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일상2 (1)
식사를 끝마친 후.
우리는 근처의 24시간 카페로 자리를 옮겨 계속 얘기를 나눴다.
“정말요? 에밀리 클로에를 만났다구요?”
“알고 있어요?”
“그럼요. 그 기사 봤어요. 가짜 상속녀 스캔들. 설마 미루 씨가 그 여자를 만났을 줄이야.”
“저한테 말도 걸던데요. 자기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며.”
에밀리 클로에의 사기 행각이 한국까지 알려진 이유는 트리시 덕분.
트리시는 십여 차례 구치소로 찾아가 에밀리 클로에를 면회하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취재한 끝에 여러 편에 걸쳐 칼럼을 썼다.
결과는 역대급 대박.
WST 기사 중 최대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제작사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겠다고 판권을 사갔다.
난 마이크 골든버그를 만난 얘기도 해주었다.
“아! 전용기도 하나 샀어요.”
“정말요? 어때요?”
“좋아요. 세나 한번 태워주니 자기도 사달라고 하던데요.”
“풉! 동생이 그런 농담을 했어요?”
“과연 농담이었을까요?”
내 동생이라면 진담으로 말하고도 남을 애다.
“사진 있어요?”
내가 사진을 보여주자, 성윤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이런 얘기 들으면 미루 씨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아요.”
“제가요? 윤아 씨야말로 재벌이잖아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미루 씨에 비하면 재벌이 대수예요?”
난 화제를 돌렸다.
“DA증권은 요즘 어때요?”
“GL엔텍 사태 이후 계속 성장 중이에요, 그룹에서도 엄청 밀어주고 있고.”
“다행이네요.”
“잘나가긴 해도 어디까지나 중소 증권사 중에서죠. 브로커리지 수익이야 거래액이 큰 대형 증권사들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보다 더 성장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직원이 할 만한 고민은 아니다.
그러나 차기 회장 딸이라면 해야 할 고민이겠지.
“핀테크 쪽에 투자해보는 건 어때요?”
내 말에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핀테크요?”
“예. IT기업들이 지금 금융 쪽으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요. 그러니 금융도 IT로 뻗어나가야죠.”
사실 이건 모든 금융사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전까지는 금융사들끼리의 경쟁이었다면, 이제는 여기에 거대 IT기업과 스타트업들까지 뛰어들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시장을 빼앗길 수도 있을 것이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줄래요?”
“안 그래도 좋은 제안이 하나 있긴 한데.”
“정말요?”
“다음에 어머니랑 함께 있을 때 말해줄게요. 양자은 전무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잘 지내긴 하는데, 요즘 엄청 바빠요. 저도 얼굴 보기 힘들 정도예요.”
“그래요?”
“예. 할아버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입원하셨거든요. 그래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병원에 들르세요.”
“아…….”
양현성 회장은 뇌종양을 앓고 있다.
계속 치료를 받았겠지만, 이제 슬슬 한계일 것이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그제야 시계를 본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커피 한 잔 마시고 일어나려 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 * *
푹 자고 일어나니, 해가 중천이다.
거실에는 선우가 있었다.
“일어났냐?”
난 잠시 선우를 쳐다보았다.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않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오랜만이긴 하지.”
“점심은 먹었어?”
“아직. 뭐 먹을래? 한정치킨?”
“뭔 일어나자마자 치킨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을 들으니 갑자기 땡긴다.
외국에 오래 있다 보면, 한식만큼이나 K-치킨이 그리워지기 마련.
“시켜.”
“뭐로? 반반?”
“반반은 무슨. 그냥 두 마리 시켜. 양념 하나, 후라이드 하나.”
나 정도 벌었으면 1인 1닭 해도 된다.
우리는 마주 앉아 치킨을 먹었다.
이러고 있으니 함께 치킨 가게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도 나름 재밌었는데. 장사도 잘됐고.
난 선우에게 물었다.
“일은 어때?”
