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밤 산책(3)
세븐 라운드는 1회차 때 나도 엄청 재밌게 본 만큼, 내용을 다 알고 있다.
연희는 죽을 위기에서 주인공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그다음에는 일행이 돼서 함께 다닌다. 비중으로 치면 주인공과 주인공 친구 다음.
원래는 주보경이라는 신인배우가 맡았던 걸로 기억한다.
세븐 라운드는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특히 한국에서보다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대박이 터진다.
이 여파로 다른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까지도 따라서 시청률이 상승했을 정도다.
덕분에 여기에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주보경 역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글로벌 브랜드의 모델이 되고, 미국 드라마에도 출연하게 된다.
그런데 그 배역을 지유가 따내다니!
난 잠시 지유가 그 역할을 맡은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잘 어울리는데.
아니, 오히려 지유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았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다.
이거 완전 대박 아닌가?
“지난번에 그건 어떻게 됐어? 올리버 페이지 감독 영화 오디션 봤다며?”
“아! 그거 이미 촬영 끝냈어요. 조연이라 촬영 분량이 그렇게 많진 않았거든요.”
“와……. 이번에는 진짜 글로벌 스타 되겠는데.”
지유는 손을 내저었다.
“에이, 아니에요.”
“힘들진 않아?”
“힘들긴 한데, 재밌어요. 즐겁기도 하고. 다 선배 덕분이에요.”
“내 덕은 무슨.”
팬으로서 항상 잘되기를 바랐지만, 설마 이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상상도 못 할 위치까지 올라가지 않을까?
“얼마 전에 이동호 선배님께 연락이 왔어요. 아! 대표님이 아니라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렇게 부르라고 하셔서요.”
“응? 그 선배가 왜?”
아니, 걸그룹 마니아가 왜 지유에게 연락해? 무슨 마음을 품고?
동호 선배는 팬으로서 지조가 없다.
본진만 파는 것도 아니고, 이 걸그룹 저 걸그룹 다 찝적(?)댄다.
같은 걸그룹 마니아인 에드워드 밴슨마저 ‘그는 모든 걸그룹을 사랑합니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다.
당장 이 사회와 격리해야 하지 않을까?
“써릴 스크린을 활용해 온라인 콘서트 해보라고 추천해주셨어요. 제가 딱이라고.”
“그래?”
써릴 스크린을 활용한 촬영은 이미 시작됐지만, 콘서트는 아직이다.
하게 되면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뭐든 최초는 좋은 법이지.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테니까.
“어디서 하는데?”
지유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애니버스요. 앞으로 온라인 콘서트는 전부 거기서 열릴 거래요.”
* * *
애니버스.
탑티어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가 운영하는 앱으로 원래는 자사 아이돌들의 굿즈를 파는 쇼핑몰로 출발했으나, 이후 뮤키즈의 성장과 함께 아티스트와 팬이 함께하는 종합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탑티어 엔터의 아이돌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만큼, 컨티뉴 캐피탈과 손을 잡았다.
컨티뉴 캐피탈은 한국 엔터사에 골고루 투자하고 있고, 클라우드 컴퓨팅 회사 스노우 크래시에도 투자하고 있는 만큼, 최적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는 애니버스 지분 70퍼센트를 인수했고, 비용을 투자해 앱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가장 먼저 각종 수수료를 낮추고, 페니 결제를 도입했다.
앱 안에서 팬클럽 가입, 굿즈 구매, 온라인 공연 관람, 콘서트와 행사 티켓 예매 등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라이브 기능을 추가해 아티스트가 방송을 하면, 팬들은 알림을 받아 실시간 채팅에 참여할 수 있고, 또한 로키를 활용해 팬들이 직접 커버송이나 커버댄스를 만들어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에이튜브와 톡틱의 이용자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이다.
따로 광고를 붙이지는 않지만, 조회수에 따라 포인트를 지급한다. 이 포인트는 다시 서로에게 후원하거나, 앱 내에서 굿즈를 사거나 콘서트를 예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아이돌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일일이 해당 그룹의 팬카페에 가입하거나, 기획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야 했다.
그나마 한국인은 낫지만, 외국인의 경우에는 언어 문제로 인해 정보를 얻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애니버스에 들어가 관심 있는 아티스트를 클릭하고 알림 신청만 하면 된다.
이는 K-팝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앱 개편이 끝나자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은 엔터사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회사의 아티스트들도 전부 합류했고, 전세계 K-팝 팬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내에서 일시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앱 다운로드수가 3위로 치고 올라갔을 정도였다.
앱을 개편하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암표상에 대한 대책.
이동호는 엔터사들에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콘서트, 팬미팅, 각종 공연에 있어서 되팔이만큼은 반드시 근절시키겠습니다.”
콘서트와 공연, 행사 티켓의 되팔이 행태는 심각했다.
이를 아예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보통 한 아이디당 구매 좌석수를 제한하지만, 되팔이 업자들은 수백, 수천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매크로를 돌려 예매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티켓을 다시 팬들에게 판매한다.
표를 못 구한 팬들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비싼 가격에 암표를 살 수밖에 없다.
애니버스 앱에서는 매크로를 철저하게 차단했고, 결제시 얼굴과 지문을 인식하도록 했다. 콘서트 전에 QR코드를 받아 입장하는데, 이때 다시 얼굴과 지문을 인식해 본인인지 대조한다.
따라서 티켓은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하고, 환불만 가능하다.
