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리메이크 (1)
유재호 회장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겠습니까?”
보통 콘솔 한 세대를 6~7년 정도로 잡는다. 그리고 한 세대 콘솔이 대박을 칠 경우의 판매량이 1억 대다.
난 자신 있게 말했다.
“레전드덱은 콘솔과 모바일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게임기죠. 클라우드 게이밍을 지원하는 만큼, 고사양 게임과 모바일 게임을 얼마든지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휴대용 게임기인 만큼 1가구 1기기가 아닌, 1인 1기기가 가능합니다.”
“하긴, 게임 수요는 엄청나니까요.”
최근 스마트폰 성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얼마나 게임이 잘 돌아가느냐다.
게임을 안 할 거면 뭣하러 최신 폰을 사겠나?
“레전드덱이 많이 보급되면, 코스믹폰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겠어요?”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는 여전히 엔플의 엔스토어와 구블의 플레이마켓에서 퇴출 상태. 웹 브라우저를 통한 클라우드 접속만 가능하다.
반면 코스믹스토어는 레전드게임즈 스토어와 협력하고 있다.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를 통하면 어느 기기에서나 게임을 이어서 할 수 있다.
그러니 레전드덱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코스믹폰을 구매할 가능성도 높아지겠지.
유재호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더욱 서둘러야겠군요. 잘하면 출시 시기를 3개월 정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 깜짝 놀랐다.
“정말요?”
“예. 모든 부품 업체들에게 지시해놓았습니다.”
생산 스케줄을 앞당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유성전자가 전세계에서 수직 계열화가 가장 잘되어 있는 기업이기 때문. 반도체 등의 부품은 물론이고 완제품까지 직접 생산이 가능하다.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까?
* * *
당연히 친구에게 가장 먼저 알려줬다.
“기쁜 소식이 있어.”
“뭔데?”
“레전드덱 출시가 3개월 정도 빨라질 것 같아.”
“오, 그래? 잘됐네.”
“그사이 런칭 타이틀 만들 수 있지?”
내 말에 선우는 당황했다.
“응? 뭔 소리야?”
“전에 말했을 때 만들어보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해보겠다는 거지,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 트리플 A급 게임 개발이면 기본이 5년이야. 간단한 캐주얼 게임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게임 만들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년은 걸릴 텐데……. 게다가 3개월이 줄었다며?”
“불가능해?”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지금부터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크런치 모드로 달려도 절대 불가능해.”
“공밀레로 어떻게 안 되나?”
그러자 선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개발자만 갈아 넣으면 게임이 나오는 줄 알아?”
“…….”
역시 무리인가?
지금도 ‘퀵샤카 오션월드’와 ‘니더스에 어서 오세요’가 대박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블록밸리 게임이자 브랜드 홍보 게임.
SW게임즈의 정체성을 알릴 만한 게임이 필요하다.
레전드덱 런칭 타이틀로 하나 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문제는 개발할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말하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
“흠, 그 말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진짜야. 한번 믿어봐.”
“뭔데?”
“다녀와서 말해줄게.”
* * *
진태경 대표.
그가 설립한 LD스튜디오의 역사는 곧 브라더후드 게임의 역사였다.
PC MMORPG 브라더후드는 한국 MMORPG의 신기원을 열었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장수 게임이다.
그리고 모바일로 출시한 브라더후드M은 한국 게임 역사상 가장 많은 매출과 수익을 기록했다.
덕분에 LD스튜디오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브라더후드M이 흔들리며, LD스튜디오 역시 같이 흔들렸다. 언제까지 브라더후드 IP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만큼, 새로운 게임이 필요했다.
그래서 LD스튜디오는 새로운 게임 제작에 나섰다.
한국 최대 게임사인 이곳은 연봉 1억이 넘는 고급 인력 수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나리오 라이터,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등.
문제는 이들을 지휘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있는 인력도 전부 모바일 게임 쪽에 편중되어 있다.
게임 개발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
당초 목표했던 대로 게임이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을 정도로 워낙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디렉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와서 새 게임을 만들려고 보니, 새삼 강선우의 존재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가 만든 ‘퀵샤카 오션월드’와 ‘니더스에 어서 오세요’는 블록밸리의 간판 게임으로 자리매김했다.
10대들의 필수 게임이 되며 블록밸리와 관련 브랜드들의 매출마저 끌어올렸다.
퇴사 후 따로 회사를 만들자 개발 3팀 직원들 대부분이 그를 따라간 걸 보면 인망도 있었던 모양이다.
게임 개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인력 관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뛰어난 재능이다.
그런데 그런 개발자를 스카우트는 못 할망정 내쫓았다!
‘대체 왜 몰랐지?’
진태경 대표는 개발 과정에서 몇 차례 강선우의 보고를 받았고, 짧은 얘기를 나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췄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만약 강선우가 회사에 있을 때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줬다면?
그랬다면 그 모든 이익을 LD스튜디오가 얻었을 것이다.
물론 막상 LD스튜디오에 남아 있었다면, 랜덤박스나 만들고 있었겠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점 중 하나는 대체 어떻게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았냐는 것이다.
덕분에 신생 게임사임에도 업계의 주목과 함께 자본력을 갖출 수 있었다.
