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선물 (3)
데이비드는 컨티뉴 캐피탈 입사 후 처음으로 휴가를 떠날 준비를 했다.
몇 가지 절차가 진행되는 사이, 난 트리시를 만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루나백스의 신약을 사용하면 메기가 완치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예.”
내가 확신하는 건 미래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임상실험에서 확실한 효능을 보였기 때문.
완치율은 90퍼센트에 달하고, 나머지 환자 역시 큰 치료 효과를 얻었다.
“정말 잘됐네요.”
트리시는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소아병동 취재를 하며 메기를 본 적 있다. 그래서인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치료가 다 끝나고 나면 기사로 써줄 수 있어요?”
소아림프종이 그렇게 흔한 질병은 아니지만, 반대로 그렇게 희귀병도 아니다. 게다가 모두가 메기처럼 한국에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빨리 FDA와 EMA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록허트 같은 유명인의 딸이 신약으로 나았다고 하면, 승인을 좀 더 앞당길 수 있겠지.
그래서 데이비드도 기사를 내는 것에 동의했다.
트리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겠네요. 저한테 맡겨요!”
* * *
메기는 내 전용기로 이송하기로 했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세 명의 의료진이 동행했다.
메기는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와! 이게 비행기예요? 저 비행기 처음 타 봐요.”
하기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병원에만 있었으니, 여행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메기는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TV에서 보던 비행기랑은 좀 다르게 생겼어요.”
“이건 전용기니까.”
“전용기는 뭐예요?”
“우리끼리만 타는 비행기. 이걸 타고 한국으로 갈 거야.”
“와아! 저 외국은 처음이에요.”
“앞으로는 다 나아서 전세계를 돌아다니게 될 거야.”
“정말요?”
“응. 약속할게.”
“약속!”
그러자 메기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난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이 손은 작구나.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네. 바다 건너에요. 저 한국 잘 알아요.”
“진짜?”
메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이튜브로 K-팝도 많이 들었어요.”
“오! 누구를 가장 좋아해?”
“지유 언니요! 얼마 전, 애니버스에서 한 콘서트도 봤어요.”
바로 아는 이름이 나오니 살짝 당황스럽다.
“지유? 어째서?”
“예쁘고 노래 잘해서요. 다 나으면 공연도 가보고 싶어요.”
“그, 그래?”
이쯤 되면 지유는 K-팝스타가 아니라 그냥 팝스타라고 봐야 하지 않나?
여행 간다는 설렘에 들떠있던 것도 잠시.
메기는 어느새 잠들었다.
난 잠든 메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금발, 햇빛을 거의 보지 않아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 매끄러운 이마와 볼.
마치 아기천사 같은 모습이다.
어째서 데이비드가 딸바보가 됐는지 알 것 같다. 이런 딸이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승리자가 아닐까?
한동안 메기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왠지 뒤통수가 좀 따가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데이비드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살짝 당황했다.
“왜 그런 시선으로 저를……?”
그는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은 안 됩니다.”
“예? 아, 아니…….”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 * *
일원동 유성병원.
유성생명재단에서 운영하는 이 병원은 한국 최고 의료진과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성병원은 VIP 병동을 따로 운용하고 있다.
병원의 상층에 위치한 VIP 병실은 호텔급 시설과 보안을 갖추고 있다.
이 중 가장 큰 병실은 90평.
마치 호텔처럼 병실뿐 아니라, 가족실과 응접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간병인, 수행원들까지 편하게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하주차장에서부터 전용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고, 병실에서 중환자실과 치료실로 이동하는 동선이 따로 구분되어 있어 외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철저한 사생활 보호 덕분에 유성병원 VIP 병실은 유성그룹 총수 일가는 물론이고, 정재계의 유력인사들이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VIP 병동에 비상이 떨어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무슨 일인지 수군거렸다.
“입원에 소홀함이 없도록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모양이야.”
“대체 누가 입원하는 거야? 사우디 왕족이라도 오나?”
유성그룹의 이름에 걸맞게 세계 최고 수준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만큼, 외국 귀빈들도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에는 아부다비 왕족이 치료를 받기도 했다.
무슬림 환자들을 위해 할랄 푸드와 기도실을 따로 마련해놓았다.
“어린애라고 하던데. 소아과 의과장님도 오신다고 하고.”
“응? 어린애?”
환자의 신원은 금세 밝혀졌다.
“컨티뉴 캐피탈 대표의 외동딸이라고 합니다.”
“뭐!?”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컨티뉴 캐피탈은 유성그룹의 가장 중요한 협력사.
클라우드, 게임, 앱마켓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데이비드 록허트의 딸이라면, 유재호 회장이 직접 신경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류현우 병원장은 직접 VIP 병동을 찾아 영어가 가능한 의료진들을 배치하는 등 하나하나 지시를 내렸다.
“입원 환자가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주세요. 아! 며칠 후면 환자가 생일이라고 하니, 다 같이 버스데이 송 한번 연습합시다. 영어 버전으로.”
* * *
전용기는 열 시간을 넘게 날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메기는 비행을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아빠랑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운 모양이다.
