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Computer Graphics (5)
OTT의 경쟁이 격화되며 독점작이 중요해졌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텐츠만 제공한다면, 소비자가 굳이 구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독점 콘텐츠가 있으면, 그걸 미끼로 더 많은 이용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리고 OTT는 영상 시청 시간에 따라 제작사에 수익을 분배해준다. 그런데 이용자들이 OTT가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많이 시청한다면?
그만큼 제작사들에게 줘야 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때문에 각 업체들은 독점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했다.
“넷플레이 독점작 ‘방과 후 생존활동’ 봤어?”
“본 것 같아요.”
“본 거면 본 거고, 안 본 거면 안 본 거지, 본 것 같은 건 뭐야?”
“…….”
정확히는 이번에는 안 봤고, 1회차 때 봤다는 거지.
장르는 좀비물로, 시즌1은 여섯 편으로 나왔다.
내용은 고등학교 수업이 끝날 무렵 갑자기 좀비 사태가 벌어지고, 동아리 학생들이 살아남기 위해 학교를 탈출하는 여정.
투자했을 당시만 해도 넷플레이 측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 가입자들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투자했을 뿐이다.
그런데…….
‘방과 후 생존활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터트렸다.
시청시간이 한국보다 외국이 100배는 많았다. 예상치 못한 흥행에 놀란 넷플레이가 허겁지겁 7개국 더빙을 추가했을 정도다.
이어서 시즌2 역시 여섯 편으로 제작했고, 시즌1보다 더 큰 흥행을 기록했다. 넷플레이 전체 시청시간 10위 안에 들었을 정도다.
‘방과 후 생존활동’은 한국 콘텐츠가 세계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뒤로 넷플레이를 비롯한 글로벌 OTT들은 한국 콘텐츠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업체들끼리 독점작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며, 한국 콘텐츠의 가치는 나날이 올라가는 중이다.
이는 국내 제작사들에게도 큰 기회였다.
과거에 드라마가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계약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넷플레이에 올라가는 순간 전세계 넷플레이 가입자들이 함께 시청한다.
“이거 만든 사람이 탁동식 감독이거든. 현재 ‘탁스토리’의 공동 대표로 있지. 지금 후속작을 준비 중이라는데.”
“제목이 뭔데요?”
“아직 가제인데 ‘세븐 라운드’. 장르는 배틀로얄.”
“어…….”
배틀로얄(Battle Royal)이란 프로레슬링 경기의 룰 중 하나.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이 싸우는 방식이다.
이게 이후 소설과 영화로 넘어오며 하나의 장르로 확립됐다.
“그거 넷플레이 작품 아니에요?”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넷플레이 독점작 ‘세븐 라운드’는 넷플레이 시청시간 부동의 1위로, 전세계적으로 배틀로얄 장르의 붐을 일으킨 것은 물론, 각종 시상식에서 수십 개의 상을 수상했다.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넷플레이 투자가 확정된 것 같긴 해. 일단 도장 찍기 전에 만나는 보자고 얘기해놨어.”
“잘했어요.”
* * *
마침 할 일도 없고, 탁동식 감독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기에 난 동호 선배와 함께 직접 갔다.
약속 장소는 충무로의 3층짜리 빌딩. 탁스토리 본사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 중년 남자를 만났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탁동식입니다.”
안경을 썼고, 머리 스타일은 깔끔하다.
잔인한 장면을 아낌없이 넣는 것과는 다르게 외모는 평범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성격이 좀 까칠하고, 프라이드가 매우 강한 편이라고 한다.
뭐, 천재 감독이면 그래도 되지.
“컨티뉴 캐피탈의 이동호입니다.”
명함을 본 그는 당황했다.
설마 한국 지사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겠지.
난 동호 선배에 이어 자기소개를 하며 말했다.
“한미루라고 합니다. ‘방과 후 생존활동’ 재밌게 봤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스노우 크래시의 루카스 CEO가 감독님의 팬입니다. 엄청 재밌게 봤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나는 좀비물 취향이 아니라 그냥저냥 봤는데, 시드는 엄청 재밌게 본 모양이다.
이걸 보고 나서 ‘한국도 이제는 좀비 강국이네요’라는 평가를 남겼을 정도니. 시드 입장에서는 극찬이라 할 수 있다.
내 말에 탁동식 감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예.
스노우 크래시는 이제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 클라우드 기업. 그런 곳의 CEO가 자신의 팬이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스노우 크래시 CEO가 좀비물을 좋아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네요.”
“그럼요.”
좀비네이도 때문에 CG 프로그램을 만들어줬을 정도니.
인사를 끝마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보내주신 제안서는 잘 봤습니다. 투자를 제안해주신 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만, 이번 작품은 넷플레이와 함께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하기야 넷플레이 역시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테니.
그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넷플레이가 들어온 뒤로 한국의 드라마 제작 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공중파와 케이블에서는 기존에 흥행이 보장된 틀에 박힌 드라마에만 투자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비슷한 장르의 드라마가 쏟아졌죠. 그러나 넷플레이는 다양한 장르에 투자합니다. 덕분에 과거에는 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드라마를 만들 수 있게 됐죠. 원래 ‘방과 후 생존활동’도 모든 방송사에 퇴짜를 맞고 폐기될 운명이었습니다. 넷플레이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죠.”
이는 시장 규모의 차이 때문.
한국 시장만 생각하면 다수에게 먹히는 장르를 만드는 게 당연하다. 방송인 만큼 수위도 조절해야 할 테고.
