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블록 밸리 (5)
난 블록 밸리 본사에서 민아름을 맞았다.
그녀는 슬랙스에 린넨 셔츠, 롱코트를 입었다. 여전히 패셔너블한 모습이다.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우리는 반갑게 악수했다.
외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기쁘단 말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엄살 부리듯 말했다.
“덕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어요. 연말 파티와 신년 모임에 나가지도 못했구요.”
신진 디자이너 발굴을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도 웬만큼 한다. 패션 사업을 이끌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이다.
난 그녀를 블록 밸리 창업자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MFW 민아름 대표입니다.”
“안녕하세요, 찰스 그리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켄 어틀리입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찰스와 켄과는 달리, 루퍼스는 고개만 살짝 숙인 다음 일이 바쁘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민아름이 살짝 당황하자 찰스가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친구가 원래 부끄러움이 많아요.”
루퍼스는 낯을 좀 심하게 가리는 성격이다.
그래도 며칠 사이 나랑은 꽤 친해져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됐다.
민아름은 남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블록 밸리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최고의 게임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던데요.”
“하하, 뭘요.”
“과찬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디 게임 개발자였지만, 이제는 억만장자가 된 스타 개발자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인생은 한 방이다.
충분히 대화를 나눈 다음 찰스와 켄은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고, 나와 동호 선배, 그리고 민아름까지 셋만 남았다.
우리는 편하게 한국어로 대화했다.
“유럽에 출장을 자주 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미국에, 그것도 오렌지카운티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명품은 아무래도 유럽이 확고하지만, 유행에 민감한 컨템포러리 브랜드에서는 미국이 앞서 있어요. 트리아일랜드와 세슬리의 경우 현재는 매스티지 급이라 할 수 있지만, 브랜딩을 잘만 하면 프레스티지 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응? 이게 무슨 말이야?
매스티지가 뭐야? 처음 들어보는 영어 단어인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나와는 달리 동호 선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요.”
“…….”
못 알아들었다는 것에 내 전재산을 걸 수 있다.
계속 얘기를 계속 들어보니, 매스티지는 매스(Mass, 대중)와 프레스티지(Prestige, 고급)를 합친 단어라고 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준 명품이랄까?
최근에는 이 매스티지 브랜드들이 급성장하고 있고, 명품들도 충성 고객 확보를 위해 매스티지 브랜드를 따로 출시하는 추세라고 한다.
얘기가 나온 김에 그녀는 그동안의 업무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MFW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향후 뜰 만한 신진 브랜드에 미리 투자하는 것과 디지털 전환을 돕는 것.
아무래도 신생 브랜드의 경우 생산, 유통, 재고 관리 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이건 스노우 크래시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도입하는 걸로 간단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브랜드 홍보는 그렇지 않다.
브랜드 이미지를 어떻게 쌓고, 이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냐는 기술력과 자본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무조건 홍보만 많이 한다고 좋은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일반적인 제조품은 가격과 기능이 연동되어 있다.
명품 자전거, 명품 오디오, 명품 카메라, 명품 자동차 등등.
수천만 원짜리 오디오와 수십억 원짜리 자동차를 사는 것은 저렴한 제품에 비해 성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품 옷이나 가방은 가격과 기능에 큰 연관성이 없다.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로 브랜드 이미지.
똑같은 가방이라도 어떤 로고가 박혀있느냐에 따라 가격은 열 배 이상 차이 난다.
“최근 홍보 트렌드는 온라인이에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플랫폼은 바로 린스타그램이죠. 홈페이지가 없는 브랜드는 있어도, 린스타 계정이 없는 브랜드는 없어요.”
이유는 사진이 중심이기 때문. 애초에 명품과 브랜드를 자랑하는 문화가 린스타그램을 통해 생겨난 거고.
때문에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직접 린스타 계정을 운영하며, 자사의 제품을 홍보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브랜드를 등록하자마자 린스타 계정부터 만든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다 보니 린스타그램이 패션 브랜드들의 광고 각축장이 됐다는 것. 지나친 광고 노출로 인해 소비자들의 반감을 사거나 브랜드 이미지가 하락하는 일도 생겨났다.
때문에 어떤 명품 브랜드는 300만 명이나 되는 린스타그램 계정을 하루아침에 삭제했다고 한다.
“으음, 패션 세계는 복잡하군요.”
동호 선배의 말에 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패션 사업은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 해야지, 나 같은 문외한이 손대면 안 되는 것이다.
민아름에게 맡겨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냥 얼굴 보자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좋은 제안이 하나 있어요.”
내 말에 민아름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어떤 제안인가요?”
“MFW가 투자하고 있는 브랜드를 활용해 블록 밸리에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요?”
“…….”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잠시 후,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게임을 만들라구요?”
“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메타버스에서 패션 사업을 할 거라고.”
그래서 회사 이름도 MFW(Metaverse Fashion Week)로 지은 거고.
민아름은 살짝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긴 한데…….”
하긴, 설마 메타버스 중에 게임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게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SNS 홍보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공간 전체를 브랜드의 정체성에 맞게 꾸미는 거죠.”
아마 홍보라고 하면 패션쇼나 패션잡지, TV 광고 등을 생각했을 테고. 인터넷 홍보라고 하면 쇼핑몰 제휴나 에이튜브 광고, 톡틱 영상 등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게임 역시 중요한 홍보 플랫폼으로 부상한다.
