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요코하마 일렉트론 (14)
컨티뉴 캐피탈은 최근 3년 사이 가장 큰 수익을 낸 사모펀드다.
수익률로 비교하면 화이트로드나 소프트박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특히 인수합병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본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컨티뉴 캐피탈이 인수에 나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에서는 개인 투자자들뿐 아니라 기관들까지도 달려들어서 매수했다.
“컨티뉴 캐피탈이 비싼 가격에 인수하려는 걸 보면, 지금 주가는 싼 거 아니야?”
“유성전자와 함께 인수하는 거니, 인수 후에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려는 게 분명해.”
“지금 아니면 못 살지도 몰라.”
덕분에 요코하마 일렉트론 주가는 치솟았다.
그러나 산케이 신문이 컨티뉴 캐피탈과 유성전자를 사마라 회장의 탈출 배후로 지목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론을 의식한 정치권이 컨티뉴 캐피탈의 입찰을 제한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루퍼트 리우의 쿠데타로 인해 인수 협상은 중단됐고, 껍데기만 남은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떠안지 않기 위해 엔플 연합은 일본과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로 인한 여파는 일본 증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주가는 속절없이 폭락했고, 인수 계약금을 날릴 상황이 되며 키오노스 역시 동반 폭락했다.
직전에 팔고 나간 CYP컨소시엄은 이익을 봤지만, 그 외에는 모두가 손해를 봤다.
일본 반도체 산업 전체가 피해를 입었는데, 컨티뉴 캐피탈과 유성전자는 한몫 챙긴 것이다!
이에 일본 투자자들은 분노했다.
“이놈들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다!”
“자기들이 인수를 못 할 것 같으니, 쿠데타를 벌이게 한 건가?”
“대체 이놈들은 일본에 얼마만큼의 손해를 끼쳐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이런 개자식들이!”
“당장 체포해야 한다!”
“대체 일본 정부는 뭐하고 있는 거냐?”
엄밀히 따지면 요코하마 일렉트론 차이나 사태는 컨티뉴 캐피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입찰 제한을 당한 것 자체가 쇼가 아니었을까?”
“맞아! 덕분에 자연스럽게 주식을 팔고 나갈 수 있었잖아.”
“정치인들이 컨티뉴 캐피탈에 뒷돈 받아먹고 해준 거 아니야?”
“어떤 놈이야?”
“당장 징계해야 한다!”
“반드시 다음 선거 때 낙선시킨다!”
이전까지만 해도 몇몇 정치인들은 일본에 해를 끼친 기업이 함부로 일본 기업을 인수하지 못하게 막았다며, CYP컨소시엄의 입찰 제한을 자신들의 공인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런데 상황이 뒤바뀌자, 다들 자신들은 관련이 없다며 발뺌하기에 바빴다.
* * *
요코하마 일렉트론 인수전이 끝난 뒤.
난 송 가즈키 회장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군요.]
내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난 며칠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큰 투자 한 번 하고 나면, 그 반동 때문인지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사실 투자라는 게 큰돈 다루는 일인 만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기도 하고.
특히나 이번 일은 루퍼트 리우의 쿠데타를 제외하면, 1회차 때 없었던 사건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계획한 대로 잘 끝나서 다행이다.
10시 넘어서 일어나니, 선우가 아직 집에 있었다.
“뭐야? 아직도 출근 안 했어?”
“뭔 소리야? 지금 퇴근했는데.”
“아…….”
회사에서 밤샌 모양이다.
“뭐 하느라?”
선우는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일하느라. 그때 말한 블록밸리 게임 완성했어.”
“진짜? 어때?”
선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끝내주지. 딱 브랜드 정체성에 맞는 스타일로 공간을 꾸며놓고, 게임도 재밌게 만들어놨어. 내가 해봐도 재밌더라.”
어지간히 자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얘가 평소에는 실없어 보여도 게임에는 항상 진심이다.
“그나저나 뉴스 보니까 앞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끝났다고 난리던데.”
키오노스에 이어 요코하마 일렉트론까지 터졌으니, 그야말로 줄초상을 치른 셈이다. 앞으로 영원히 재기는 힘들겠지.
“너 때문에 엔플 주가도 떨어졌다고 하고.”
“에이, 얼마나 떨어졌다고.”
반면 엔플과 PSMC 역시 하락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3~5퍼센트 정도로 큰 타격은 없었다. 손해 본 금액이라고 해봐야 엔플과 PSMC의 보유 현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쪽팔린 건 어쩔 수 없겠지.
“그리고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그럼 누구 때문인데?”
“…….”
판단을 잘못한 탐 키튼 CEO 때문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호인처럼 보이지만, 그는 절대 엔플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가만히 놔둘 사람이 아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인정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의 자비에 기대기보다는, 차라리 건드리면 처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훨씬 낫다.
“앞으로 엔플과 계속 맞서 싸우려고?”
“필요하다면.”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벌었지만, 아직 엔플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몇 년만 더 지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쯤 되면 전세계에 데이터센터를 두고 클라우드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테니까.
선우는 피곤한지 소파에 드러누우며 물었다.
“오늘도 집에 있을 거야?”
“아니, 약속이 있어서 이제 나가려고.”
“누구랑?”
“전 직장동료.”
