킨 아닌가?”
“반은 맞췄네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응? 설마 진짜 치킨 먹이게?”
“그건 아니구요.”
“그럼 뭔데?”
“궁금해요?”
“응.”
“지금 예약하러 갈 건데, 따라와요.”
난 동호 선배와 함께 차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길이 안 막혀서 금방 도착했다.
“바로 여기예요.”
식당을 본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차기 EU 집행위원장을 여기서 대접하겠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엄청 좋아할 거다.
난 당황하는 동호 선배를 놔두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신가요?”
난 종업원에게 말했다.
“단체예약을 하려고 하는데, 사장님 계신가요?”
그러자 주방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나왔다.
나이는 50대쯤 되어 보인다.
“단체예약이요? 몇 분이나요?”
난 날짜를 말해주며 말했다.
“일행이 좀 많은데, 이날 점심때 가게를 빌릴 수 있을까요?”
“가게를 통째로 빌리시는 거면 최소 70인분은 시키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우리 때문에 다른 손님을 못 받는 거니 그 정도는 주문해야 수지타산이 맞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약금 걸어주셔야 하는데.”
“물론입니다.”
요즘 노쇼(No Show)가 사회적 문제긴 하지.
음식점 예약하고 안 오는 놈들은 소개팅 나가서 펑크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않을까?
“일단 100만 원 송금할게요. 나중에 다른 분이 결제하면 다시 돌려주시면 됩니다.”
“네네. 그래 주시면 좋죠.”
참고로 이렇게 하는 건 내가 100만 원이 아까워서 이러는 건 아니고, 이게 공식적인 비용으로 나가는 거라, 내 멋대로 사고 말고 할 수가 없어서다.
난 송금을 하며 말했다.
“위생에 각별하게 신경 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식사 한 시간 전쯤 직원이 와서 한번 확인할 건데, 괜찮으시죠?”
“그럼요. 저희 가게는 지자체가 실시한 위생등급에서도 만점 받았어요. 저기 보이시죠?”
주인아주머니가 가리킨 곳을 보니 ‘모범음식점’, ‘안심음식점’, ‘건강음식점’ 등 각종 인증 스티커가 주르륵 붙어있다.
다른 음식점에서도 많이 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왠지 안심이 된다.
“그런데 대체 누가 오시기에 직원들이 미리 와서 점검까지 하나요? 중요한 분들인가 보죠?”
“예. 유럽에서 오신 손님과 큰 기업 회장님들이 오실 거라서요. 그냥 평소처럼만 해주시고,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에이, 부담은요. 이 주변 회장님들 중에 저희 가게 단골들 많아요.”
* * *
EU 집행위원장 내정자 클라우스 부스코프스키 위원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지만, 남궁석 대통령과 국회 지도부와도 만남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한국과 EU의 각종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는 한국 경제인들과의 비공개 만찬이 예정되어 있다.
난 그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동호 선배와 함께 광화문으로 향했다.
원래는 동호 선배만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나도 함께 가기로 했다.
“아름 씨는요?”
“오빠랑 함께 온대.”
“민기진 전무도 오나 보네요.”
“응. 혼자 가면 쫄릴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너랑 같이 가서 정말 다행이야.”
“에이, 쫄릴 게 뭐 있어요?”
“오늘 10대 재벌들 다 올 거 아니야?”
“재벌이 뭐 별건가요? 자신감을 가져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냉정하게 말해 유성그룹 제외하면, 우리보다 돈 많은 곳도 없지.”
다행히 아까보다 어깨가 좀 펴진 것 같다.
“이제 이런 자리도 익숙해져야죠. 이번 기회에 인사도 좀 하고 친하게 지내요.”
“그게 될까? 컨티뉴 캐피탈에 이 갈고 있는 곳이 한둘이 아닐 텐데.”
“…….”
사이가 안 좋은 곳이 몇 군데 있긴 하지.
우리는 먼저 JR블랙우드 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모이는 이유는 부스코프스키 위원 일행이 이 호텔에 머물고 있기 때문. 그래서 이곳에 연회장을 잡았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먼저 와있었다.
“헤이, 브라더.”
“여긴 왜 왔어요?”
“회장님 대신 온 거야. 그리고 저쪽에서 날 열심히 찾았고.”
“왜요?”
“왜는 왜야? 요즘 대세는 그린에너지 아니야? 그린에너지하면 수소, 수소하면 화안에너지. 다시 말하면 나라는 거지.”
“하긴.”
친환경 규제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곳이 바로 유럽이다.
유로4니, 유로5니 하는 환경규제가 만들어질 때마다 한국 기업들은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연구개발을 하고, 생산라인을 뜯어고쳤다.
유럽의 법이 한국에도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유럽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이 규제를 따라야 한다.
“저번에 집들이하며 지인들 초대해서 치킨 만들어줬다며?”
“네.”
“나는 왜 안 불렀어?”
“두바이에 가 있었잖아요.”
물론 한국에 있었어도 안 불렀겠지만.
“그래도 그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바로 한국으로 날아왔지. 나도 치킨 좋아해. 레드킹 치킨 먹고 싶어.”
“S마트 가서 사먹어요.”
