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신세기그룹 막내딸 (3)
유혜경은 차를 마시며 막내딸에게 MFW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일은 어때?”
“재밌어요.”
“어려운 건 없고?”
“배워가며 하는 중이에요.”
메타버스, 클라우드, 게임, 디지털 패션 등등.
처음에는 그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미루가 그리는 미래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MFW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역시나 가장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만나는 사람은 어때?”
민아름은 이동호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듬직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어째서 한미루가 이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고 의지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자주 만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능력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이 남자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유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런 게 가장 중요하지. 아무 때나 좋으니 데려와 봐. 식사 한번 하게.”
“알았어요.”
유혜경은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는 남매끼리만 남았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욱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혜경은 본인은 경영을 하지 않았지만, 자식들에게 혹독하게 경영 교육을 시켰다.
민기진과 민예진 모두 신세기그룹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자신의 실적을 쌓았다.
백화점, 쇼핑몰, 마트, 면세점, 편의점, 프랜차이즈, 호텔, 건설 등등.
유혜경은 자녀들에게 실적에 따라 공정하게 그룹을 분할해주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맡은 업무에서 그룹을 어떻게 나눌지는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있었다.
다만 비주력 계열사 중 누가 더 많이 가져갈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 경쟁에서 민아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유혜경이 두 남매에게 일부 지분을 물려주긴 했지만, 아직도 막강한 지분을 쥐고 있다. 만약 이걸 민아름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
민기진과 민예진의 얼굴에는 어느새 경계심이 떠올랐다.
민아름은 그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녀는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재벌가 형제자매끼리는 사이가 좋기 쉽지 않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싸우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애초에 경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빠의 언니의 순수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는 지금도 좋은 기억들로 남아있었다.
민아름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신세기그룹에는 아무 관심 없으니까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거대한 시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여기에만 매진하기도 바쁜 만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 * *
잉그리드 게이블.
현재 뉴욕 소호 최고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그의 원래 이름은 잉베이 게이블이었으나, 중성적이고 고전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 잉그리드 게이블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는 기존 명품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각적이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패션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어느새 그는 21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얻었고, 그가 디자인한 옷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최근 명품 브랜드들은 올드한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젊은 신진 디자이너 영입에 열을 올리는 중.
여러 명품 브랜드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해 조건을 들이밀었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바로 독립이다.
잉그리드 게이블이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겠다고 하자, 시방에서 투자 제안이 들어왔다. 이중에는 명품 제국이라 불리는 LVMH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 들어간다면, 한순간에 명품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조건 역시 파격적이라 해도 좋은 수준이었다.
LVMH의 제안을 놓고 고민하는 그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다름 아닌 MFW의 대표 민아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MFW에 합류할 것을 권했다.
“전 잉그리드 게이블이라는 브랜드를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 말에 잉그리드 게이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명품이 명품인 이유는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 나은 기능과 더 나은 디자인을 선보인다 한들, 그 역사와 전통을 한 세대만에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민아름은 그 방법을 제시했다.
“현실 세계에서 명품이기 때문에 디지털 세계에서도 명품으로 인식되죠.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거구요. 그렇다면 그 반대 역시 가능하지 않겠어요?
“반대라면……?”
“디지털 세계에서 명품이라고 인식되는 브랜드는 현실 세계에서도 명품으로 인식되겠죠.
“…….”
그 말에 잉그리드 게이블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MFW가 게임을 활용해 어떠한 성공을 거뒀는지는 패션업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패션 시장에서 싸운다면 기존 명품 브랜드와 싸워서 승산이 없다. 그러나 메타버스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였다.
이곳에서는 아직 누가 승자인지 정해지지 않았다.
“LVMH 산하로 들어가면 잉그리드 게이블은 현실 세계의 그저 그런 명품 중 하나가 될 거예요. 하지만 MFW와 계약하면 디지털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MFW는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아서 만들어졌죠?”
“맞아요.”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시나요?”
“아니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요.”
잉그리드 게이블은 친구의 소개로 에밀리 클로에라는 여성을 만났다.
자신을 프랑스 에너지 재벌의 상속녀라고 밝힌 그녀는 남다른 패션에 대한 이해도와 감각, 그리고 특유의 친화력을 지녔다.
때문에 두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됐다.
그런데 연말 파티장에 나타난 한 남자는 에밀리 클로에를 처음보자마자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속고 있었을지 모르지.’
그의 말은 맞았고, 그녀는 지금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MFW의 투자를 받는다면, 왠지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잉그리드 게이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계약하죠.”
