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수수료 전쟁 (12)
탐 키튼은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청년이지만, 그는 컨티뉴 캐피탈의 공동 CEO.
데이비드 록허트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 그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탐 키튼은 이번 일을 겪으며 한미루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는 최근 시장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랜섬웨어 사태 때는 직접 본사로 찾아갔고, 사마라 회장 탈출 직전에 일본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한정그룹, LD스튜디오, GL엔텍, 페이스노트, 페더 등등.
‘그리고 이번 소송전까지.’
엔플은 거대 제국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 제국을 흔들었다.
당장의 주가 하락은 별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문제가 되는 건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이번 일로 인해 엔플이 추진하던 구독 서비스 강화와 핀테크 모두 차질을 빚게 생겼다.
리뉴얼까지 해서 출시한 바자르는 사실상 폐기 수순이고.
NP세미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순간, 뭔가 하나씩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한미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 투자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스노우 크래시 인수.
이번 소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레전드게임즈가 아니다.
바로 스노우 크래시다.
‘설마 클라우드 게이밍으로 엔스토어를 우회할 줄이야.’
클라우드 게이밍이라는 개념 자체는 딱히 신기할 게 없다. 중요한 건 그걸 이질감 없이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노우 크래시의 클라우드 기술이 어느 기업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스노우 크래시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컨티뉴 캐피탈의 강한 지원이 있었다.
온갖 투자로 돈을 벌어 스노우 크래시에 자금을 지원하고, 고객들을 연결해주었다. 그럼에도 루카스 CEO의 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터치하지 않았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AMZ는 강한 견제에 나섰으나, 어째서인지 한발 물러서며 오히려 보안 분야에서 협력을 발표했다.
‘뭔가 수를 썼겠지.’
소문에 따르면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의 랜섬웨어 감염 경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ZWS 클라우드 보안의 결함을 알아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루카스 CEO의 능력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스노우 크래시가 엔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팀 키튼의 성격은 인자함이나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냉철한 기업가였고, 위협이 될 만한 기업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제거하거나 아예 통째로 인수했다.
그런데 스노우 크래시는 비상장 기업이라, 팔지 않는 한 인수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기업의 핵심적인 인재는 시드 루카스.
설사 직원들을 전부 빼온다고 한들, 그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그런데 시드 루카스는 지분 30퍼센트를 가진 2대 주주이자 CEO다.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스노우 크래시를 버리고 엔플로 올 리 없다.
탐 키튼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저희는 스노우 크래시 지분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한미루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수요?”
“예. 일부라도 좋습니다. 스노우 크래시는 엔플과 좋은 파트너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돈을 원한다면 돈으로, 엔플의 주식을 원한다면 주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엔플은 2000억 달러의 현금과 막대한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누가 이 제안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미루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스노우 크래시의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금액도 들어보지 않고 말입니까?”
“예. 어차피 제가 생각하는 금액이면 주주들이 결코 동의할 리 없을 테니까요.”
탐 키튼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한 대표님에 대해 평소 궁금했는데,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탐 키튼은 한미루와 악수를 하며 생각했다.
‘만나러 오기를 잘했군.’
덕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엔플의 적이라는 것을.
* * *
난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얼마 만에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다.
부모님 뵌 지도 오래됐고.
세나의 보고(?)에 따르면 아버지 사업은 잘되는 것 같고, 어머니도 잘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소진이의 보고(?)에 따르면 세나는 여전히 공부는 안 하지만 그래도 학교는 잘 다니는 모양이다.
뭐, 출석만 잘하면 졸업장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먼저 미국 빅테크 5위 기업인 페이스노트가 알고리즘 편향과 개인정보 문제로 인해 30퍼센트 넘게 폭락했다.
보통 단기간에 이 정도 폭락하면, 금세 회복되기 마련.
그런데 페이스노트 주가는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알고리즘과 개인정보는 페이스노트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
광고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 힘들겠지.
그리고 암호화폐 시총 3위인 스테이블 코인 페더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며 해당 코인은 휴짓조각이 됐고, 세계 최대 거래소 코인맥스는 파산했다.
그리고 CEO인 레너드 창은 행방이 묘연했다. 싱가포르에 있다, 스위스에 있다 소문만 무성하다.
그가 아직까지 체포되지 않은 이유는 영장이 안 나왔기 때문.
놀랍게도 그는 법에 저촉될 만한 일을 한 게 없다. 왜냐하면 아예 관련법이 없었으니까.
때문에 SEC에서도 출석요구서만 보냈을 뿐이다. 그마저도 잠적해 받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한때 비공식 세계 최고 부자였다. 회사야 파산했어도 개인 자산이 많을 테니, 어디를 가도 잘 먹고 잘살겠지.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는 힘들겠지만.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엔플과 구블과의 소송전까지.
전용기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난 눈을 감았다.
* * *
열 시간 넘는 비행 끝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퍼스트 클래스나 전용기의 가장 큰 장점은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쉴 수 있다는 것.
