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신세기그룹 막내딸 (2)
이태원 주택가의 대저택.
막내딸을 끔찍이 아꼈던 고 유명훈 회장은 주변에 부지가 나올 때마다 사들였고, 기존 주택을 허문 다음 새로 집을 지었다.
유혜경은 결혼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민아름이 도착하자 가정부는 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가씨.”
“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민아름은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왠지 문이 낯설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집에 온 것도 오랜만이네.’
예전만 해도 민아름은 자주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얼굴을 비쳤다.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언니에게 잘 보여야 나중에 뭐라도 하나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 잘 오지 않게 된 것은 MFW를 맡게 된 이후.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발길이 뜸해졌다.
민아름은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유혜경은 막내딸을 반겨주었다.
“왔니?”
민예진은 핀잔을 주듯 말했다.
“빨리 좀 다니지.”
“죄송해요. 차가 좀 밀려서요.”
민아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가족들끼리 식탁에 둘러앉은 것도 오랜만이다.
“자, 그럼 어서 먹자.”
식사를 하는 동안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민예진이 말했다.
“이번에 에어코리아 회장 차남 최경철이 유학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어. 너랑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데, 언제 시간 괜찮아?”
민아름은 신세기그룹의 막내딸.
그녀 본인의 미모와 패션도 뛰어난 만큼, 이러한 제안은 가족들을 통해 사방에서 들어왔다. 그리고 민아름은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 등등.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은 집안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것. 따라서 그만한 역할을 해야 했다.
사실 별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고, 밥 한번 먹고, 적당히 대화하고…….
민아름 입장에서도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고, 그렇게 만나 친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물론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은 쳐냈지만.
당연히 승낙할 거라고 생각하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별로 관심 없어요. 거절해주세요.”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에 민예진은 살짝 움찔했다.
“왜? 본인 능력도 괜찮고, 인물도 말끔한데.”
“시간 없어요.”
민예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쪽에는 이미 만나겠다고 얘기해놨으니, 잠깐이라도 시간 내.”
‘당사자에게는 묻지도 않고 약속부터 잡은 모양이네.’
하기야 예전이었다면 시키는 대로 따랐을 테니까.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작은 부탁이라도 들어주면, 나중에 협상할 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여기서 민아름은 꽤 편한 도구였다. 정계, 재계, 법조계 할 것 없이 젊은 남자들은 다들 민아름을 만나보고 싶어 했으니까.
“연락처 알려주세요. 제가 잘 얘기할게요.”
민예진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하면 내 입장이 뭐가 돼?”
“그럼 제 입장은요?”
“……뭐?”
민아름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그런 자리는 나갈 생각 없어요. 그리고 다른 약속을 잡을 때도 저한테 먼저 꼭 물어봐주세요.”
“대체 왜 안 만나겠다는 건데!?”
“저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민아름이 재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민예진은 쏘아붙이듯 물었다.
“누군데?”
“이름은 이동호예요.”
그 말에 다들 멈칫했다.
민기진이 물었다.
“이동호면……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을 말하는 거야?”
“예.”
컨티뉴 캐피탈 본사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다. 그 외에 지사는 딱 한 곳. 바로 한국이다. 그리고 그곳의 대표가 바로 이동호다.
한국지사 한 곳에서만 다루는 자본은 수십조 원.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크기에 이동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민아름이 그 사람과 만나고 있다니!
유혜경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얼마 안 됐어요. 이제 서로 알아가는 중이에요.”
민예진은 일부러 조소를 지었다.
“그래 봐야 월급쟁이 아니야?”
‘지금이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민아름은 이동호가 한국지사를 가져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지금 그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월급쟁이라도 컨티뉴 캐피탈쯤 되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요? 그의 말 한마디면 웬만한 재벌그룹도 무너뜨릴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민기진과 민예진은 움찔했다.
컨티뉴 캐피탈이 한국에서 벌인 악행(?)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정그룹 일가는 경영권을 빼앗기고 쫓겨났고, GL그룹은 GL케미칼과 GL엔텍 분할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LD스튜디오는 주가가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고.
한국에서 재벌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 정도 자본으로 공격하면 당해낼 수 있는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될까?
* * *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유혜경은 차를 마시며 물었다.
“지금 하는 일은 어때?”
“잘되고 있어요. 준비 중인 것도 많고. 블록밸리와 나이트라이트와도 협력해 팝업스토어를 비롯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에요.”
민예진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리테랑 팝업스토어 진행했던데. 설마 거기가 신세기 경쟁사인 걸 몰라서 한 건 아니지?”
리테몰에서 진행한 MFW 팝업스토어는 엄청나게 흥행했다.
언론에도 소개됐고, SNS에 인증샷이 도배가 됐다. 사람들이 몰려들며 리테몰은 매출 증가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민아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리테 쪽 조건이 훨씬 좋았으니까요. 비슷한 조건이라면 당연히 신세기몰과도 진행할 생각이에요.”
