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리메이크 (4)
AE는 1980년대 설립된 미국의 대형 게임사이자 퍼블리셔.
특히 스포츠 게임 분야의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현질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형 개발사로, 그동안의 인수합병 덕에 수십 개의 스튜디오를 거느리고 있다.
게리 리처드슨이 설립한 GR스튜디오 역시 그중 하나.
이곳은 스타스트림이라는 멀티 플랫폼 초대형 MMORPG를 개발 중이었다.
초기에 그는 자신의 돈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개발비는 소진돼, 투자자를 찾아나섰다.
여기에 AE가 투자의사를 밝히며 GR스튜디오는 AE 산하로 편입됐다.
그런데 AE는 개발에 간섭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유명한 IP라도 돈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개발을 중단시켰다.
그렇게 죽인 시리즈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일부 게이머들에게는 원수로 여겨졌다.
돈을 투자한 AE는 늘 그랬듯 개발에 간섭했고, 게리 리처드슨은 이에 여러 차례 항의했다.
사이가 워낙 안 좋다 보니 이전부터 AE를 떠날 거라는 소문이 많았는데, 이번에 아예 AE랑 결별하고 LD스튜디오랑 손을 잡은 것이다.
“게리 리처드슨이라니. 나에게는 영웅이나 다름없지.”
말과 표정에서 존경심이 듬뿍 묻어났다.
“저 게임 잘될 것 같아?”
선우의 대답은 의외였다.
“글쎄. 내 생각에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니, 왜?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극찬을 하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실 울트라7부터는 재탕이라는 느낌이 좀…….”
린텐도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미야모토 시타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개발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게임은 언제나 새로웠다.
그러나 게리 리처드슨은 RPG 한 장르에만 매달렸다.
만약 그만 그 게임을 만들었다면 계속해서 성공을 거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장에는 이미 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수많은 RPG가 있었다.
“게리 리처드슨이 게임 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천재 개발자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가 업적을 이뤘던 시기와 현재의 개발환경은 많이 달라졌거든.”
“본인이 게임의 미래를 만들었지만, 그 미래에는 뒤처졌다는 건가?”
“바로 그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공개된 걸 보면 개발이 잘되고 있는지도 좀 의심스럽고.”
“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얘가 게임 보는 눈이 뛰어나단 말이지.
선우의 지적은 정확했다.
난 스타스트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다.
LD스튜디오는 인수를 발표하며 스타스트림을 3년 안에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개발은 이어졌으나, 출시는 계속 지연됐고,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렇게 5년이 넘는 개발 기간과 6억 달러의 개발비를 쏟아부은 끝에 베타 버전이 공개됐다.
결과물은?
망작도 이런 망작이 없었다.
처음에 얘기했던 광활한 우주, 치밀한 세계관, 개성 있는 NPC, 다양한 외계 종족과 행성별 캠페인 등은 하나도 구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버그.
엉망인 물리엔진과 각종 시스템 오류로 인해 제대로 된 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놀란 LD스튜디오는 개발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GR스튜디오를 해산했다.
이에 게리 리처드슨은 LD스튜디오가 계약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해, 3300만 달러의 배상을 받아낸다.
이는 훗날 우주 먹튀 사건으로 불렸다.
그냥 먹튀도 아닌 ‘우주’가 붙은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말아먹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게리 리처드슨이 LD스튜디오에서 뜯어낸 돈으로 정말로 우주여행을 떠났기 때문.
마지막 기대였던 스타스트림마저 망하며, LD스튜디오는 그대로 몰락했다.
100퍼센트 이것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게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돈과 인력, 시간을 낭비했으니.
결국 LD스튜디오는 이후 중국 게임사에 인수된다.
그러나 현재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
만약 아는 사람이 이 게임에 투자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렸을 것이다.
난 잠시 진태경 대표를 떠올렸다.
“…….”
굳이 말릴 필요 없겠지?
게리 리처드슨을 영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경영자 개별의 선택이다.
누가 강제로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 * *
선우는 회사에서 먹고 자며 판타지아 테일즈 리메이크에 매달렸다.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치는 중이라고 한다. 때문에 SW게임즈가 있는 층은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며칠 동안 나 혼자 출퇴근했다.
일을 끝마치고 혼자 집에 돌아와 보니, 웬 금발머리 여자애 하나가 소파에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
뭐지?
남의 집 침대를 차지하고 수프를 거덜 낸 골디락스(Goldilocks, 금발머리)를 본 곰 세 마리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순간, 잘못 들어왔나 싶어서 그대로 백스텝을 밟을 뻔했다.
“어! 오빠 왔어?”
나를 본 금발 여자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선우 오빠한테 전화해서 비번 물어봤어.”
“왜 나한테 연락 안 하고?”
“오빠에게 연락하면 안 알려줄 것 같아서.”
잘 아는구나.
“여긴 어쩐 일이야?”
“엄마랑 싸웠어. 집에 안 들어갈 거야.”
“대학생이…… 가출?”
난 당황하며 물었다.
“뭐 때문에?”
“피어싱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안 된다고 하잖아.”
“흠, 그래?”
너무하네. 우리 집이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학생이면 피어싱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해보니, 양쪽 귀에 귀걸이가 두 개씩 걸려있다. 저기서 더 뚫을 곳이 있나?
“어디에 할 건데?”
“배꼽.”
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그걸 어디에 뒀더라?”
“뭐 찾아?”
