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Computer Graphics (9)
벤자민은 바로 다리안을 찾아가 탐 스콧 CEO의 얘기를 전했다.
그러자 다리안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게임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주겠다는 건데?”
“글쎄.”
“좋은 의사라도 소개해주겠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다리안은 조소를 지었다.
“이미 비싸다는 정신과 의사란 의사는 다 만나봤어. 그런데 전부 돌팔이들이야.”
“설마 레전드게임즈 CEO씩이나 되는 사람이 장난치려고 부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바람이라도 쐴 겸 한번 가보자.”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해봐야 한다.
다리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사람은 전용기를 타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있는 레전드게임즈 본사로 향했다.
탐 스콧은 입구에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세 사람은 미팅실에 앉았다.
탐 스콧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평소 팬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게임과 영화는 공통점이 많은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영화 같은 게임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코지마 히데요시가 있습니다. 원래 그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유명 개발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디렉터보다는 감독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해 저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들어본 것 같습니다.”
“모션 캡쳐(Motion Capture) 기술 역시 원래는 영상 쪽에서 쓰였으나, 지금은 게임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기술입니다. CG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게임이야말로 CG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잘 활용하고 있죠.”
탐 스콧은 한참 동안 게임과 영화의 연관성에 대해 말했다. 대화가 점점 길어지자 다리안은 그에게 말했다.
“그보다 어떻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듣고 싶습니다.”
탐 스콧 CEO는 그에게 물었다.
“아, 예. 실례지만,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다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로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가상 인간을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어 내다니. 믿기지 않아서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감식해보고 나서야 납득했을 정도입니다.”
“레전드게임즈는 로키의 개발 시점부터 스노우 크래시와 협력해가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이 다리안 헤럴슨 씨의 문제를 고치는 것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다리안은 살짝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다른 사람이 대신 연기를 하고 CG로 얼굴을 바꾸려는 겁니까?”
그 말에 탐 스콧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닙니다. 가상 인간보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똑같이 만드는 게 힘듭니다. 전자는 비교 대상이 없지만, 후자는 비교 대상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CG로 얼굴은 흉내낼 수 있어도 연기는 흉내내기 힘들죠.”
“그럼요?”
“레전드게임즈는 써릴 엔진을 활용해 그린 스크린을 대체할 만한 기술을 만들었습니다.”
벤자민은 깜짝 놀랐다.
“뭐라구요?”
그린 스크린은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동안 사용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를 대체할 만한 기술이라니?
‘설마 스크린의 색깔을 바꿨다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여기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탐 스콧은 벤자민과 다리안을 거대한 세트장으로 데려갔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두 사람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앞으로 그린 스크린을 대체하게 될 거라는 겁니까?”
벤자민의 물음에 탐 스콧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리안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거대한 스크린을 보았다.
“이건 대체 뭡니까?”
그 물음에 탐 스콧 CEO는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이걸 써릴 스크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 *
[다리안 헤럴슨의 공황장애. 리버티 제작 중단 가능성은?]
[그린 스크린 공포증으로 알려져……]
[다리안 헤럴슨, 리버티 하차설. 연기 인생 최대 위기!]
감독과 제작사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다리안 헤럴슨이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를 하지 못한다는 소문은 할리우드 전체에 퍼졌다.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못하면 어떡해?
-그렇게 욕을 먹고 조리돌림당했는데, 공황장애 걸릴 만도 하지.
-그린 스크린 앞에 서면 애니타 얼굴이 떠올라 호흡이 멈춰 기절한다 함.
-결혼 생활 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ㅜㅜ
-이혼 이후에도 엄청 시달렸음 ㅎㅎ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더글라스 형사도 전 와이프는 이길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애니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던데.
-애니타가 과연 도와줄까?
-물어뜯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애니타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차라리 하차할 듯.
-이런 거 보면 할리우드 스타도 꽤나 불행하네 ㅜㅜ
-그래도 우리 인생보다는 낫지 않을까?
-나도 좀 불행해지고 싶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지는 않아. 하지만 돈 없고 불행한 것보다는 돈 있고 불행한 게 나음.
이제 다리안의 하차는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고, 누구로 교체될지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
딕 루니, 게리 쿠스, 팰피 길훌리 등 유명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다.
여러 루머가 떠도는 가운데 다리안 헤럴슨은 직접 더 제롬 캐리어 투나잇 쇼, 일명 제롬 쇼에 출연했다.
그의 출연 소식에 애니타를 지지하는 수십 명이 방송국 앞에서 ‘가정폭력범의 출연을 반대한다’라며 시위를 벌였지만, 방송국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는 재판 이후 첫 TV쇼 출연이었다.
다리안과 애니타의 소송전은 할리우드를 뒤흔든 이슈였던 데다가 엄청난 반전이 있었던 만큼, 대중들은 큰 관심을 가졌다. 제롬 쇼의 실시간 시청률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오늘 정말 어려운 분을 모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힘없는 여자를 때린 남자라고 생각했고, 저 역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배심원들과 판사는 저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더군요.”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리안 헤럴슨 씨를 소개합니다.”