“아니야. 니가 만들어준 치킨이 먹고 싶어. 나도 치킨 튀겨줘. 해줘. 해줘.”
“…….”
뭘 해줘?
난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케이. 약속한 거다.”
엄청 좋아하는 표정이다.
그렇게 치킨을 좋아하나?
“아! 며칠 전에 한 사장님이랑 만났는데, 너 집에 연락 좀 자주 하래. 사모님이 걱정하신다고.”
그가 말하는 ‘한 사장님’은 우리 아버지.
어째 나보다 우리 아버지를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는 왜 만났어요?”
“골프 모임이 있어서.”
“뭔 골프를 그렇게 많이 쳐요? 우리 아버지, 대회라도 내보내게요?”
“다 필요한 사람들 만나는 거야. 사업할 때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데.”
“흠.”
어차피 실무는 박용진 부사장이 다 알아서 하니, 아버지가 할 일은 얼굴마담. 허민웅이랑 골프 모임 다니며 인맥을 넓히는 것만으로도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
게다가 허민웅이 아버지를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큼 병진공업의 위상이 올라갈 테고.
허민웅과 앉아서 잡담을 하는데, 또다시 TV에서 본 얼굴이 등장했다.
난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재익 사장님. 컨티뉴 캐피탈의 한미루라고 합니다.”
일전에 잠깐 통화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오늘 드디어 만나네요. 반갑습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비록 상장 당시 증시 전체가 개판났고, 그 일로 지금까지도 욕먹는 중이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GL엔텍은 유성전자에 이어 여전히 코스피 2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만큼 배터리 시장의 미래가 밝기도 하고.
이어서 유재호 회장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유재호 회장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LK그룹 차태완 회장님입니다.”
“안녕하세요. 한미루입니다.”
풍채가 좋고 후덕한 인상이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었을지 좀 궁금하다. 왠지 좋은 얘기는 아닐 것 같다만.
사람이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기 마련.
DA증권 다니던 시절에는 임원 그림자만 봐도 바짝 긴장했었는데, 지금은 재벌 회장을 봐도 큰 감흥이 없다.
그때가 이병이었다면, 지금은 예비군 같은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엔플 CEO도 만나고, 페이스노트 CEO도 만났으니까.
왠지 둘 다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당연하게도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벌들 사이에서 내 인기가 이 정도다.
이어서 민기진 전무와 민아름이 도착했다.
동호 선배와 민기진 전무는 반갑게 인사했다. 일전에 함께 모여 식사를 했기에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
민아름은 나에게 말했다.
“미루 씨 덕분에 MFW가 이런 곳에 초대도 다 받네요.”
“뭘요. 민 대표님께서 잘하신 덕분이죠.”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는데, 백인 남성이 수행원들과 함께 등장했다.
나이는 50대 중반. 키는 대략 190센티에 몸무게가 100킬로는 나갈 것 같은 거구다.
그가 바로 향후 유럽연합을 이끌어나갈 차기 집행위원장이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일일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동호 선배에 이어 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컨티뉴 캐피탈의 한미루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부스코프스키 위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통역가가 옆에 붙어있긴 하지만, 그가 영어를 잘해 의사소통은 별문제 없었다.
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멀리 가실 것 없이 근처로 잡았습니다.”
* * *
검은색 세단이 줄을 지어 음식점 앞에 도착했다.
유재호 회장은 확인하듯 나에게 물었다.
“설마 여기를 만찬장으로 예약한 겁니까?”
“예.”
“…….”
왠지 심하게 당황한 표정이다.
이곳은 JR블랙우드 호텔 뒷골목에 있는 닭한마리 가게로, 상호는 ‘원조 정통 닭한마리집’이다.
허민웅은 헛기침을 하며 나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가 수백 년 된 한국의 맛집이라도 돼?”
난 고개를 저었다.
“뭔 헛소리예요? 개점한 지 3년도 안 됐을 텐데.”
“…….”
그래서인지 외관이 반짝반짝하다.
뭐, 가게 이름에 ‘원조’와 ‘정통’이 붙어있다 보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음식점 이름에 들어가는 ‘원조’와 ‘정통’은 그냥 접두사나 정관사쯤으로 보면 된다.
언제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국적 불명의 ‘퐁듀 주꾸미’나 ‘치즈 등갈비’ 같은 음식에도 ‘원조’와 ‘정통’이 붙기 마련.
아니, 그 이전에 닭한마리가 무슨 한민족 고유의 음식도 아니고, 1970년대쯤 서울에서 생겨난 음식이다.
애초에 음식 역사가 수십 년밖에 안 됐는데, 수백 년 된 맛집이 있을 리가.
“일단 들어가죠.”
난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가게 사장님.
주인아주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 저분 혹시 그 유성그룹 회장님 아니신가요?”
역시 대한민국에서 유재호 회장 얼굴 모르는 사람은 없구나.
“맞습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은 LK그룹 차태완 회장님이구요.”
그 외 10대 그룹 사장들도 두루 왔다.
“이, 이런 분들이 대체 왜 우리 가게에……?”
“예약할 때 말씀드렸잖아요. 기업 회장님들 온다고.”
“…….”
주인아주머니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그 회장이 5대 그룹 회장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