그러나 전세계 사람이 가입하는 넷플레이는 다르다.
다양한 장르를 갖춰놔야, 다양한 취향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때문에 비주류 장르에도 기꺼이 투자하는 것이다.
“넷플레이 말고도 글로벌 OTT들이 한국 콘텐츠에 엄청 투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탁동식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동호 선배가 물었다.
“어떤 이유인가요?”
“그만큼 아시아 콘텐츠 시장의 성장성이 크니까요. 북미와 유럽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지만, 아시아는 지금도 성장 중입니다. 글로벌 OTT들이 아시아권에서 먹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은 검열로 막혀있는 상태고, 일본은 내수를 벗어나는 작품은 잘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죠.”
그놈의 만화원작 실사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 이유는요?”
“한국의 제작비가 압도적으로 쌉니다. 미국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됩니다.”
단순 계산해도 미국 드라마 하나 만들 돈이면 한국에서는 열 개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
일반적으로 제품은 원가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기 마련. 그러나 콘텐츠는 그렇지 않다.
저예산 영화라고 해서 티켓값이 싸지지는 않으니까.
제작비는 저렴한데 시청 시간이 비슷하다면?
안 할 이유가 없겠지.
이미 넷플레이와 계약하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그는 대화 자리를 서둘러 끝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애초에 거절을 위한 자리였는데, 너무 높은 분이 와서 부담되는 모양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넷플레이와 하셔도 좋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요?”
“콘텐츠가 영원히 넷플레이에 귀속된다는 겁니다. 넷플레이는 ‘방과 후 생존활동’ 투자로 투자비의 50배 이상은 벌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수익은 계속 늘어나겠죠. 하지만 제작사는 제작비에 약간의 수익만 받았을 뿐이죠.”
넷플레이의 투자를 받으면 제작비에 일정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콘텐츠가 손해가 나든 이익이 나든 넷플레이가 가져간다. 이는 넷플레이만이 아니라 모든 OTT가 마찬가지.
“좋게 보면 한국의 제작 환경이 그만큼 좋아진 거지만, 나쁘게 보면 글로벌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있는 셈입니다. 잘 만든 콘텐츠는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합니다. 이를 그냥 돈을 받고 넷플레이에 넘기기는 아깝지 않나요?”
탁동식 감독이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아도 어차피 IP를 넘기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저희는 확실하게 이익을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콘텐츠 제공이나 활용시 반드시 제작사의 동의를 얻고, 거부할 경우에는 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후속작과 2차 창작 역시 제작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는 사실상 IP를 공동으로 행사하겠다는 얘기.
내 말에 그는 살짝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넷플레이의 투자를 받고 IP를 통째로 넘길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투자를 받을 것인지.
이미 한번 대박의 맛을 본 만큼, 넷플레이 역시 그를 붙잡기 위해 여러 조건들을 제시했을 것이다.
넷플레이가 어디서 돈으로 밀릴 기업은 아닌 만큼, 여기서 서로 현질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난 돈 얘기를 하는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방과 후 생존활동’은 매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마디 했다고 바로 정색하는 걸 보니, 프라이드가 세긴 센 모양이다.
“아쉬운 점이요? 어떤 게요?”
난 한 단어로 말해주었다.
“CG입니다.”
그러자 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한국의 CG 제작 환경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할리우드의 경우 CG 비용이 전체 예산에서 적으면 30퍼센트, 많으면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10퍼센트가 채 안 됩니다.”
여기에는 CG 작업이 제작과정의 후반이라는 이유도 있다.
제작비는 뒤로 갈수록 부족해지기 마련. 이미 쓴 돈은 어쩔 수 없으니, 마지막에 지출하는 CG 비용을 깎는 수밖에.
탁동식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CG에 쓸 돈이 없어서 못 넣거나 삭제한 장면이 한둘이 아닙니다. 소설이나 만화는 얼마든지 작가가 원하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상은 아무리 넣고 싶은 장면이 있어도 예산과 시간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죠.”
실제로 비용과 시간의 제약으로 제작 도중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감독에게 작품은 자식과도 같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 완벽하게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지 않을 감독이 어디 있을까? 아마 ‘방과 후 생존활동’의 허접한 CG를 보며 그가 가장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혹시 이번에 프리즈너가 공개한 CG 프로그램 로키를 보셨나요?”
내 말에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굉장하더군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CG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요즘 만나는 제작자들마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비해 제작비도 저렴하고 제작 기간도 훨씬 짧다고.”
“맞습니다. 프리즈너 산하의 알카트라즈는 현재 한국에 스튜디오 설립을 진행 중입니다.”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어째서 한국에……?”
그의 말대로 한국은 제작비도 싸고 CG에 쓰는 비용이 형편없이 적다. 따라서 CG 업체 입장에서는 그다지 수익이 나는 시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에 바로 스튜디오를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
“한국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기 위함이죠.”
그의 후속작인 ‘세븐 라운드’는 배틀로얄 장르.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메인인 만큼, CG가 엄청나게 들어간다.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CG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제작비와 시간이 절감되겠죠. 그리고 그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사용될 수 있을 테구요.”
탁동식 감독은 눈을 빛냈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에서 넣고 싶은 CG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그럼 알카트라즈에 바로 CG 제작을 맡길 수도 있습니까?”
“예. 인력 문제로 인해 당분간은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은 작품의 CG 제작만 맡겠지만요.”
“…….”
난 그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저희랑 계약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