비싼 돈 내고 비싼 티켓 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공항에는 경호원과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유성전자 계열사인 에이원과 계약을 맺고 건물 보안과 경호를 위탁 중이다.
난 뒷좌석에 올라탔다.
“컨티뉴 캐피탈로 가주세요.”
원래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는 이면도로 빌딩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간 사이 유성타운으로 이전했다. 이전한 사무실에 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 건물에는 컨티뉴 캐피탈은 물론, SW게임즈, 그리고 엔터사와 패션회사도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손뼉을 치며 나를 환영했다. 목에 화환이라도 걸어줄 것 같은 분위기다.
동호 선배는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서 와. 나 돌아가고 나서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소송 때문에 남아있었던 거야?”
“그런 셈이죠.”
김범석은 나에게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지냈죠? 노래 잘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김범석은 그사이 신곡을 두 곡 더 발표해 차트 1위를 찍었고, 다른 가수들에게 준 곡들도 줄줄이 대박이 터졌다.
덕분에 저작권 수입도 짭짤하게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덩치 큰 흑인을 보았다.
“한국은 어때요? 지낼 만해요?”
에드워드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좋습니다. 틈틈이 한국어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재원으로 온 거라 앞으로 3년 정도는 한국에 있을 예정. 그전에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가도 된다고 얘기는 해뒀다.
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네요.”
“니 집무실은 따로 마련해뒀어.”
이 정도면 미국 본사보다도 낫다.
어째서 기업들이 돈 좀 벌었다 싶으면 사옥부터 짓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저녁은 어떻게 할 거야? 돌아왔는데 회식 한번 해야지.”
“다음에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 * *
난 1층 로비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엄청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긴요. 휴가도 못 가고 일만 했어요.”
그녀의 이름은 성윤아.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예쁜 모습이다.
난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성타운은 네 개 동으로 이뤄져있고, 중앙에는 산책로가 나있었다.
우리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방금 나온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건물 예쁜데요.”
“안 그래도 잘 샀다고 생각 중이에요.”
“예전에 미루 씨랑 함께 왔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설마 그 옆 동을 살줄이야.”
“그때 윤아 씨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못 샀을걸요.”
“정말요? 에이, 그래도 미루 씨라면 어떻게든 샀을 것 같은데.”
뭐, 그렇긴 해도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
만약 그때 동우정밀 BW를 팔지 못했다면 스노우 크래시 인수도 못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에게 정말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휴가는 어땠어요?”
“바베이도스요? 엄청 좋던데요. 제가 거기서 누구를 만났는지 아세요?”
“누구요?”
“다리안 헤럴슨이요.”
내 말에 성윤아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정말요? 저 그 배우 좋아하는데.”
난 유성타운을 한 바퀴 돌며, 미국에서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주었다.
감탄하던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루 씨 때문에 대체 얼마가 날아간 거예요?”
“예?”
“페이스노트 3000억 달러, 엔플 2000억 달러, 구블 1500억 달러, 여기에 암호화폐 하락까지 합치면…… 1조 달러도 넘겠는데요.”
“아니,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인데요?
“뭐…….”
굳이 변명을 하자면,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벌어질 일들이었다.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걸었더니 배고프네요. 저녁 먹으러 가요.”
“뭐 먹을까요?”
“한식 먹죠.”
원래 음식은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 오래 있었더니, 왠지 한식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윤아는 반색했다.
“아! 한정식이요?”
“아니요. 뜨끈한 국밥 생각했는데.”
“고작 국밥으로 되겠어요?”
“고작이라니요?”
국밥이 어때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면, 5성급 호텔 디너 뷔페도 안 부럽다. 전세계를 뒤져봐도 국밥만큼 가성비 좋은 음식은 없지 않을까?
“거기 국밥도 있을 테니, 그냥 한정식 가요. 제가 살게요.”
“그러죠.”
메뉴는 사는 사람 뜻에 따라야지.
난 성윤아와 함께 차를 타고 서울역 근처에 위치한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여기가 한식으로는 최초로 미슐랭 3스타 맛집이에요.”
“그래요?”
“6개월 치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예약도 힘들어요.”
다행히 예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급 레스토랑의 경우 VIP들을 위해 한두 자리를 따로 빼놓기 때문.
우리는 입구에서 발렛파킹을 맡기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한옥과 양옥을 적절하게 섞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다. 얘기를 들어보니 적산가옥이라고 한다.
예약을 하며 미리 주문한 덕분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너비아니, 불고기, 제육볶음, 된장찌개 등이 올라왔다.
“제가 사는 거니 많이 먹어요.”
“잘 먹을게요.”
난 사양하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한식인지 모르겠다.
깻잎장아찌를 먹으려고 하는데 안 떼어졌다. 그러자 성윤아가 젓가락으로 아래 깻잎을 지그시 눌러줬다.
“아, 고마워요.”
난 깻잎장아찌를 먹던 도중 멈칫했다.
“어…….”
잠깐만.
내가 갑자기 젓가락을 멈추자, 성윤아는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이유는 갑자기 세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
깻잎 잡아주면 좋아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