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밤 산책 (1)
평일에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강공원은 한산했다.
사람도 차도 별로 없다.
주차를 하고 내려서 걸어가니, 편의점 근처에 한 여성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약간 작은 체구.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어글리슈즈를 신고, 위에는 분홍색 후드티를 입었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미리 인상착의를 듣지 않았다면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안녕.”
난 작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애한테 말했다.
“봤지? 아는 사이라고 했잖아.”
지유의 얼굴을 확인한 세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헐. 진짜였네.”
“훗.”
동생이 놀란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우쭐하다.
지유는 내 옆에 붙어 있는 세나를 보고는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누구예요? 서, 설마 여자친구?”
그 말에 나랑 세나는 동시에 부인했다.
“무슨 소리야?”
“절대 아니에요!”
남매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받는 것.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동생이야, 동생.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아! 동생…….”
세나는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미루 오빠 동생 한세나예요.”
지유 역시 같은 자세로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지유나입니다.”
지유나는 지유의 본명.
인사가 끝나자 세나는 바로 말했다.
“언니, 진짜 너무 예뻐요!”
“앗, 감사합니다.”
“제 친구들도 다 언니 팬이에요.”
“아, 정말요? 고마워요.”
연예인 보니 신기해서 방방 뛰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애다.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가벼운 화장을 한 것 같긴 하지만, ‘연예인 화장’은 안 했고, 일상복 차림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리려는데, 지유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찍어요.”
그러자 세나는 바로 지유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지유가 사진을 찍기 위해 후드를 벗자 밝은색 금발이 드러났다. 이번 앨범 컨셉에 맞게 염색했다고 하는데, 꽤 잘 어울린다.
세나는 지유와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셀카를 실컷 찍었다.
그렇게 한창 찍더니, 이내 나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오빠가 좀 찍어줘.”
“다 찍은 거 아니었어?”
“얼른.”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대충 찍으려고 자세를 잡는데, 세나가 말했다.
“조금만 왼쪽으로. 아니, 오빠 말고 내 기준으로 왼쪽. 더더더.”
“어디까지 가라고?”
“오케이. 스탑. 나 이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온단 말이야.”
“…….”
내 여동생은 투페이스인가? 아니면, 반대쪽 얼굴에 구안와사라도 왔나?
어쨌거나 시킨 대로 열심히 찍어줬다.
찍으면서 느끼는 건데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잘 나오기 위해 애써 표정을 꾸미는 세나와는 달리, 지유의 표정은 평소처럼 자연스러웠다. 하기야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일상일 테니.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아주 쪼오끔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이겠지?
“오빠는 안 찍어도 돼?”
“……응?”
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유가 손짓했다.
“선배님도 같이 찍어요.”
뭐, 세나도 있으니 함께 찍어도 괜찮겠지?
우리는 지유를 가운데 놓고 양쪽으로 섰다.
그런데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오빠 인상 쓰지 말고 좀 웃어봐.”
나름 열심히 웃는 중이다.
그렇게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자, 지유가 세나에게 말했다.
“지금 찍은 사진 저한테도 보내줄래요?”
“네. 린스타 DM으로 보내드릴까요?”
“그건 막아놔서…… 아! 연락처 알려줄게요.”
“정말요? 그래도 돼요?”
“네.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만 않으면요.”
“네네. 그럼요.”
세나는 지유의 연락처를 등록하고,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냥 언니라고 부를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니라고 부르고 있지 않았나?
지유는 바로 승낙했다.
“응. 알았어. 세나라고 했지?”
“네. 언니, 이번 노래도 너무 좋아요. 금발도 너무 잘 어울리고. 저 요즘 코노 가면 언니 노래만 불러요.”
“나도 예전에 코노 많이 갔었는데. 혼코도 자주 하고.”
“정말요?”
“응. 거기서 많이 연습했어”
“언니는 주로 무슨 노래 불러요?”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오랜만에 친언니와 재회한 듯하다. 얘는 무슨 친화력이 쿼카 수준인가?
“언니 만났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해도 돼요?”
“그럼.”
아까 나 같은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 인증샷을 남겨 놓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런 건 로키의 합성으로도 해결되지 않을까?
“그리고 제 친구들이 그러는데, 저보고 언니 닮았대요.”
본인 앞에 두고 그런 막말 하지 마. 화낼지도 몰라.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네?”
한창 업돼 있던 내 동생이 금세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나보다 더 예쁜데. 얼굴도 작고 피부도 새하얗고. 웬만한 연예인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아.”
그 말에 세나는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아, 아니에요. 저 안 예쁜데.”
난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니 다행이네.”
그러자 세나는 초치지 말라는 듯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모습을 보며 지유는 웃었다.
“그런데 저희 오빠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음, 그게…….”
그 물음에 지유는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난 대신 말해줬다.
“말했잖아. 선후배라고.”
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학교에서 만났어.”
“와아! 우리 오빠가 연예인을 알고 있다니.”
전용기 태워주고 휴양지 데려가 준 것보다 연예인 알고 지내는 게 더 신기한 모양이다.
이대로 놔두면 하루 종일 지유를 붙잡고 떠들어댈 기세다.
내 동생이야 넘쳐나는 게 시간이지만, 지유는 그렇지 않겠지.
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지?”
지유는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아! 맞다맞다. 언니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뭔데?”
“이번에 뜬 열애설 진짜예요? 뮤키즈 주노 오빠와 사귄다는 거요.”
“넌 무슨 남의 사생활을…….”