“잠깐만 기다려. 금방 몽둥이 찾아와서 찜질해줄게.”
그러자 세나는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아, 뭐래?”
이럴 때를 대비해 골프채라도 사놓을 걸 그랬나?
난 경고하듯 말했다.
“너 하기만 해.”
“하면 어쩔 건데?”
난 딱 잘라 말했다.
“용돈 압수.”
“와, 더럽게 치사해.”
“차도 압수.”
그러자 세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됐어! 안 해!”
“몰래 했다가 걸리면 바로 다 압수야. 앞으로 배 까서 검사한다.”
배…… 배를 보자.
“안 한다고!”
피어싱보다는 용돈과 차가 더 좋은 모양이다.
훗, 고작 이 정도 의지로 배꼽에 구멍을 뚫으려 하다니.
내 동생이지만 의지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혹시 날 닮아서 그런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헛된 생각을 한 거야?”
“얼마 전, 예진이가 한 거 보니까 예쁜 것 같아서.”
박예진이면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세나의 친구인가?
“아무튼 잘 해결됐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도록.”
“어차피 내일 근처에서 친구 만나기로 했으니까. 나 여기서 자고 갈게.”
무슨 남의 집을 강남 숙소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남는 방 있으니 재워도 상관없긴 하다. 늦은 시간에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난 잠시 소파에 앉아 쉬었다.
쟤가 누워있는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인데.
조용히 TV를 보던 세나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왜?”
“나 누구랑 좀 닮지 않았어?”
“갑자기?”
“잘 봐봐. 누구 생각나지 않아?”
“으음…….”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오랜만에 여동생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 동그란 눈, 적당한 코, 삐죽거리는 입술, 약간 작은 키, 유아 체형.
이걸 종합하면…….
“미어캣?”
그러자 세나는 바로 짜증을 냈다.
“아, 뭐래? 미어캣이 왜 나오냐?”
“…….”
닮지 않았나?
“연예인 중에서 다시 잘 생각해봐.”
“개그맨?”
“아니아니. 가수.”
문제가 너무 어렵다.
이 정도면 거의 리먼 가설 급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답을 맞히지 못하고 헤매자, 세나는 알아서 답을 알려주었다.
“나 지유랑 좀 닮지 않았어?”
“……응?”
아니,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수소트럭 주행 영상이 알고 보니 언덕에서 굴린 거라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얘기다.
난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물었다.
“누구랑 닮았다고?”
“가수 지유. 혹시 몰라?”
아니까 물어본 거다.
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못 찾았던 몽둥이가 어디 있더라?”
“아, 쫌! 대충 보지 말고 자세히 좀 보라니까.”
“…….”
그 말 듣고 자세히 보니 더 안 닮았다.
세나는 최대한 귀여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지유가 금발을 하고 나왔단 말이야.”
“아니, 머리색이 같아서 닮은 거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겼게?”
그러자 세나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자꾸 뭐래? 애들이 다 나보고 지유랑 닮았다고 했어.”
“……정말 좋은 친구들이구나.”
친구가 상처받을까 봐 거짓말을 하다니.
아니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으니, 나쁜 친구들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난 착한 오빠라서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내가 지유를 만나봐서 아는데, 너랑 전혀 안 닮았어.”
“오빠가 지유를 만나봤다고? TV로 본 게 아니라?”
“응. 만나봤어.”
“뻥치지 말고.”
“넌 언제부터 오빠 말을 못 믿었니?”
“어렸을 때 내 세뱃돈 맡아주겠다고 가져가 놓고 안 돌려줬을 때부터?”
“…….”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니?
한번 회귀를 했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동생 세뱃돈을 스틸했을 정도면 아주 중요한 곳에 썼음이 분명하다.
“그 돈으로 게임 산 걸 보고 어이가 없더라.”
아마 꼭 사야 하는 게임이었을 거다.
“아무튼 진짜 만났어.”
“왜? 오빠가 지유랑 무슨 관계라고?”
“…….”
그러게. 무슨 관계일까?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선후배 관계. 걔 한국대야.”
“그럼 오빠는 한국대 후배들 다 알고 지내?”
“뭐, 그렇진 않은데…….”
전여친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줘야 하나?
“흐음.”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믿든지 말든지 신경 안 썼겠지만, 상대가 혈육이다 보니 왠지 울컥한다.
“진짜라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연락 못 하는 연예인이 없어. 그때 뮤키즈 제논 영상 보내준 거 봤어, 못 봤어?”
그러자 세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그 영상 대체 뭐야? 대체 제논 오빠한테 뭐라고 한 거야?”
“부모님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애한테 한마디 해달라고 했는데.”
“뭐라고? 그럼 제논 오빠가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
부모님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애,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동생이랑 얘기하니 왠지 중고딩 시절 싸우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내가 많이 울리긴 했지.
“아무튼 지유 만난 거 사실이니 그렇게 알도록.”
세나는 손을 펼쳤다.
“증거 내놔 봐.”
“응?”
“만났으면, 같이 찍은 사진 같은 거 없어?”
“없는데.”
세나는 피식 웃었다.
“뭐야? 역시 뻥이네.”
“…….”
아, 빡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좀 찍어놓을 걸 그랬나?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통화해서 확인시켜줄 수도 없고.
그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에는 지유의 이름이 떠있었다.
그걸 본 세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진짜 지유는 아니겠지?”
“…….”
놀랍게도 이 타이밍에 진짜 지유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