세트장이 다리안이 등장하자 방청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마치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박수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다리안이 자리에 앉자 제롬은 위로하듯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다리안은 애니타의 폭로 이후 찍고 있던 영화는 물론, 다 찍어놓은 영화에서도 하차당했고, 그가 출연했던 CF는 전부 내려갔다.
그로 인한 금전적 손실만 수천만 달러였다.
비록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잃어버린 돈과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리안은 담담하게 그동안의 심경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주위의 모두를 원망했습니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고, 도망치듯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환상의 섬 바베이도스 말이군요. 몇몇 기자들은 놀러 갔다고 욕하던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냥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동양인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저를 믿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모든 걸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제롬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 남자는 누굽니까?”
“저도 모릅니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더군요. 다만 연락처는 알고 있습니다.”
“연락해보셨나요?”
“아니요. 시사회 때 초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꼭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예.”
다리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전 이번 일을 겪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혼자 잘난 맛에 살았을 테니까요. 전 그동안 배우는 그저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대중이 없으면 스타도 없다는 것을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 혼자 연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의미가 생기는 건 누군가 저를 봐줬을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몇몇 방청객들은 눈물을 훔쳤고,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토크쇼가 후반으로 다가가자 제롬은 준비해왔던 질문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린 스크린 앞에만 서면 전 와이프 얼굴이 떠올라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다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설마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지는 않을 테고, 뭐라고 하던가요?”
“그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좀 힘드네요.”
“하긴, 저라도 이혼한 전 와이프가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제롬은 갑자기 한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못난 남편을 뒀던 데이나에게…… 미안하다아!”
그의 장난 같은 행동에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나는 제롬의 전 와이프.
이렇게 장난을 칠 수 있는 건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리버티에서 하차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촬영은 문제없이 진행 중이고, 디아민디 감독과도 계속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희는 리버티를 완벽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전 와이프 공포증…… 아니, 그린 스크린 공포증은 극복한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를 하지는 못하니까요. 하지만 계속 치료를 받고 있으니, 차차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제롬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못하는데 어떻게 계속 촬영을 한다는 겁니까? 그린 스크린이 없으면 미국인들은 날씨조차 알 수 없습니다. 집 앞에 토네이도가 오더라도 말이죠.”
이는 날씨 방송이 그린 스크린 앞에서 이뤄지기 때문.
다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는 제롬과 방청객은 물론이고, TV로 보던 시청자들은 의아해했다.
대체 그린 스크린을 쓰지 않고 어떻게 영화를 촬영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 * *
게임은 컴퓨터 그래픽의 총집합.
게임 내에서는 물리엔진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상호작용이 벌어진다.
캐릭터가 땅이나 눈 위를 걸어가면 발자국이 남고, 물에 돌을 전지면 파문이 일고, 미사일을 쏘면 건물이 폭발한다.
최근 게임의 그래픽이 점점 실사화되고 있는 만큼, 그동안 게임 엔진을 영화에 적용할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래픽의 품질이 영화에 쓰기에는 아직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써릴 엔진5는 달랐다.
탐 스콧 CEO는 레전드게임즈 본사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말했다.
“써릴 엔진5는 현실과 이질감 없는 그래픽을 실시간으로 렌더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을 구현하고, 복잡한 형태의 오브젝트를 생성해낼 수 있습니다.”
써릴 엔진은 게임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3D 그래픽 물리엔진.
예전부터 강력한 그래픽 성능으로 게임 업계를 주도했던 써릴 엔진은, 이제 실사를 구현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갔다.
탐 스콧은 곡면 형태의 거대한 LED 스크린이 있는 세트장을 공개했다.
“이것이 바로 써릴 스크린입니다.”
배경이 켜지자 그는 어느새 달에 서 있었다.
단지 LED 스크린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닌, 완벽하게 CG로 구현된 달 표면이다. 그가 걷기 시작하자 달 표면에 옅은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탐 스콧 CEO는 써릴 스크린의 기능을 설명했다.
“LED 스크린에 나오는 배경은 인물의 동선, 카메라의 각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써릴 엔진이 실시간으로 렌더링해 화면을 띄웁니다. 인물이 움직이면 카메라와 배경이 따라 움직이고, 주위의 오브젝트가 상호작용합니다. 게임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장면이죠.”
생각해 보면, 게임 엔진이야말로 세계를 구현하는 데 가장 특화됐다.
오픈월드 게임의 방대한 맵은 처음부터 전부 펼쳐져 있는 게 아니다.
캐릭터가 해당 위치로 이동하면, 그때마다 필요한 맵을 렌더링하는 방식이다.
스크린의 배경은 이번에 설산으로 변했고,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눈이 쌓였다. 하지만 이내 햇살이 내리쬈고 눈은 금세 녹아내렸다.
그는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었다. 모든 장면들이 조금의 이질감 없이 펼쳐졌다.
탐 스콧이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그는 다시 스크린이 있는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화면이 담는 것은 LED 스크린이지만, 지금 보신 것처럼 실시간으로 써릴 엔진을 통해 실사와 같은 3D로 변환됩니다. 써릴 스크린은 향후 영상 미디어 사업의 미래를 바꿔놓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