세나의 입을 틀어막으려는데, 지유가 재빨리 말했다.
“아, 아니야. 그건 기레…… 아니, 기자가 멋대로 쓴 거야.”
“같이 나오는 사진이 찍혔던데.”
지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둘만 만난 게 아니라 뒤풀이 자리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어. 주노랑은 따로 연락도 한 적 없어.”
“아아, 그렇구나. 저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응. 절대 아니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니, 열애설로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다.
“언니 하나만 더…….”
“이제 집에 가도록.”
그만 가라고! 제발 가라고!
“칫! 알았어.”
세나는 지유에게 말했다.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언니.”
“벌써 가려고?”
“네. 너무 졸려서요. 저희 오빠랑 재밌게 노세요!”
세나는 괜히 하품을 하는 척하며 눈을 찡긋했다.
뭐야? 윙크를 왜 보내?
그러고는 이내 차를 몰고 돌아갔다.
세나가 가고 나자 지유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까이서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지유인 줄 모를 것이다.
가운데서 신나게 떠들던 애가 사라지니, 왠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미안. 동생이 굳이 따라오겠다고 해서.”
“괜찮아요.”
사실 하도 못 믿겠다고 하니, 눈으로 확인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덕분에 오빠로서 체면이 살았다.
“예쁘네요.”
“누구? 세나?”
“네.”
지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도 오빠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오빠가 없는 모양.
“외동이야?”
“아니요. 남동생 하나 있어요.”
“그래?
난 잠시 남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헉! 누나가 지유라니!
“누나가 유명 연예인이 됐으니 동생이 엄청 좋아하겠는데.”
그러자 지유는 손을 저었다.
“에이, 좋아하긴요. 예전이랑 지금이랑 똑같아요. 음방 1위하고 집에 갔더니,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상금 받았으면, 용돈 좀 달래요.”
참고로 음방 1위는 상금이 없다.
지유는 말을 하며 볼을 살짝 부풀렸다.
“맨날 저만 보면 용돈 달라고 하고.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제가 무슨 용돈 주는 기계도 아니고.”
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돈 받으려면 평소에 좀 예쁜 짓이라도 하든가.”
“그러니까요. 맨날 툴툴거리고, 연락도 잘 안 받고, 짜증내고, 반말하고.”
“맞아맞아.”
딱 한세나네.
남매 사이는 다 비슷한 건가?
“동생은 지금은 뭐하고 있어? 대학생이야?”
“얼마 전에 군대 갔어요. 훈련소 끝나고 자대로 갔다고 하는데, 파주 쪽이래요.”
“거기 1사단 아니면, 9사단일 텐데.”
“아! 맞아요. 1사단이래요. 잘 아시네요.”
그 지역에서 군 생활한 사람이라면 다 알기 마련이지.
“면회 오라고는 안 해?”
만약 지유가 군부대 면회를 가면 어떻게 될까?
부대가 발칵 뒤집어지고, 주말에 간부들이 전원 출근하는 진풍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어쩌면 군단장이 갑자기 부대 점검하겠다고 달려올 수 있다.
“전 가고 싶은데, 절대로 오지 말래요. 부모님은 와도 전 오면 안 된대요.”
“아니, 어째서?”
“그냥 연예인 동생이라는 게 알려지는 게 싫대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저랑 남매라는 거 잘 몰라요.”
“그래? 나였다면 동네방네 자랑했을 것 같은데.”
“소문 퍼지거나 하면 피곤해진대요. 혹시라도 자기 이름이나 얼굴 알려지는 거 싫다고.”
“하긴.”
그 심정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대중에 얼굴이 알려지면 피곤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뭘 하든 사진이 찍힌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대체 연예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몰라.
컨티뉴 캐피탈이 내 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돼도, 내가 여러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재계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내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유성그룹이 막아주고 있기 때문. 이는 재벌가 사람들의 사생활이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재벌과 친분을 쌓으니 이런 점이 좋단 말이지.
“우리, LA에서 만난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그러네.”
K-팝 페스티벌이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벌써 몇 달 전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선배님은요?”
“나야 일했지.”
그사이 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때 함께 먹었던 오코너 버거 아직도 생각나요. 엄청 맛있었는데.”
“그거 맛있지.”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미국에만 지점이 있지만…….
“조만간 한국에 들어올 거야.”
지유는 반색했다.
“정말요?”
“응.”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이미 진행 중이다.
난 편의점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좀 마실래?”
“아! 제가 살게요.”
“아니야. 내가 가서 사올게. 뭐 마실래?”
“차 종류면 다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
괜히 밝은 곳에 들어갔다가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난 혼자 편의점으로 들어가 페트병에 든 보리차와 커피를 사왔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야?”
“그냥 산책 좀 하고 싶어서요.”
그러고 보면 한강도 오랜만이다.
매일 집에서 보기는 해도 정작 밖으로는 잘 안 나오니.
“그럼 좀 걸을까?”
“네, 좋아요.”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요즘 엄청 잘나간다며?”
“아니에요.”
“아니긴.”
지금 K-팝 시장은 걸그룹 대전 중이라고 한다. 예쁘고 실력 있는 걸그룹들이 몰려나와 차트 순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지유는 꿋꿋이 여자 솔로 가수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인기는 그야말로 원탑.
게다가 노래뿐 아니라, 연기 쪽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참고로 출처는 이동호 대표.
엔터사에 투자하라고 했더니, 연예계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다. (걸그룹과 여자가수 한정)
1회차 때와는 달라진 지유의 모습에 괜히 내가 다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