MFW의 투자를 받은 잉그리드 게이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매장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가상 인간과 써릴 스크린을 활용한 온라인 패션쇼였다.
일반적인 무대 장치와는 달리 써릴 스크린은 순식간에 장소와 배경을 바꾸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패션쇼에서 잉그리드 게이블은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보통 패션쇼는 업계 사람들이나 관심이 있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통해 생중계된 잉그리드 게이블의 패션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일부는 제대로 된 패션쇼가 아니라며 혹평하거나 폄하했지만, 대다수의 언론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디지털과 패션의 환상적인 결합!]
[패션쇼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신개념 패션쇼!]
[잉그리드 게이블은 현실의 패션과 디지털 패션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잉그리드 게이블 온라인 패션쇼의 성공으로 MFW는 매스티지와 컨템포러리 브랜드를 넘어 럭셔리 브랜드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잉그리드 게이블이 어디에 매장을 내느냐에 주목했다.
전세계 백화점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이는 신세기백화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점은 아니더라도, 리테백화점이나 대연백화점보다는 먼저 들여와야 했다.
민기진과 민예진은 달라진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민예진은 여동생을 직접 만나 계획서를 전달했다.
“잉그리드 게이블 매장 계획안이야. 한번 봐줘.”
민기진 역시 민아름을 찾아와서 말했다.
“신세기몰에서 팝업스토어를 진행했으면 하는데…….”
* * *
난 깜짝 놀라 동호 선배에게 되물었다.
“아름 씨랑 사귄다구요?”
“응.”
“언제부터요?”
“얼마 안 됐어.”
“어쩌다 사귀게 된 거예요?”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
그러니까 대체 뭘 어쨌는데?
동호 선배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원래 좀 작고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잖아.”
“잘 알죠.”
걸그룹 취향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대학 때 사귀었던 여친들 역시 그런 타입이었고
그러나 민아름은 정 반대 타입.
키도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해 인상이 센 편. 예쁘다기보다는 멋있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그런데 아름이가 또 잘 보면, 귀엽고 깜찍한 면이 있단 말이지.”
난 잠시 민아름를 떠올려보았다.
전혀 모르겠는데…… 혹시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건가?
“아무튼 축하드려요.”
생각해보면 다 내 덕 아닌가?
그동안 둘을 붙여주려고 노력했는데, 결실을 거둔 것 같아 왠지 뿌듯하다.
한편으로는 좀 신기하기도 하다.
1회차 때 민아름은 그저 뉴스에서나 보던 재벌가 사람이자 샐럽. 동호 선배가 그런 사람과 사귀다니!
민아름은 집안이면 집안,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팔방미인. 성격도 똑 부러지니, 우유부단한 동호 선배를 잘 내조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좀 걱정이야.”
“뭐가요?”
“이대로 잘되면 나중에 아름이 가족들도 만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겠죠.”
“유혜경 회장 왠지 좀 무섭지 않아?”
난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긴 하네요.”
직접 만난 적은 없고 기사로만 봤을 뿐이지만, 유혜경 회장은 여장부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인상이 센 편이다.
실제 성격 역시 인상 못지않게 세다는 얘기도 있고.
동호 선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름이가 언제 한번 엄마랑 보자는데, 정말로 가면 싸대기 처맞는 거 아니야? 어금니 충치 때운 아말감 빠지면 어쩌지?”
“헤드기어 끼고 가요.”
이 인간은 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않았어?
“그런데 우리 아까 무슨 얘기하고 있었죠?”
“어제랑 왜 같은 옷 입고 왔냐고.”
“아! 맞다. 그 얘기하고 있었죠.”
난 잠시 동호 선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물었는데 지금 얘기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 알면서 뭘 물어?”
“전혀 모르겠는데요.”
반드시 본인 입으로 해명을 들어야겠다.
동호 선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어제 계속 아름이랑 같이 있었거든.”
“어디서요?”
“아름이 집에서?”
“…….”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왜 밤새 한 집에 같이 있어?
설마 함께 밀린 일을 한 건 아닐 테고…….
나도 모르는 사이 둘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진전되다니!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동호 선배는 불길 속에서 쓰러진 나를 구하는 바람에 기관지에 큰 장애를 입었다. 그로 인해 말도 제대로 못하고, 호흡도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몸도 멀쩡하고, 아름다운 애인도 생겼다.
“축하해요, 선배.”
“하하! 축하는 무슨.”
난 동호 선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전 항상 선배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어요.”
“어, 고마워. 그런데?”
“하지만 이 정도로 행복해지기를 바라진 않았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