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선물 (5)
메기 록허트.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작은 소녀는 고깔모자를 쓰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 주위를 둘러싼 채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고, 메기는 케이크 위의 촛불을 끄며 소원을 빌었다.
데이비드는 딸에게 물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아빠한테만 말해줄게요.”
메기는 아빠에게만 들리게 귓속말로 얘기했고, 데이비드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지유는 메기를 위해 준비해온 노래를 불렀다.
자주 들은 노래인데도 역시나 직접 들으니 느낌이 색다르다. 이래서 다들 콘서트를 가는 모양이다.
“어때? 재밌어?”
내 물음에 메기는 기뻐하며 말했다.
“최고의 생일이에요!”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애들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한 만큼 친구들도 다들 이전 병원에 있을 테고.
그래서 한국에서 생일을 맞는 것에 대해 좀 걱정했는데, 즐거워하니 다행이다.
난 메기와 좀 떨어진 곳에서 데이비드에게 슬쩍 물었다.
“아까 메기의 소원이 뭐였나요?”
“비밀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보스에게만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아니, 굳이 안 말해줘도 되는데.
데이비드는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해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지유 같은 가수가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소원이 너무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원래 어렸을 때는 여러 가지 꿈을 갖기 마련.
나만 해도 어렸을 때 꿈은 재벌 2세였다. 재벌 2세가 되기 위해서는 재벌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그러다가 세계적인 투자자가 되겠다는 풍운의 꿈을 안고 DA증권에 입사.
1차로 DA증권 사장이 되는 게 목표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치킨집 사장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공동대표인 건 마찬가지구나.
그저 업종과 사이즈가 좀 다를 뿐.
참고로 요즘 초등학생들 희망 직업 1위는 에이튜버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왜냐하면 나 어렸을 때는 에이튜버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데이비드가 말했다.
“사실 메기가 노래를 잘 부릅니다. 목소리도 예쁘구요. 가수를 해도 분명 성공할 겁니다.”
“아, 네.”
“지난번 아버지의 날(Father's Day)에 저를 위해 노래를 연습해서 불러주었는데,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영상으로 찍어놓았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예?”
굳이?
데이비드는 대답도 듣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메기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어떤가요? 가수로서 자질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냥 딱 애가 부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가수의 자질이 보인다는 거야? 아빠 눈에만 보이나?
“사실 전 메기가 변호사나 교수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응원해줄 생각입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다만 연예계 생활이 힘들 텐데, 그게 좀 걱정이네요.”
“…….”
아니, 애가 한마디 한 걸 가지고 뭘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앉았어?
원래 이 나이대 애들은 하루에도 세 번씩 꿈이 바뀐다.
병원에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퇴원했으면 아메리칸 아이돌에 지원서부터 넣었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투자자가 딸 얘기만 나오면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지다니.
뭐, 충분히 이해는 된다.
나도 메기 같은 딸이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자랑했을 것 같으니까.
난 잠시 데이비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딸 자랑을 늘어놓던 그는 멈칫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지금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좀 바보 같은데요.”
“크흠.”
데이비드는 멋쩍은 듯 웃었다.
매일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하고 있던 사람이 이렇게 바보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웃으니까 좋네요. 메기도 이렇게 웃는 얼굴을 더 좋아할 거예요.”
데이비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전부 보스 덕분입니다.”
“뭘요.”
우리는 의료진들에게도 음식을 나눠주었다. 바쁜 사람은 나중에 집에 가져가서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도시락으로 만들어 포장도 해놓았다.
난 지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다.
동호 선배야 이미 잘 아는 사이라서 패스했고, 데이비드, 강선우, 민아름, 성윤아 등등.
성윤아는 나에게 말했다.
“설마 가수 지유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 줄은 몰랐어요.”
“아! 대학교 후배예요.”
“같은 과예요?”
“아니요.”
난 경제학과, 지유는 언론학과다.
“그럼 원래 그렇게 다른 과 후배들도 다 알고 지내요?”
“뭐…….”
전 여친 사촌동생이라는 얘기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
다행히 얘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민아름이 성윤아를 불렀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번에는 지유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배님은 저분과 많이 친한가요?”
“DA증권 입사 동기니까.”
“그런데 선배님 회사 그만둔 지 꽤 됐잖아요.”
“그렇지.”
“그럼 다른 입사 동기랑도 다 연락하고 그래요?”
“뭐…….”
DA증권 회장 손녀라는 얘기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
* * *
지유는 신기하다는 듯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지인 딸의 생일 파티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지인이 설마 컨티뉴 캐피탈 대표 데이비드 록허트일 줄이야!
금융업계에서는 스타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그보다는 한미루와 대화를 나누는 여성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이름은 성윤아. 셀럽으로 유명한 민아름 못지않은 미녀다.
키도 크고, 몸매도 늘씬하고, 볼륨감도 남다르고…….