‘설마 컨티뉴 캐피탈 쪽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어쨌거나 이미 떠난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할 만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내부에 인물이 없으면 외부에서 데려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다행히 LD스튜디오는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게임 스튜디오 인수를 검토 중이었다.
한창 인수 대상을 물색하던 도중, 진태경 대표는 박수형 부사장에게서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컨티뉴 캐피탈 쪽에서 만남을 요청했다고?”
“그렇습니다. 대표님을 직접 만나뵙고 싶다고 합니다.”
연락해온 사람은 한미루.
진태경은 재계에도 발이 넓은 편이다. 때문에 한미루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지사가 아닌 본사 쪽에서 파견 나온 인물이다. 공식적으로는 팀장이지만, 어쩌면 한국 지사장보다도 높은 위치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컨티뉴 캐피탈이 벌인 모든 일들은 그가 주도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아마 LD스튜디오 공매도 역시 그렇겠지.’
확률 조작 사태가 터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브라더후드M은 단일 게임으로는 최대 매출과 수익을 자랑했다.
그러나 확률 조작이 발각되며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매출과 수익은 폭락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국정감사장까지 불려가야 했을 정도다.
반면, 이를 폭로한 컨티뉴 캐피탈은 LD스튜디오를 공매도해 20조 원을 넘게 챙겨갔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데, 그 일의 주범(?)이 갑자기 만남을 요청해온 것이다.
“무슨 일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컨티뉴 캐피탈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브러더후드M이 레전드게임즈 스토어에 들어가 있기 때문.
기존에 엔플과 구블이 30퍼센트를 받는 것에 비해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는 단 12퍼센트만 받는다.
덕분에 인앱결제 수수료를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브라더후드M의 경우 결제금액이 워낙 큰 데다가 결제의 9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하는 만큼 자체 결제 시스템을 구축해도 되지만, 그 경우에는 레전드게임즈 스토어에서 제공하는 각종 기능을 이용할 수 없다.
레전드게임즈 스토어의 음성 채팅과 메신저는 이제 게이머들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만큼, 대부분의 게임사들은 레전드게임즈 스토어의 정책을 따랐다.
덕분에 이제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는 모바일 시장에서 엔플의 엔스토어와 구블의 플레이마켓만큼이나 중요한 ESD로 성장했다.
진태경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해.”
* * *
기사는 LD스튜디오 본사 앞에 차를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LD스튜디오 본사는 원래 삼성동에 있었다. 그러다가 판교 개발 당시 성남시에 부지를 사서 사옥을 지었다.
대지는 1만 제곱미터가 넘고, 지상 13층, 지하 7층의 규모다.
안에는 식당, 사내병원, 어린이집 등이 위치해 있다. 선우 말에 따르면 샤워실과 숙소도 잘 갖춰져 있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한다.
직원 수는 무려 4500명.
참고로 그 유명한 아이스스톰의 직원 수가 5천 명 안팎이다. 이 정도면 세계적으로 손꼽는 거대 게임사라 할 수 있다.
차에서 내리자 정문 앞에서는 트럭 시위가 한창이었다.
[일반유저 조롱하는 스트리머들을 위한 게임!]
[고객들을 기만하는 프로모션 퇴출하라!]
[일반유저 내돈내산! 프로BJ 니돈내산!]
[LD야, 우리도 순정이 있다! 프로모션으로 장난치면, 마! 그땐 현실에서 공성전 하는 거야!]
정말이지 여기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맞은편 건물에서 마차가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응?”
순간, 잘못 봤나 했다.
뭐지? 여기서 마차가 왜 나와?
마차에는 ‘무책임한 공지! 계속되는 유저 기만! 방만한 운영! 당장 소통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목청껏 소리쳤다.
“결제는 고객님 개별의 선택이고, 피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 대표는 당장 나와 사과하라!”
하다 하다 이제는 마차까지 시위에 동원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로 운영자가 저런 망언을 했단 말이야? 망하고 싶어서 작정했거나,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되나?
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다가 그만뒀다.
판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안내에 따라 대표실로 들어가자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대체로 CEO들을 만나면 나이에 비해 자기 관리가 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갑습니다. 진태경입니다.”
“안녕하세요. 컨티뉴 캐피탈의 한미루입니다.”
우리는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한국대를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경제학과입니다.”
진태경 대표가 갑자기 대학 토크를 꺼낸 이유는 그가 한국대 출신이기 때문. 그 유명한 한국대 87학번이다.
나와는 학연이 있는 셈이다.
“학교 다니는 동안 한국대 87학번의 전설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 IT업계에는 유독 한국대 87학번이 많다.
당시는 컴퓨터가 막 가정용으로 보급되고,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기.
그때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우며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포털을, 누군가는 워드 프로그램을, 누군가는 게임을.
이들은 졸업 후 90년대 IT붐을 타고 창업했고, 그 기업들은 이후 한국 IT업계의 기둥이 됐다.
네오틴, 타피오카, 디옴, NOT, LD스튜디오, 렉슨, 훈민워드 등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포털 기업과 게임 기업들의 창업주들이 알고 보면, 다 같은 대학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진태경 대표 역시 그중 한 명이다.
원래 LD스튜디오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후배인 김재경의 합류로 브라더후드를 내놓으며 본격적인 게임회사의 길을 걷게 된다.
“오면서 보니까 입구가 소란스럽던데요.”
진태경 대표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언제나 불만을 가진 소비자는 있기 마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