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수수료 전쟁 (11)
비록 수수료가 20퍼센트가량 내려가고 외부 결제도 허용됐지만, 엔플과의 소송은 계속 진행됐다.
어쨌거나 시작한 이상 결과는 받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탐 스콧 CEO는 유성전자 구동진 사장과 몇 시간가량 통화한 다음 나에게 말했다.
“바로 레전드덱 개발에 착수하겠습니다.”
레전드덱은 클라우드 게이밍을 위한 데이터 통신도 염두에 둔 만큼, 게임기와 스마트폰 그 사이의 형태이고, 레전드게임즈와 유성전자 IM부문이랑 협력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게임기 시장은 독점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는 게임을 하기 위해 콘솔을 여러 대 구매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도 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 성능 좋은 콘솔을 개발해 더 싼 가격에 보급하려 하고, 각자 독점작 유치를 위해 게임사를 인수하거나 개발 중인 게임에 개발비를 지원하는 등 노력하면서 업계 전체에 경쟁과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니까.
하지만 레전드덱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운영체제는 리눅스 기반.
파티션을 나눠 NS의 엔도어즈 등 다른 운영체제를 설치할 수 있고, 스트림이나 게임퍼스트 등 다른 ESD도 깔 수 있게 만들 생각이다.
이렇게 해야 판매량을 최대한 늘려 가격을 낮출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는 게임사나 유저나 수수료가 싸고 기능이 좋은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를 찾게 될 거라는 자신감도 자리 잡고 있다.
탐 스콧 CEO는 이제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돌아갈 예정.
우리는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소송하느라 수고했어요.”
“뭘요. 대표님께서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탐 스콧 CEO가 먼저 떠나고, 나 역시 떠날 준비를 했다.
“대표님께서도 가시는군요.”
“예. 가야죠.”
원래는 블록 밸리 런칭만 보고 가려 했는데, 소송으로 인해 몇 개월을 이곳에 있었다. 덕분에 산타모니카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름다운 해변을 눈앞에 두고도 못 들어가본 게 좀 아쉽다.
난 떠나기 직전 놀라운 얘기를 하나 전해 들었다.
“약혼이요?”
켄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평생 게임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이 녀석이 약혼을 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찰스는 멋쩍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난 기가 막혔다.
“아니, 대체 뭘 어쨌기에…….”
얘기인즉슨 찰스 그리핀이 피오나 해리슨 변호사와 약혼을 한다는 것.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눴고, 서로 마음이 맞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뭐, 젊은 남녀가 함께 있다 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신기한 건 한쪽은 게임 업데이트하느라, 다른 한쪽은 변론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대체 언제 연애를 했냐는 것.
사람이 바빠도 할 건 다 하는 건가?
켄이 옆에서 설명해주었다.
“예전에 스타게이트에서 일했을 때 이 친구가 좋아하는 여직원이 있었어요. 몇 개월 동안 끙끙 앓으면서도 고백을 못 하다가 결국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것까지 지켜봤는데, 이번에는 바로 사귀자고 말하는 걸 보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찰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반했습니다. 평소였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넘어갔겠지만, 대표님의 말씀을 떠올린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예?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계란에 마음을 담으면 바위도 깨트릴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아니, ‘계란에 사상을 주입하라’고 했지, 언제 ‘계란에 마음을 담으라’고 했어?
아주 그냥 각자 좋을 대로 번역해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약혼은 너무 빠르지 않나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긴 한데, 이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상대는 미모의 변호사.
게다가 아버지는 아처&해리슨이라는 거대 로펌의 대표다.
하지만 찰스 역시 조금도 꿀릴 건 없다. 블록 밸리가 대박이 난 덕분에 그는 성공한 게임 개발자이자 수억 달러의 자산가가 됐으니까.
찰스는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예? 제 표정이 어때서요?”
“몸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아, 예. 점심 먹은 게 좀 얹혔나 보네요.”
방금 이 말을 듣는 순간 실제로 얹힌 것 같다.
내가 엔플과 구블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누구는 한가롭게 연애나 하고 있었다니!
이래도 되는 거냐?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부 대표님 덕분입니다.”
당연히 전부 내 덕분이다.
소송을 벌인 것도, 해리슨 변호사를 대표 변호사로 지목한 것도 나니까.
그러고 보니…….
원래 블록 밸리는 이 소송과는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엔플과 구블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니 찰스는 해리슨 변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1회차 때 그가 누구랑 결혼했는지까지는 잘 모르지만, 이번에는 나로 인해 결혼 상대까지 바뀌게 된 건가?
본의 아니게 연애와 결혼까지 책임져준 셈이다.
* * *
몇 개월 동안 머문 호텔을 떠나려고 하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난 매일같이 얼굴을 본 직원과 지배인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노년의 지배인은 농담처럼 말했다.
“이 호텔에서 완전히 사시는 줄 알았는데, 떠난다니 서운하네요.”
“좀 있으면 성수기잖아요. 저 같은 공짜 손님이 얼른 떠나야, 돈 되는 손님이 들어오지 않겠어요?”
“무슨 말씀을. 머무시는 만큼 본사에서 지원금이 나오니, 언제든 환영입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 일찍 출발하기 위해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호텔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50대 후반의 백인 남성.
