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Computer Graphics (11)
애니타 버몬트.
네브래스카주 출신의 그녀는 20대 초반에 배우의 꿈을 안고 LA로 왔다.
그리고 여느 무명 배우들처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자신의 이력서를 돌렸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다리안 헤럴슨과의 만남이다.
‘플라워 문’의 촬영장에서 단역배우인 애니타를 본 다리안은 한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애니타가 다리안과 사귀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파파라치가 그녀를 쫓아다녔고, TV쇼와 토크쇼는 그녀를 찾았다. 스타와 셀럽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각종 패션쇼와 행사에서 초대장이 쇄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다리안과의 결혼 후 애니타는 유명인이 됐다. 그녀는 모델과 배우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결혼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다리안 본인 역시 인정했듯 그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연기는 완벽했지만 안하무인이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결국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그녀는 1천만 달러의 위자료를 받고 합의 이혼했다.
이혼 후, 애니타는 이제부터 자신의 진짜 인생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다리안과의 결혼 덕분에 그녀는 유명해졌고, 1000만 달러라는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만큼의 돈도 손에 넣었다.
중년의 나이인 다리안과는 달리 그녀는 아직 20대였다. 유명세를 얻은 만큼 이제부터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혼 소송이 끝나자마자 대중은 그녀에게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큰 관심을 보이던 감독과 제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녀를 섭외하려 한 것은 전부 다리안 때문이다. 다리안과 헤어진 이상 그녀에게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다리안은 여전히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인 반면, 애니타는 다시 오디션을 보러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이대로는 안 돼.’
처음에 그녀는 다리안이 업계에 압력을 행사해 자신의 캐스팅을 막고 있다며 피해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관심을 끌기에 부족했다.
애니타는 토크쇼나 언론에 나와 다리안과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불행했는지에 대해 얘기했고, 다리안이 자신을 수차례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대중은 다시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응원했다.
처음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다리안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애니타에게 소송을 걸었다.
할리우드에는 막장 커플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 정도의 폭로전과 소송전은 흔치 않은 만큼, 재판은 내내 이슈였다.
애니타에게 재판은 하나의 쇼였다.
그녀의 표정과 말 한마디는 즉시 기사화됐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고, 모두가 그녀를 응원했다.
“저는 소외되고 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몇몇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그녀를 지지했고, 여성 시민단체는 연대의 의사를 밝혔다.
다리안은 촬영 중이던 영화에서 하차한 반면, 애니타는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중요한 배역도 따낼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휴양지를 다녀온 다리안은 마치 사람이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술도 끊고, 정신과 치료도 적극적으로 받았다.
변호인단을 전부 해고하고 새로 꾸렸다.
적극적으로 합의하려던 이전과는 다르게 강경하게 대응했고, 그동안 숨겨오던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애니타는 결국 소송에서 패소했다.
애니타가 막대한 배상금을 감당해야 하는 신세가 된 반면, 다리안은 바로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전용기와 집을 다 팔아도 배상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애니타는 항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았다.
이전까지 그녀의 말을 믿고 다리안을 비난하던 대중은 이제는 그녀를 비난했다. 인터넷에는 그녀를 개와 합성한 밈 사진들이 돌아다녔다.
애니타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그동안 바닥까지 추락한 다리안을 보며 즐거워했는데, 이제는 자신이 그런 신세가 된 것이다.
이전에는 많은 유명인이 그녀에게 연락해왔지만, 이제 연락이 오는 건 싸구려 가십 잡지나 타블로이드 기자들뿐이었다.
그러던 도중 다리안이 그린 스크린 앞에만 서면 애니타가 떠올라 연기를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업자득이네. 내 인생을 망가뜨렸는데, 본인 인생이라고 멀쩡할 줄 알았어?’
일부 정신과 전문의들은 치료를 위해서는 애니타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 말했다. 애니타와의 사이를 풀어야만 이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에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린 스크린 공포증이 있는 배우를 누가 쓰겠는가?
그녀가 돕지 않는다면, 다리안의 연기 인생도 끝장이다. 다리안은 여전히 그녀의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애니타가 나서서 다리안의 치료를 돕는다면?
언론은 즉각 이 사실을 대서특필할 테고, 대중은 소송전까지 벌인 전남편을 돕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할 것이다.
‘여론도 반전될 테고, 배상금도 안 줘도 되겠지.’
애니타는 다리안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금방 연락이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리안은 연락하지 않았다.
‘왜 연락이 안 오지? 내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연락해볼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런데 이후 들려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바로 써릴 스크린 덕분에 다리안이 문제없이 촬영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
애니타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저건 또 뭔데?’
당황하는 그녀에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죠?”
[로이 테이텀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캐스팅을 취소하겠다고 합니다.]
“……예?”