물론 되팔이들이야 어떻게든 빈틈을 찾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존 암표의 90퍼센트를 없애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일부 있었지만, 대다수 팬들은 두 팔 들고 환호했다.
-와! 쩐다. 앱이 완전 천지개벽했네.
-진짜 편하네. 실시간 번역 기능도 잘되고.
-뮤키즈랑 뉴라이즈, 루나틴즈, 스칼렛실크 등도 앞으로는 전부 애니버스에서 팬 관리를 하겠다는데.
-역시 한국은 IT 강국이야.
-뭔 소리야?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하고, 스노우 크래시가 클라우드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되팔렘 척결은 매우 훌륭함. 이건 모든 공연계가 다 도입해야 함.
-콘서트 예약했는데, 당일에 일이 생겨서 못 갈 수도 있지 않나?
-환불하면 됩니다.
-친구나 부모님에게 선물 주려고 산 사람은?
-결제 전에 미리 선물할 상대의 정보를 입력하면 됩니다. 대리구매 가능.
-아, 아니. 주려다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그럼 환불하라고!
-내 돈 주고 내가 산 티켓을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맘 아님?
-네. 다음 되팔이.
-이건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암표상 꺼졍~
-되팔렘 새끼들 다 나가 죽었으면~
* * *
난 그동안 많은 기업에 투자했다.
나로 인해 크게 운명이 바뀐 회사가 있는 반면, 1회차 때와 다름없이 거의 그대로인 회사도 있다.
오코너 버거의 경우는 후자.
원래 잘될 기업에 난 그저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다.
오코너 버거는 현재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햄버거’ 1위를 차지했다.
햄버거는 미국인들의 소울푸드. 그런 만큼 미국에서는 수백 개의 프렌차이즈들이 버거 대전을 벌인다.
이 중 가장 사랑받는 버거가 됐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오코너 버거는 감자번과 에그라는 차별화된 요소가 있고, 다른 햄버거에 비해 확실히 맛있다.
많은 사람이 인생 햄버거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니까.
게다가 여기에는 스토리까지 담겨 있다.
프랜차이즈 성공에 있어서 스토리는 맛만큼이나 중요한 요소.
그린보틀 역시 바쁘게 돌아가는 실리콘밸리에서 천천히 내린 드립커피로 유명해지지 않았던가?
오코너 버거의 대략적인 성공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 오코너 패밀리.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숀 오코너는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코너 펍을 물려받기를 바랐고, 이는 부자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됐다.
어느 날, 이 문제를 놓고 숀 오코너는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햄버거 따위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전 아버지처럼 햄버거나 만드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미대륙을 가로질러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보란 듯이 성공해 돌아올 생각으로 고향을 떠난 그는 친구와 함께 스타트업을 창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실패를 겪었다.
모든 것을 잃고 주저앉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햄버거.
그 햄버거를 만들어 먹어본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햄버거 덕분에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은 그는 푸드트럭을 장만해 길거리로 나섰다. 숀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나섰다.
그렇게 부자는 화해하고 함께 푸드트럭을 몰며 캘리포니아를 돌아다녔다.
그것이 바로 오코너 버거의 시작이다.
동호 선배는 나에게 물었다.
“뭔가 좀 터무니없게 과장된 것 같지 않아?”
“뭐, 아예 없는 내용은 아니긴 한데…….”
큰 틀의 내용은 대충 비슷하다.
참고로 우리가 지어내서 퍼트린 것은 아니고, 언론과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부풀려진 것.
아버지와 좀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딱히 싸우지는 않았다. 애초에 숀 오코너가 아버지에게 저딴 말을 했다면, 지금 두 발로 걷지도 못할 것이다.
난 숀의 아버지인 칼 오코너를 떠올렸다.
2미터는 될 법한 키에 곱실거리는 붉은색 수염으로 덮인 얼굴. 근육질 팔과 두꺼운 목에 그려진 타투.
처음 봤을 때는 대항해시대에 활동하던 해적인 줄 알았다. 이름은 하이레딘 레이스쯤 되려나?
현재는 오코너 버거의 마스코트 같은 역할을 하는 중.
어쨌거나 도전과 개척, 좌절과 성공, 고향과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부자의 화합까지.
그야말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토리는 다 들어있다. 여기에 더해 실리콘밸리의 IT기업 창업자들과 할리우드 유명인들이 좋아한다는 이미지까지.
이러니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있나?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코너 버거의 한국 진출이 결정됐기 때문.
원래대로라면 오코너 버거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북미와 유럽에 먼저 진출하고,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일본에 진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투자했기 때문에 첫 외국 진출지가 한국으로 결정됐다.
왜냐하면 내가 먹어야 하니까.
현재 본사는 미국 내에서 매장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래서 한국 내 파트너사를 물색했다.
미국 최고의 햄버거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식에 많은 요식업 회사들이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화안그룹의 자회사 중 요식업을 담당하는 화안 F&B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실무자들끼리 이미 물밑에서 협상을 끝냈고, 계약서에 사인만 남겨놓은 상황.
첫 외국 진출인 만큼, 이 계약을 위해 숀 오코너가 직접 한국으로 날아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를 위해 기사와 차량을 보냈다.
난 회사에서 그를 맞이했다.
“한국에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대표님.”
“힘들진 않으셨죠?”
“한국은 처음인데, 의외로 가깝네요.”
오랜만인지라 서로 반가워하며 악수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헤이, 미루. 저도 왔어요.”
하나로 모아서 올려 묶은 붉은 기가 도는 금발, 커다란 안경, 콧잔등에 살짝 있는 주근깨.
난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트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