‘뭐야? 입사 동기라는데 왜 이렇게 친해 보이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한미루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어! 못 오실 줄 알았는데.”
그러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중국에서 일이 일찍 끝나서, 케이크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나 해서 들렀습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조금만 늦어도 없었을 텐데.”
“운이 좋았군요.”
그를 보는 순간, 지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 설마 유성그룹 유재호 회장?’
유재호 회장은 메기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꼬마 아가씨. 전 아버지의 친구입니다.”
메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전 메기예요.”
한미루는 케이크를 잘라 유재호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커피도 드릴까요?”
“그럼 감사하죠.”
한미루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모펀드라는 컨티뉴 캐피탈의 록허트 대표, 그리고 한국 최고 재벌이라는 유재호 회장 사이에서 태연하게 웃으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대화하는 모습으로 볼 때 꽤나 친한 사이인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지유는 잘 믿기지가 않았다.
‘선배님은 대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거지?’
* * *
메기가 아직 치료를 받는 중인 만큼, 생일 파티는 금방 마무리됐다.
지유가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가야 하기도 했고.
난 지유를 병원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아쉽네요. 조금 더 있고 싶은데.”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난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는데요. 케이크랑 음식도 맛있었고. 그리고 선배님 덕분에 유명한 분들도 많이 만났잖아요.”
하기야 데이비드도 그렇고, 민아름도 그렇고, 유재호 회장도 그렇고,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
지유는 아까부터 나한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뭐 할 말 있어?”
내 물음에 지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선배님은 정체가 뭐예요?”
“응? 정체라니?”
“좀 이상하잖아요. 한국지사 직원인데, 록허트 대표님이랑도 친하고, 유재호 회장님과도 친하고.”
“그건 뭐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고 록허트 대표님이 선배님을 보스라고 부르던데요.”
“…….”
하기야 한세나 수준으로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주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대충 눈치챘겠지.
어차피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은 아니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지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입 엄청 무거워요. 아이돌 누구랑 누가 사귀는지 다 아는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어…….”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나중에 슬쩍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사실 컨티뉴 캐피탈을 내가 만든 거라서. 그래서 지금 데이비드랑 공동대표야.”
“아, 그랬구나.”
“응. 그런 거지.”
바로 납득해서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지유는 잠시 후 소리치듯 물었다.
“예! 예? 뭐라구요?”
* * *
집 계약은 바로 이뤄졌고, 나와 선우는 짐을 싸서 이사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심정으로, 이전에 쓰던 가구는 전부 버리고 새로 사기로 했다.
패션만큼이나 인테리어에도 통일성이 중요하다.
돈만 쏟아붓는다고 좋은 인테리어가 되지는 않는다.
……라는 사실을 지난번 집에서 살며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나나 강선우나 인테리어에는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다.
다행히 이 문제는 민아름이 도와주었다.
“남자 둘이서 뭐하겠어요? 저한테 맡겨보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인테리어가 끝난 집을 보며 감탄했다.
이전에 왔을 때는 휑하던 집에는 가구와 가전이 통일성 있고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선우 역시 혀를 내둘렀다.
“최고급 호텔 같은 느낌인데.”
“그러게.”
역시 전문가가 손을 대니 다르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거지?”
“응.”
“우리 부모님은 평생 벌어 아파트 한 채 사셨는데. 부모님 알면 기절하시지 않을까? 나중에 아시면 무슨 돈으로 샀다고 말씀드리지? 내 연봉으로는 턱도 없다는 걸 아실 텐데.”
“뭐, 대충 코인으로 벌었다고 둘러대.”
“그러든지 해야겠다.”
선우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오! 이거 침대 엄청 좋은데.”
난 인테리어 견적서를 보며 말했다.
“그거 2억이래.”
선우는 깜짝 놀랐다.
“진짜? 침대가 2억이라는 게 말이 돼?”
“그러게. 뭔 스웨덴 왕실에서 사용하는 침대라는데.”
생각해보니 호텔 소개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돈만 있으면 왕족과도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그 외에 식탁이나 의자도 수천만 원이 기본이다. 그래도 신세기백화점을 통해 구매한 거라 원가에 가깝게 할인받았다.
비록 다 버리고 몸과 옷가지만 이동했지만, 이사를 끝마쳤다고 생각하니 왠지 출출하다.
“밥 먹자.”
“뭐 먹게?”
“치킨 어때?”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은 항상 옳지.”
난 주문을 하기 위해 어플을 켰다.
“헉!”
내가 깜짝 놀라자 선우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치킨 한 마리가 2만 원이 넘네.”
내 말에 선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치킨값 2만 원 넘은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비싸? 이게 말이 돼?”
“침대 하나가 2억인 건 말이 되고?”
“아니, 침대랑 치킨은 다르지.”
2억짜리 침대는 납득할 수 있어도, 2만 원짜리 치킨은 납득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