거대 기업과 맞서 소송을 벌이는 한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
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현재 그녀의 이미지와 딱 맞아들었기에 테이텀 감독은 수백 명의 지원자들을 제치고 그녀를 뽑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캐스팅을 취소하겠다고?’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매니저의 말이 이어졌다.
[아톰 필름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포세이돈에서 데메테르가 나온 분량을 전부 삭제하고 재촬영하겠다고 합니다.]
“뭐, 뭐라구요?”
그녀의 역할은 포세이돈의 둘째 아내인 데메테르. 비중이 큰 조연인 만큼 전체 러닝타임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영화는 이미 후작업까지 끝마치고 개봉일을 협의 중인 상황.
개봉을 미루고 재촬영을 한다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텐데도 재촬영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안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할리우드의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JD 로펌에서 열흘 안에 미납된 변호사비 15만 달러를 납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소심 변호를 중단하겠다고 합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애니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모든 일이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애니타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러다가 다리안이 바베이도스에 다녀온 뒤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토크쇼에서 한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 만난 한 청년이 그에게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뭐, 뭐야? 설마 이게 다 그놈 때문인 거야? 대체 어떤 놈이야? 누군데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어?’
만나기라도 하면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물어 뜯어버리리라.
“아아악!”
잠시 후,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때려 부쉈다.
* * *
난 지하를 통해 옆 건물로 건너갔다.
하도 자주 왔더니 비서의 얼굴마저 익숙하다.
“회장님은요?”
“잠시만요.”
비서는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손님 오셨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중년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유재호 회장이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요코하마 일렉트론 인수 문제는 결국 소송으로 가는군요.”
루퍼트 리우는 여전히 요코하마 일렉트론 차이나를 점거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엔플 연합은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소프트박스는 계약금을 돌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잔금을 납부하라고 맞섰다.
양쪽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니 소송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전문가들은 대부분 계약금을 돌려받기는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이래서 계약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유재호 회장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얘기했던 그건 이달 안에 해결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꽤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되는 모양이다.
괜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만큼, 확정된 뒤에 알려주는 게 좋겠지?
“아까 나가신 분은 누군가요?”
“디스플레이 부문의 김석영 전무입니다.”
유재호 회장은 감탄하며 말했다.
“써릴 스크린이라니.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유성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죠.”
아무리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어도 하드웨어가 받쳐주지 못하면 소용없다.
써릴 스크린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를 구현할 LED 스크린이 있었기 때문.
바로 유성전자가 2년 전 마이크로 LED 기술을 기반으로 만든 디스플레이 ‘더 스크린(The Screen)’이다.
8K 해상도에 120Hz 고주사율, 1800니트(Nit)의 밝기 등등.
베젤이 없는 모듈러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이어붙일 수 있다. 두께가 얇아 구부릴 수 있어서 평면이든 곡면이든 어떤 형태로든 설치가 가능하고, 바닥과 천장에도 이어 붙여 공간 전체를 덮을 수도 있다.
어느 곳에나 쉽게 설치할 수 있고, 분리도 자유롭다.
“정말 훌륭한 제품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제품이지만, 안타깝게도 판매량은 별로였다.
유재호 회장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너무 비쌌거든요.”
100인치 크기를 설치하는 데 대략 20만 달러 정도가 들어간다.
애초에 가정용이 아닌 주로 기업용으로만 판매됐다. 현재는 2세대 제품으로 판매량이 저조해 3세대 제품을 개발할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써릴 스크린으로 인해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은 할리우드 제작사들로부터 주문이 밀려드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이미 2년 치 주문을 다 받았습니다. 이걸 소화하려면 생산 라인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엄청나게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유성전자의 디스플레이 기술력이 세계 최고라는 것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대중 제품인 TV 판매도 늘어날 테고.
“아까 탐 스콧 CEO와 통화해 여러 얘기를 나눴습니다. 레전드덱 개발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도요.”
콘솔 생산은 기본적으로 하청이다.
소뉴와 NS는 업체에 정해진 금액을 주고 생산을 맡긴다. 이익이 나든 손해가 나든 그것은 원청의 몫이다.
그러나 레전드덱은 개발 단계부터 유성전자와 공동으로 진행 중이다. 따라서 이익과 손해를 레전드게임즈와 유성전자가 함께 부담한다.
유성전자가 전면적으로 협조해준 덕분에 레전드덱의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설마 다시 콘솔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유성전자는 과거 콘솔을 생산했던 전력이 있다. 슈퍼게임차일드, 기가드라이브, 베가 재턴 등등.
심지어 콘솔 게임을 내놓기도 하고, 한글화와 유통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이 별로 안 돼 완전히 철수했고, 그 이후로는 게임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판매량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5년 안에 1억 대는 팔 수 있지 않을까요?”
콘솔이 남는 게 별로 없다지만, 이 정도 팔면 꽤 많이 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