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Computer Graphics (8)
몇 달 전, 할리우드에는 큰 뉴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다리안 헤럴슨과 애니타 버몬트의 재판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합의 이혼했다. 그러나 애니타는 다리안이 결혼생활 도중 자신을 수시로 폭행했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했고, 다리안은 아니라고 맞섰다.
할리우드에서 폭행, 마약, 불륜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힘없는 여자를 때린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이 일로 인해 다리안 헤럴슨의 이미지는 바닥까지 추락했고, 모든 영화와 CF 계약이 취소된 채 재판에만 매달려야 했다.
초기의 재판은 다리안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가정폭력의 특성상 진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애니타는 다리안이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거나 욕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했다.
그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진술하는 애니타를 동정하고, 다리안을 비난했다.
음주로 인한 난동과 폭력 전과가 있다는 것과 평소의 행실이 안 좋았던 점, 그리고 지속적으로 합의를 종용한 점도 다리안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다리안이 변호인단을 전부 교체한 뒤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아시아계 여성 변호사 릴리안 쟈는 논리적으로 애니타를 추궁했다.
릴리안 쟈는 그녀가 폭행이 있었다고 주장한 날 친구들과 쇼핑을 갔던 점을 지적했고, 당시 매장에 있던 직원들을 증인으로 세웠다.
그날 그녀를 상대했던 화장품 매장 직원들은 얼굴이나 팔에 멍과 상처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애니타는 화장으로 멍을 가렸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폭행 이후 바로 집에서 뛰쳐나왔다는 그녀의 주장과 모순됐다.
애니타 측 역시 증인을 호출했다.
그중에는 다리안과 안 좋게 헤어진 전 와이프 제시카 맥켈런도 있었다.
“다리안은 좋은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보 같고 이기적이에요. 자신밖에 모르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죠.”
그 말에 애니타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증인의 말은 그녀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맹세코 그가 저를 폭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가 술 먹고 난동을 부리거나 물건을 부수긴 해도 여자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애니타 측 변호인은 당황했다.
“이혼 소송 도중 오른팔이 부러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리안 헤럴슨의 폭행 때문이 아닙니까?”
“말했잖아요. 그건 욕실에서 혼자 춤추다가 미끄러진 거라고. 그날 911에 전화한 기록도 남아있을 거예요.”
촬영장에서 다리안과 말다툼을 벌이거나 싸운 배우와 스태프들조차도 폭행 장면이나, 애니타의 얼굴에서 폭행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며, 애니타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다리안은 일관되게 자기주장을 펼친 반면, 애니타의 증언은 수시로 변했다. 하도 말을 바꾸다 보니 그녀의 변호인조차도 뭐가 맞는지 헷갈려했다.
처음에는 애니타를 응원하던 대중들은 점차 등을 돌렸다.
그리고 드디어 재판 결과가 나왔다.
의견이 갈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다리안 헤럴슨의 손을 들어주었다.
애니타 버몬트가 가정폭력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만큼, 그녀의 주장은 전부 허위이며 다리안 헤럴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판사는 다리안 헤럴슨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여 1000만 달러의 배상과 30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 * *
[다리안 헤럴슨-애니타 버몬트 법정 공방, 다리안 헤럴슨의 완승!]
[배심원단 만장일치로 다리안 헤럴슨의 손들어줘……]
[애니타 버몬트, 폭행당한 사실 입증 못해!]
[여론조사 결과 87퍼센트가 다리안 헤럴슨의 주장을 신뢰!]
재판이 끝난 뒤.
애니타는 변호인단과 도망치듯 재판장을 빠져나간 반면, 다리안은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다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번 소송은 결과와 상관없이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저의 인생을 되돌려준 배심원단에게 감사합니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신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감정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다리안은 바베이도스 리조트에서 만났던 한 동양인을 떠올렸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재판에서 이렇게 빨리 승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언 덕분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할 것이다.
가정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승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여론전에서 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다리안 헤럴슨은 재판에서도 이기고 여론전에서도 이겼다.
애니타는 언론을 통해 ‘이 판결은 피해를 당하고 그 사실을 밝힌 여성이 공개적으로 수치와 굴욕을 당하는 시대로 되돌린 최악의 판결입니다. 저는 피해를 입은 모든 여성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는 말로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안타깝게도 대중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ㅋㅋㅋ 피해를 안 당했고 거짓말을 했으니 수치와 굴욕을 당했지.
-처음에는 다리안 욕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리안이 불쌍해짐ㅜ
-사과할 생각은 안 하고, 항소하네~
-항소해야지. 안 그러면 위자료 받은 거 배상금으로 다 토해내게 생겼는데.
-그런데 그거 이미 전용기 사고, 저택 사고, 쇼핑하느라 다 쓰지 않았음?
-지금 변호사비도 못 내고 있다고 하던데.
-ㅋㅋ 피해자 코스프레 하더니 개 같이 멸망했네.
-인생은 실전이야~
* * *
다리안 헤럴슨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였다.
오죽하면 그를 싫어하는 팬들조차도 ‘인성으로는 까도 되지만, 연기력은 깔 수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재판에서 승소해 가정폭력범이라는 누명을 벗자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쇄도했다.