마른 체격에 180센티 정도의 키, 머리는 새하얗고 검은색 테의 안경을 썼다. 외모는 인자한 동네 아저씨 같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설마 진짜로 찾아올 줄이야!
그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탐 키튼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엔플의 CEO.
난 그의 손을 가볍게 붙잡고 악수를 했다.
“한미루입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다음 마주 보고 앉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야 어차피 일정 금액 이상 번 뒤로는 크게 감흥이 없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얘기가 다르다.
살면서 엔플 CEO를 만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도 언팩 구경하러 방청객으로 간 것도 아니고 이렇게 1대1로 말이다.
문득 페이스노트 CEO 마이크 골든버그가 떠올랐다.
그가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인 청년이었다면, 눈앞의 남자는 서글서글한 인상에서 깊은 관록과 지혜가 엿보였다.
세계 최대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아마 미국에서 중요한 인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난 그저 운 좋게 회귀해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회차 때처럼 평범한 증권맨으로 살았겠지.
그러나 그는 다르다.
탐 키튼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엔플의 CEO가 됐기 때문.
하지만 그는 10년도 더 전부터 엔플의 공급망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가 엔플에 입사한 시기는 스티비 쉴러가 엔플에 복귀한 시기와 맞물린다.
스티비 쉴러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선 장수라면, 그는 보급을 책임지는 행정가였다.
전자는 잘 드러나는 반면, 후자는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
여기서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엔플은 직접 운영하는 공장이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도 설계만 하고 생산은 대만의 PSMC에 맡기고, 전체 매출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엔폰 역시 전세계 공급망에서 부품을 받아 중국 공장에 생산을 맡긴다.
생산을 아웃소싱하는 기업들은 많다.
하지만 한 해 수억 대의 기기를 아웃소싱으로 생산해 판매하며, 이를 완벽하게 관리하는 건 엔플이 유일하다.
그걸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탐 키튼이고.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가요?”
엔스토어 수수료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았는데, 탐 키튼 CEO는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엔플이 판매하는 모든 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희는 엔플 실리콘이라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반도체 개발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엔플의 반도체 설계 기술은 업계 최고죠.”
엔폰은 디자인뿐 아니라, 성능면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그래서 명품 취급을 받는 거고.
“엔플 실리콘을 키우는 과정에서 한 팹리스 스타트업을 인수할 생각이었습니다.”
“인수하셨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실패했습니다.”
“어째서요?”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유성전자가 나서서 인수했으니까요. 놀랍게도 가격 협상도 하지 않고 부르는 대로 사갔더군요.”
이 말을 들으니 어떤 회사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담담한 어투로 계속 말했다.
“그 기업의 이름은 NP세미였습니다. 그때는 좀 아쉽다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유성전자가 인수한 금액이었다면, 저희도 심각하게 고민해봤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NP세미는 엔플 실리콘의 마스터피스였습니다. 만약 그 기업을 인수했다면 엔플 실리콘은 완성됐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다.
1회차 때 NP세미는 엔플에 인수돼 CPU, GPU, NPU, 메모리를 결합한 NP1 칩셋을 개발한다.
NP1 칩셋은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다른 업체들에 비해 한 세대 이상 앞서나갔다.
이러한 기술적 우위는 엔플 제품의 높은 가격을 정당화했고, 높은 수익을 다시 재투자해 기술 격차를 더욱 키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회사를 엔플이 인수하기 직전 유성전자가 인수했다.
유성전자는 NP세미를 흡수하는 대신 독립 회사로 놓고, 아예 메모리 반도체 설계부서를 그 밑으로 붙였다.
덕분에 설계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
현재 유성전자의 AP는 모바일의 절대 강자인 쿨컴의 스냅드라군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받을 정도다.
“솔직히 유성전자가 인수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당시 유성전자는 자체 설계 역량을 키우기 위해 인력 충원까지 끝마쳤으니, 팹리스 인수에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나중에 들으니, 유재호 회장이 직접 지시한 일이라 하더군요. 그 직전에 누군가 인수를 조언했다고 하던데…… 혹시 한 대표님이 맞습니까?”
어차피 다 알아보고 물어보는 걸 테니, 난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탐 키튼 CEO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동우정밀, NP세미, RD쿼넷, 그리고 ADM까지. 유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설계와 팹리스의 강자로 올라선 것은 전부 한 대표님의 조언 덕분이었군요.”
“조언이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걸 듣고 말고는 CEO가 결정할 일이죠.”
지금이야 누구도 내 말을 흘려듣지 못하겠지만, 당시 나는 증권사를 다니다가 그만둔 청년에 불과했다.
그런 나를 만나고, 내 말에 따른 것은 유재호 회장의 판단이었다.
만약 그때 내 말을 무시했다면, 지금의 유성전자 역시 없었겠지.
“CEO란 고독한 자리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조언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엔플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탐 키튼 CEO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누구도 한 대표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설마…… 이건 손을 잡자는 뜻인가?
유성전자는 제조업 중심이기 때문에 협력이 가능하다. 그러나 엔플은 직접 자신들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회사다.
이번에 클라우드 게이밍을 통해 드러났듯, 클라우드는 플랫폼 생태계를 뛰어넘을 힘을 지녔다.
과연 엔플이 자신들의 생태계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허락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협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