민예진은 기가 막혔다.
리테그룹과 사업을 진행한 것은 컨티뉴 캐피탈의 입김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본인의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쪽 조건이 안 좋아서 깠다는 거야?”
“예. 그 조건으로는 저희 쪽 이익이 별로 안 남아요. 더 나은 대안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신세기그룹의 이익은 생각도 안 해?”
“전 MFW의 대표예요. 그러니 MFW의 이익을 우선시해야죠.”
“…….”
민아름이 받은 교육과 그녀가 쌓은 인맥은 전부 집안 덕분이다. 애초에 신세기그룹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투자를 받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태도라니!
민예진은 동생을 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MFW가 누구 덕분에 컸다고 생각해? 신세기백화점 직원들을 빼가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 같아?”
MFW의 시작은 일반 스타트업과는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1조 원이라는 자본을 가지고 시작했고, 컨티뉴 빌딩에 사무실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직원이 필요했다.
민아름은 창업을 위해 신세기를 떠나며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여기에는 패션 브랜드에서 일하던 MD나 디자이너는 물론 신세기백화점 직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다들 동의해주신 거 아닌가요?”
민아름이 데려간 사람은 핵심 실무진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 이유는…….
“제가 그룹에서 사라져야 오빠와 언니의 몫이 늘어날 테니까요.”
애초에 민아름은 경영권 경쟁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핏줄은 핏줄.
작은 계열사 하나라도 안 줄 수 있으면 안 주는 편이 좋다. 그래서 그룹을 떠난다고 했을 때 두 팔 들고 환영했다.
그런데……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덩치가 커질 줄이야.
백화점, 쇼핑몰 등 오프라인 유통망은 신세기그룹이 아니어도 대체할 곳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MFW는 독보적인 기업이다.
앞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신세기그룹이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할 판이다.
민기진이 물었다.
“오코너 버거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화안 F&B가 한국 사업권을 가져간 거지?”
“허민웅 부사장이 열심히 뛴 모양이에요.”
“내 얘기를 확실히 전하긴 한 거야?”
“그럼요.”
민아름은 한미루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름 씨한테는 빚진 게 있으니, 부탁이면 들어드릴게요.’
‘그건 MFW로 아마 갚은 거 아닌가요?’
‘아니요. 그건 어디까지나 아름 씨의 능력을 보고 투자한 거죠. 그때 빚진 건 아직 안 갚았어요.’
‘음, 그럼 아니에요. 그냥 말만 전한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컨티뉴 캐피탈은 한국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고, 영향력은 점점 커질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저런 부탁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큰 만큼, 민아름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성을 느꼈다.
“미루 씨는 저한테 빚진 게 하나 있어요.”
“빚?”
“예전에 재호 오빠를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줬거든요. 미루 씨는 그걸 빚으로 생각하고 있구요. 그래서 이번에도 부탁이면 들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 민기진은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왜 안 된 거지?”
“제가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민기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탁만 하면 됐을 일인데, 부탁을 안 했다고?”
민아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미루 씨는 저에게 빚졌다고 말했고, 반드시 갚겠다고 했어요. 그걸 고작 이런 일에 쓸 수는 없잖아요.”
민기진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말을 믿어? 말로 한 약속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민아름은 그동안 한미루가 보여준 모습들을 떠올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동호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궁금해서 이동호에게 몇 차례 물어보았지만…….
‘대체 미루 씨는 동호 씨한테 무슨 빚을 진 거예요?’
‘대학 시절부터 제가 미루한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줬거든요. 이런 저의 훌륭한 지도편달 덕분에 본인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
……아무래도 본인도 모르는 듯했다.
어쨌거나 그 대가는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
현재 기준으로도 수십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기업을 통째로 넘겨줄 생각이다.
그의 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게임회사를 친구 몫으로 떼주었고, 계속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민아름에게는 메타버스 패션 회사를, 그리고 성윤아에게는 간편결제 서비스 회사를 제안하고 돈을 투자했다.
유재호 회장, 허민웅, 성윤아, 트리시 오코너 등등.
한미루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은 전부 그 이상의 대가를 돌려받았다.
민아름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의 말은 한 푼의 가치도 없지만, 누군가의 말은 수십조의 가치가 있기 마련이죠. 그러니 나중을 위해 아껴놔야하지 않겠어요?”
“…….”
민기진과 민예진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가운데, 유혜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한참 동안 웃은 그녀는 막내딸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딸이 이제 다 컸네.”
그 모습을 보며 민기진과 민예진은 깨달았다.
이제까지는 민아름을 그저 귀여운 막냇동생이라고만 여겼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더 이상 말 잘 듣던 동생은 없었다.
그저 강력한 경쟁자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