공항에는 유성병원의 앰뷸런스가 대기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성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희준입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앰뷸런스긴 해도 긴급수송은 아닌 만큼 사이렌은 켜지 않았고,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정속으로 주행했다.
이미 수속을 다 해놨기 때문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VIP 병실에 입원했다.
난 새삼 감탄하며 병실을 둘러보았다.
“흐음, VIP 병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지, 이렇게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
뒷목 잡고 쓰러지거나 휠체어 타고 검찰청에 조사받으러 오는 회장님들께서는 그동안 여기에 입원해 계셨겠군.
이름만 병실이지 사실상 최고급 호텔이나 다름없다.
참고로 가격은 호텔 이상이다.
1인실은 의료보험 적용에서 제외되는 만큼 병원에서 마음대로 가격 책정이 가능하다. 사실상 다른 곳에서 적자 나는 것을 이러한 VIP 병동 운용으로 메우고 있다고 봐도 좋다.
데이비드는 입원에 앞서 각종 검사를 받는 메기를 지켜보았다.
평소 그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비행기에 탔을 때부터 들뜨거나 흥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제까지 내가 본 표정 중 가장 행복해 보인다.
이런 게 투자자와 아버지의 차이인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보스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사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있나 했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때는 그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보스를 만난 게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저야말로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배신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가 없었으면 컨티뉴 캐피탈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했겠지.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가장 먼저 그를 고용한 거고.
데이비드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서 강한 무게가 느껴졌다.
한 사람의 마음은 얼마의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사실 불가능하다.
억만금을 주더라도 사기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 * *
난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락처는 진작 받았는데, 내 쪽에서 전화를 거는 건 이번에 처음인 것 같다.
전화는 바로 연결됐다.
[앗!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째서인지 신난 것 같은 목소리다.
“어, 통화 괜찮아?”
[네, 지금 괜찮아요.]
“지난번 공연 잘 봤어.”
[정말요? 어땠어요?]
“멋지던데. 영화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다행이다. 선배님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거든요.]
“그, 그래?”
뭐, 팬 여러분들이 지켜봐주는 것과 비슷한 건가?
바쁠 테니,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인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거든.”
난 메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지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앗! 정말요? 어떡해…….]
“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치료받으면 금방 나을 테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한국에 와있어.”
[정말요? 다행이네요.]
“아무튼 메기가 네 팬이고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며칠 후면 생일인데 혹시 와줄 수 있나 해서. 소속사에는 동호 선배가 얘기해 놓을 거야. 행사 비용도 나갈 거고.”
[아,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요. 그런 일이면 제가 당연히 가야죠. 아니, 꼭 가고 싶어요. 가게 해주세요.]
사적인 부탁이라 바쁘거나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럼 부탁 좀 할게.”
* * *
메기는 새로운 병원에 금세 적응했고, 바로 투약 치료가 시작됐다.
데이비드는 따로 숙소를 잡는 대신 가족실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가끔 한국지사로 출근했다.
어차피 중요한 자료와 서류는 전부 클라우드를 통해 업로드되니, 확인하고 지시만 내리면 된다.
난 일이 끝난 뒤 데이비드와 근처 바에 들렀다.
여기는 허민웅이 소개해준 곳.
어차피 똑같은 술인데 왜 이 가격을 내고 먹나 싶지만,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조용히 술 마실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만한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
“메기는 좀 어떤가요?”
“잘 견디고 있습니다.”
“장하네요.”
난 어렸을 때 주사 한번 맞을 때도 소리 질렀던 것 같은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병원을 잘 안 간다.
하지만 메기는 아빠를 닮았는지 의외로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아파도 내색을 잘 안 한다고 한다.
우리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대화했다.
“유재호 회장님이 많이 힘쓰셨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 식약청도 FDA 승인이 난 뒤에나 움직였을 테니까요.”
“나중에 유재호 회장님께도 따로 감사드려야겠군요.”
“굳이 나중까지 기다릴 것 있나요?”
생각난 김에 바로 유재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저희 지금 한잔하고 있는데, 록허트 대표가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그러자 유재호 회장은 흔쾌히 말했다.
[그런 자리라면 안 갈 수가 없겠군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난 가게 이름과 위치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잠시 후, 유재호 회장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데이비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에 도와주신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재호 회장은 겸손하게 말했다.
“뭘요. 저야 한 대표님께 부탁받은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요.”
난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란 게 하는 건 쉽지만 들어주기는 어렵죠.”
지금이야 루나백스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수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안 그랬다.
그때는 나도 돈이 그렇지 많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신약 개발에 투자하는 것인 만큼, 돈뿐만 아니라 인프라 지원도 필요하다. 결국 유성바이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루나백스에 투자한 것도, 신약이 이렇게 빨리 승인이 난 것도, 전부 유재호 회장의 결정 덕분.
데이비드와 유재호 회장이 내 앞에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성공했다는 느낌이 든다.
난 두 사람의 잔을 채워주었다.
“건배할까요?”
우리는 잔을 들었다.
“메기의 건강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