“열심히 하고 있지. 블록 밸리 게임도 제작 시작했어. 게임으로 브랜드 홍보라……. 아이디어 괜찮은 것 같아.”
“그렇지?”
“이번 일 덕분에 나이트라이트와 블록 밸리 인지도가 엄청 치솟았어. 탐 스콧은 게임 업계의 영웅이 됐고. 아마 지금 만나자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을걸.”
“너도 한번 만나야지.”
“내가?”
“응. 앞으로 만들 게임은 써릴 엔진5를 사용할 테니.”
“레전드게임즈가 어디 있지? 컬럼비아인가?”
“맞아. 직접 가도 되고, 한국 한번 오라고 해도 되고. 탐 스콧 CEO도 너 만나보고 싶어 하더라.”
“진짜?”
“응. 친구가 천재 게임 개발자라고 하니 엄청 관심을 보이던데.”
“뭐라고? 아니, 그렇게 소개하면 어떡해?”
난 못 들은 척하며 물었다.
“나 없는 동안 한국에서는 뭐 재밌는 일 없었어?”
“흠 재밌는 일이라. 아! 지금 대선 시즌인 건 알지?”
“뭐? 아직도 안 끝났어?”
“아직 투표 전이긴 한데, 거의 끝난 분위기긴 하지.”
오영환 대통령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새한국당 서준홍 후보와 우리국민당 남궁석 후보의 대결.
안타깝게도 오영환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고, 정권 교체 여론이 여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어대남(어차피 대통령은 남궁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남궁석 의원이 기세가 확고하다.
그래서인지 재벌그룹들도 이미 그쪽에 줄을 대는 모양이다.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야?”
“응. 쉬면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지.”
미국에서 일은 데이비드가, 한국에서의 일은 동호 선배가 알아서 하는 만큼, 내가 쉬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어차피 내가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기도 하고.
* * *
난 집에서 푹 쉬다가 저녁때 청담동의 라운지바로 향했다.
“여! 브로!”
안으로 들어서자 3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이름은 허민웅.
화안에너지 부사장이다.
“이게 얼마 만이야?”
“오랜만이긴 하네요.”
난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받아요.”
“응? 이게 뭐야?”
“선물이요.”
“응? 선물?”
캘리포니아는 신대륙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쉬는 동안 와이너리를 구경 간 김에 주위에 선물해주기 위해 몇 병 샀다.
“와인 한 병 샀어요.”
허민웅은 엄청나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뭐, 이런 걸 다.”
“그렇게 비싼 거 아니에요. 100달러도 안 했던 것 같은데.”
“가격이 뭐가 중요해? 형을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중요한 거지.”
“와이너리 간 김에 사온 거예요.”
“뭐? 내 선물 사러 와이너리까지 갔다고?”
“아니, 그냥 놀러 간 건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외모와는 달리 이런 사소한 것에 감동하는 성격이었을 줄이야.
어쨌거나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요즘 적대적인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일단 한잔하자.”
허민웅은 얼음이 담긴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엄청 바쁘게 살았지. 뭔 할 일이 뭐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 정치인들, 기업인들 만나다 보면 아주 그냥 하루가 순삭이야.”
놀려면 얼마든지 놀 수 있지만, 일하려고 마음먹으면 가장 바쁜 사람이 CEO다. 일이야 임직원들이 한다지만, 그 일을 되게 만드는 게 CEO의 역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너만 하겠어? 이번에 미국에서 아주 제대로 일 벌였던데. 대체 얼마를 번 거야?”
“뭐,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죠.”
내가 무슨 에런 화이트 같은 천재 투자자도 아니고, 다 회귀빨(?)로 버티는 거다. 회귀빨 다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빨아먹고 깔끔하게 은퇴할 생각이다.
“휴가도 다녀왔다며? 다음에는 형도 좀 데려가.”
“어디 가고 싶은데요?”