* * *
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인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건물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는 게 왠지 신기하다.
도착한 곳은 부대찌개집 앞.
1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으니,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다.
안쪽 테이블에 있던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미루 씨.”
난 의자를 헤치고 힘들게 자리로 향했다.
“언제 왔어요?”
“5분 전에요. 조금만 늦게 왔으면 우리도 줄 설 뻔했어요.”
“사람 엄청 많네요.”
“요즘은 점심시간마다 이래요.”
참고로 여기는 동호 선배가 알려준 맛집이다. 그리고 전에 그녀와 함께 왔던 곳이기도 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 인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윤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 오랜만이죠?”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예전에 여기서 엄청 먹었는데.”
“몇 번이나 먹었다구요? 여기 미루 씨 퇴사하기 얼마 전에 생겼잖아요.”
“뭐…….”
1회차 때는 무지하게 먹었다. 왜냐하면 동호 선배가 무지하게 좋아했기 때문.
부대찌개의 장점은 금방 조리가 된다는 것. 인원수에 맞춰 미리 재료를 담아놓고 육수를 부은 다음 불만 켜면 된다.
괜히 직장인 점심 메뉴 베스트 5위 안에 드는 게 아니다.
역시나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금방 끓기 시작했다.
“어서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날씨가 좋아서 우리는 커피를 하나 들고 근처 공원에 앉았다.
그녀는 살짝 놀란 듯 말했다.
“미루 씨 그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봤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잘 먹을 줄은 몰랐어요.”
며칠 동안 입맛도 없고 귀찮아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한번 먹기 시작하니 쭉쭉 들어가서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추억의 맛이라서 그런가?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좋겠네요. 이번 투자도 400억 달러 정도 벌었다고 하던데.”
“뭐, 저 혼자 먹은 것도 아닌데요.”
컨소시엄이 괜히 컨소시엄이겠는가?
같이 투자한 만큼 수익은 비율대로 나눠 갖는다. 유성전자와 PIF 모두 내 덕에 각자 한몫씩 챙겼다.
내 말을 잘 들으면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긴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니 손에 커피를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떠들었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지.
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요?”
“예전 일이 생각나서요. 저도 참 오랫동안 여기서 일했는데.”
만약 회귀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저기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겠지.
그런데 이제는 여의도보다 월스트리트가 더 익숙하다.
“몇 개월밖에 일 안 했잖아요.”
“뭐…….”
회귀하기 전에는 그래도 3년은 일했다.
회귀하며 없던 일이 되었지만, 나에게는 추억이다.
“슬슬 가볼까요?”
우리는 점심을 먹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회사 건물로 향했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서있는 건물 맨 위에는 ‘DA증권’이라는 사명이 적혀 있었다. 왠지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여기에 뼈를 묻을 줄 알았는데.”
성윤아는 농담처럼 말했다.
“지금이라도 가능해요. 다시 돌아온다면, 제가 환영해줄게요.”
“혹시 컨티뉴 캐피탈 그만두게 되면 생각해볼게요.”
같이 회사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어! 미루 씨 아니에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약간 키 작고 통통한 체격의 남성의 이름은 황영민. 그리고 그 옆에 안경을 끼고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배근석.
다름 아닌 내 입사 동기들이다.
난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오랜만에 입사 동기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신입사원 연수회에서 봤을 때만 해도 다들 어리바리했던 것 같은데, 그새 얼마나 지났다고 어엿한 금융인이 다 됐다.
하기야 지금쯤이면 딱 일에 적응할 때지.
“그동안 잘 지냈어요?”
“저희야 열심히 회사 생활하고 있죠. 미루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배근석이 물었다.
“이동호 대리님이 지금 컨티뉴 캐피탈 한국 대표라는 게 사실인가요?”
그새 소문이 퍼졌어?
하기야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와아! 그럼 미루 씨도 같이 일하는 거예요?”
“네. 같이 일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컨티뉴 캐피탈이라니.”
“한국지사는 엔터와 패션 쪽에 투자하고 있다고 하던데.”
성윤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흐음, 두 분 다 컨티뉴 캐피탈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요.”
입사 동기…… 아니, 차기 회장 딸의 질문에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전 DA증권이 좋습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둘 다 회사 생활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의 사장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호중 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지난번 공매도 전산화 시스템 구축 때문에 본 뒤로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옆에는 성윤아의 어머니…… 그러니까 양자은 전무도 있었다.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전무님.”
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 좀 수척해진 것 같은 모습이다. 하기야 그룹 일에, 간병에,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겠지.
우리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제안을 하나 드릴 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안호중 사장과 양자은 전무 모두 기대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DA증권은 지난번 공매도 시스템 구축 덕분에 큰 재미를 봤다.
처음 참여한 증권사는 DA증권, 유성증권 화안증권 세 곳뿐이었지만, GL엔텍 사태를 거치며 투자자들이 크게 호응했고, 현재는 거의 모든 증권사가 참여했다.
성윤아가 말했다.
“핀테크에 대한 제안이라고 했죠?”
“예.”
핀테크(FinTech)란 금융(Finance)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
금융 서비스 자체는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지만,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결제, 송금, 자산관리, 투자 등이 전부 포함된다.
난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스테이블 코인 페니를 기반으로 한 간편결제 서비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