다리안 선택한 것은 벤자민 디아민디 감독의 차기작이었다.
제목은 ‘리버티’로 장르는 사이버펑크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남자가 동료들과 함께 기계인간들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벤자민 디아민디는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자, 다리안의 오랜 친구였다.
사건 초기 모든 사람들이 다리안을 비난할 때도 그는 끝까지 다리안을 믿고 곁을 지켜주었다.
제작 준비는 오래전에 끝마쳤고 주연 배우 캐스팅만 남겨놓았던 만큼, 촬영은 재판 이후 바로 진행됐다.
오랜 기간 연기를 쉬었지만, 다리안은 여전히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태도였다.
안하무인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그는 스태프들에게 밝게 인사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촬영장에서 기다리는 팬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주었다.
그렇게 촬영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리버티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의 특성상 촬영의 상당 부분이 그린 스크린(Green Screen)에서 진행됐다.
다리안은 그린 스크린 앞에 선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초록색 배경뿐.
어떤 색으로 써도 상관없지만, 그린 스크린을 활용하는 이유는 카메라에서 녹색이 더 밝게 잡히기 때문.
또한 원색의 그린은 다른 색상과 겹칠 일이 별로 없다.
이 초록색을 배경으로 바꾸고 인물과 합성하면 영화관에서 보는 실감나는 영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린 스크린에서의 연기는 전적으로 감독의 지시와 배우의 상상력으로 해야 한다.
다리안은 그린 스크린에 자신이 상상하는 배경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장면들이 그린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 어느새 그는 재판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판사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은 와이프를 때렸어! 당신 같은 사람은 감옥에 가야해!’
배심원단은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유죄! 유죄! 유죄!’
분노한 대중들은 그에게 썩은 과일과 돌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이어서 애니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리안은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 *
다리안은 병원에서 깨어났다.
옆에 있던 벤자민은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리안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아니. 아마 오랜만에 연기를 해서 그런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연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린 스크린 앞에만 서면 몸이 굳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발작을 일으켰다.
벤자민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다.
그린 스크린은 영화 제작에서 필수다.
이는 꼭 현실에 없는 장면을 만드는 것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구현하기 힘든 세트장이나, 해외 로케이션을 대신하는 용도로도 사용됐다.
할리우드 영화의 촬영은 기본적으로 LA의 스튜디오에서 이뤄진다.
만약 뉴욕이나 파리의 장면을 찍어야 한다면, 예전에는 실제로 감독과 배우, 그리고 촬영 스태프들이 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가야했다.
도로나 인도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당국에 촬영허가를 받아 교통과 인원을 통제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갑자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진다면?
그럼 촬영은 취소되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당국에 촬영허가를 받고, 다시 교통과 인원을 통제해야 한다.
그런데 그린 스크린을 활용하면 이런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어느 도시든 그린 스크린에서 찍고 배경을 합성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날씨와 계절 역시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그린 스크린의 사용 범위는 점점 넓어지는 추세였다.
그런데 배우가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예 연기를 할 수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복귀가 너무 일렀을 수도 있겠군.’
영화배우는 항상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직업인만큼, 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기 쉬웠다.
그런데 다리안은 최고의 스타에서 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을 겪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고립되어 있었고,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때문에 오랜 기간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재판에서 승소하며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일단 그린 스크린에서 하는 연기는 제외하고 다른 장면들부터 촬영하자.”
“하지만…….”
“이건 친구로서가 아닌 감독으로서의 결정이야. 내 말에 따라.”
“알았어. 최선을 다해볼게.”
벤자민은 다리안이 극복해낼 거라 믿었다.
다리안 역시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 등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린 스크린 앞에서의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작사에서는 지금이라도 주연 배우를 교체하라고 압박했고, 다리안 역시 하차 의사를 밝혔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번에 하차하면, 할리우드 복귀는 어려워질지 모를 텐데.”
그가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 쫙 퍼졌다.
이로 인해 촬영 도중 하차한다면, 앞으로 누가 그를 캐스팅하겠는가?
그러나 다리안의 결심은 확고했다.
“나로 인해 모두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어.”
벤자민 역시 더 이상 촬영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그동안 촬영한 필름들을 돌려보았다.
다리안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하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과연 다른 배우를 찾을 수 있을까?’
조연도 아닌 주연 배우를 하루이틀 안에 캐스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 제작이 몇 달은 지연될 테고, 첫 장면부터 다시 촬영해야 하니, 제작비는 더욱 불어날 것이다.
벤자민은 결심을 하고는 다리안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제작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레전드게임즈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습니다. 감독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전드게임즈가?”
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레전드게임즈는 잘 알고 있다.
‘게임회사가 나한테 무슨 일로?’
벤자민은 의아해하면서 말했다.
“알았어. 전화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전 레전드게임즈 CEO 탐 스콧이라고 합니다.]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설마 CEO가 직접 전화할 줄은 몰랐다.
“반갑습니다. 벤자민 디아민디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현재 제작 중인 영화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언론에 다 알려진 얘기인 만큼, 부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그 말에 벤자민은 당황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전화로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리안 헤럴슨 씨와 저희 회사에 한번 찾아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거기 가면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탐 스콧 CEO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예.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