“스페인 이비사 어때? 거기 클럽 좋다던데.”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휴양지를 갈 게 아니라 거기를 갔어야 했는데!
“병진공업은 어때요?”
“내가 최선을 다해 챙기고 있어. 이제 화안에너지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 할 수 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여기 오기 전 박용진 부사장에게 대충 전해 들었다.
사업이 순조롭게 성장하며, 이제는 병진공업에 납품하는 벤더들도 여럿 생겼다.
이 정도면 이제 중견기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화안에너지의 매출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산업 자체가 성장하고 있으니 거래처를 점차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아버님 모시고 라운딩도 한번 다녀왔는데, 실력이 많이 느셨어.”
나보다 우리 아버지를 더 잘 챙기는 것 같아서 든든하다.
어차피 일이야 대기업 전무 출신인 박용진 부사장이 열심히 할 테니, 아버지는 유유자적하게 골프 치고 다니시면 되겠지.
“요즘 화안에너지 엄청 잘나가던데요.”
“컨티뉴 캐피탈만큼은 아니지. 이번에 엔플과 구블도 박살냈더만.”
“박살은 무슨.”
기껏해야 기스(?) 정도 낸 걸 가지고.
“지금 수소트럭이 장난 아니긴 해.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친환경차로의 전환은 세계적 흐름이다.
승용차 시장에서는 티슬라를 비롯해 여러 업체들이 경쟁 중인 반면, 상용차 시장은 사실상 무주공산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넥스트로젠이 먼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넥스트로젠은 수소트럭 플랫폼 HY07의 양산을 시작했고, GM과 포드는 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수소트럭을 만들어 출시했다.
친환경인 것은 물론이고, 경제성도 더 뛰어난 만큼, 물류업체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대연차도 서둘러 수소트럭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하던데.”
원래 수소차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회사는 바로 한국의 대연차.
세계 최초로 수소트럭을 양산했고 수출까지 했다. 그러나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생산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넥스트로젠 덕분에 다시 불이 붙었다.
토요타와 다임러, 볼보 등은 부랴부랴 수소트럭 개발과 출시를 서둘렀다.
친환경차 하면 빠질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중국.
전기차 생산량과 판매량 모두 중국이 세계 1등이다.
중국 정부는 수소 굴기를 선언했고, 업체들은 각자 수소 로드맵을 발표했다.
아마 내년쯤이면 다양한 브랜드의 수소트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이란 좋은 거죠.”
경쟁자의 등장은 시장을 더욱 빠르게 성장시킬 테니까.
수소트럭은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필요한 건 바로 충전소.
다행히 전기차 충전소처럼 도시 곳곳에 설치하지는 않아도 되고, 화물트럭의 출발지와 종착지, 그리고 중요 거점에 설치하면 된다.
전기만 끌어오면 되는 전기충전소와는 달리, 수소충전소 설치를 위해서는 수소의 생산, 수송, 관리가 필요하다.
일정한 규모와 기술력이 없으면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업은 전세계에 몇 곳 안 된다.
한국에서는 화안에너지가 유일하고.
사실 화안에너지에 남들은 없는 압도적인 기술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다른 업체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발 빠르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사업을 시작했고, 유럽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지는 중이다.
덕분에 화안에너지 주가는 꾸준히 상승 중.
원래 화안에너지 주가는 화안솔루션에 비하면 7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런데 토머스 사태 때 이 시총이 뒤집혔고, 현재는 세 배 넘게 벌어졌다.
이제는 화안그룹 전체에서 가장 덩치 큰 계열사가 됐다.
이게 다 내 덕분이다.
“지금 투자에 들어가는 돈이 장난이 아니야.”
“회사채 발행해요.”
단순히 충전소 몇 개 짓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인프라를 건설해야 하는 만큼 초기에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다.
이는 반대로 후발주자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테니, 선두업체는 강한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러다가 망하면?”
“안 망할 테니 걱정 마요.”
허민웅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네.”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매우 안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