“현재 10대 이용자들은 매일 한 시간 이상 블록 밸리에 접속하고 있어요. 아마 몇 년 안에 미국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세 시간 이상 이용할 거예요.”
이는 블록 밸리가 10대들의 가장 중요한 플랫폼으로 등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록 밸리에서 수익을 내는 방식이 오직 게임 제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가 입을 옷을 제작해 판매하는 걸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 실제로 아바타용 옷만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브랜드도 생겨나는 중이다.
“아시다시피 10대들은 유행에 민감하죠. 아바타가 특정 브랜드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홍보가 되지 않겠어요?”
민아름은 신중하게 물었다.
“게임에서 브랜드를 알린다는 게 가능할까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불가능하진 않죠. 총기 판매가 불가능한 나라에서 다들 콜트, 윈체스터, 브라우닝, 바렛, 글록 같은 브랜드를 알고 있는 건 다 FPS 덕분이니까요.”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언제 어떤 총을 써야 하는지 알아야 이길 수 있으니까.
동호 선배는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역시 AK-47이 아닐까?”
“아! 그건 FPS의 필수품이죠.”
그거랑 알라의 요술봉 챙겨서 픽업트럭에 올라타면, 잠시나마 테러리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정작 한국 청소년들이 훗날 실제로 쓰게 될 K2가 등장하는 게임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난 계속해서 설명했다.
“블록 밸리의 이용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10대예요. 페이스노트나 린스타그램을 통해 친구들과 소통하듯, 지금은 게임 안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있어요. 게임 캐릭터라는 아바타를 활용해서요. 10대들에게 아바타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죠. 때문에 기꺼이 아바타를 꾸미는 데 돈을 씁니다.”
동호 선배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긴, 예전에 쎄이월드에서 밤송이 모아서 아바타 꾸미는 게 유행이었지. 밤송이 하나에 100원이었는데.”
민아름은 놀란 듯 말했다.
“쎄이월드라니…….”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
“그게 언제적 이야기예요?”
우리의 반응에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왜 그래? 쎄이월드 몰라요?”
민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세대는 아니라서요. 아! 그래도 뭔지는 대충 알아요.”
“갑자기 세대 차이 확 나는 느낌이네요.”
동호 선배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 아니,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나도 어렸을 때 아주 잠깐 했어.”
난 모른 척하며 계속 설명했다.
“작년 말에 나이트라이트에서 스카이픽스가 공연했던 거 알아요?”
“기사 봤어요.”
“그때 굿즈와 아이템 판매만으로 2000만 달러의 수익을 얻었죠. 판매된 제품 대부분이 옷과 액세서리였어요.”
10대들은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듯, 좋아하는 브랜드를 사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홍보만이 아니라 직접 옷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라는 건가요?”
“예. 기본 아이템 같은 건 그냥 나눠줘도 되겠죠. 몇 번 이상 방문하거나, 미션을 클리어하거나, 몇 점 이상 달성한 사람에게는 그냥 주는 방식으로. 먼저 브랜드를 알린 다음 판매를 시작하는 겁니다.”
“시즌에 따라서는 한정판을 내놓구요?”
“바로 그거예요.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패션 브랜드의 콘셉트에 맞는 게임 공간을 만들고, 의상과 액세서리를 판매한다는 게. 스트릿패션 브랜드라면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길거리 농구를 하고, 아웃도어 브랜드라면 가상 캠핑을, 방금 말한 퀵샤카의 경우는 서핑이 좋겠네요. 유저들이 게임을 하며 해당 브랜드와 친밀감을 느끼는 거죠. 그럼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그 브랜드가 만든 옷을 입어보고 싶지 않겠어요?”
지금이야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앞으로 2, 3년 후면 실제로 벌어질 일이다.
그냥 해보라고 지시해도 되지만, 본인이 납득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의욕이 달라지기 마련.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민아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재밌는 시도 같네요. 게임을 통해 브랜딩을 한다는 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좀 더 트렌디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테구요.”
“제 예상으로는 나이키, 아디다스, 타미힐 피거, 랄프 로렌 등 대중 브랜드나 매스티지 브랜드는 물론이고, 명품 브랜드들까지도 블록 밸리에 자사의 쇼룸을 만들고, 아이템을 판매할 겁니다.”
민아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설마요. 명품 브랜드들은 보수적이라 그런 방식을 좀 꺼릴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요?”
물론 처음에는 꺼렸다.
그러나 다른 브랜드들이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고 나자, 나중에는 앞다퉈서 뛰어들었다.
“청소년이 용돈으로 청담동 명품샵에서 100만 원짜리 명품 코트를 사기는 힘들죠. 하지만 블록 밸리에서 아바타가 입을 8만 원짜리 명품 코트는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구찌의 경우 블록 밸리에서 한정판으로 내놓은 가방이 유저들 사이에서 실제 가방 가격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아바타가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실제 제품도 사고 싶어질 테구요.”
브랜드 입장에서는 이미 디자인한 제품을 디지털화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 원가도 거의 들지 않고, 재고 관리나 유통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완전히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데다가, 미래의 고객도 확보할 수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게임은 어떻게 만들면 되나요?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어서.”
난 웃으며 말했다.
“아! 걱정 마요. 이런 거 잘하는 친구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