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블록 밸리 (1)
한세나는 여행 다녀온 이후 처음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며칠이 지났지만, 다들 여행지의 환상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또 놀러 가고 싶다.”
“매일 사진 들여다보는데, 바베이도스가 그리워.”
“난 디즈니랜드.”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아.”
한세나는 밥을 먹다 말고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래?”
“아니, 왠지 요즘 누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뜨끔!
그 말에 정소진은 속으로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미루의 부탁을 받고 세나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 벌써 보고도 두 차례 나 했다.
“흐음, 기분 탓인가?”
“기, 기분 탓이겠지.”
“역시 그렇겠지? 하긴, 누가 날 감시한다고.”
정소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가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야.’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보니, 뮤키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번에 LA에서 K-팝 페스티벌 열렸잖아. 뮤키즈 오빠들이 완전 휩쓸었다던데.”
“나도 봤어. 미국 팬들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어.”
“다른 K-팝 아이돌들의 인기를 전부 더한다고 해도 뮤키즈에는 안 될걸.”
한세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뮤키즈 오빠들 콘서트 가고 싶다.”
조유경은 고개를 저었다.
“예매 자체가 거의 불가능이야. 이번에 K-팝 페스티벌에도 300만 명 몰렸다고 하잖아.”
결국 암표를 사는 것밖에는 답이 없는데, 암표 가격은 대학생이 용돈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도 오빠 찬스 안 되나? 오빠라면 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졸라볼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어! 오빠한테 연락 왔다.”
“뭔데?”
“몰라. 웬 영상을 보냈는데.”
한세나는 별생각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는 20대 혼혈 남성이 나타났다.
어떻게 보기에는 동양인처럼 보이고, 다르게 보면 서양인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소년처럼, 다르게 보면 어른처럼 보이는 매력적인 외모였다.
그는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나 양. 뮤키즈의 제논입니다.]
“어…….”
영상을 본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진짜야?”
“뭐야? 제논 오빠라고?”
“마, 말도 안 돼! 우리 제논 오빠가…….”
깜짝 놀라거나 말거나 영상 속의 제논은 계속해서 말했다.
[세나 양이 요즘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공부도 안 한다면서요? 그러면 안 돼요. 앞으로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한세나가 되겠다고 저랑 약속해요. 알았죠?]
“…….”
영상을 보며 한세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제논 오빠가 나한테 영상 편지를!’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전용기 타는 것보다 더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한세나는 놀라 소리쳤다.
“이 인간은 대체 제논 오빠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 * *
우리는 차를 타고 LA에서 산타모니카로 이동했다.
동호 선배가 운전대를 잡았다.
“아! 유현무 대표에게서 연락받았어. 네 제안대로 할 생각 있는 것 같던데.”
“그쪽이 알아서 세부 계약 조건 적어서 보내달라고 해요. 받아서 본사에 검토해보라고 하죠.”
“조건이 별로면?”
“그럼 마음에 들 때까지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돌려보내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컨티뉴 캐피탈을 상대로 엉망인 계약서를 만들어오지는 않겠죠.”
“오호, 협상이란 그렇게 하는 거구나.”
그나저나 걸그룹 노래만 계속 듣고 있으니 지겹다.
“대체 어떻게 된 스마트폰 플레이 목록에 걸그룹 노래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여자 솔로 가수인 지유 노래도 있는데.”
“……라디오나 듣죠.”
채널을 대충 돌리다 보니,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왔다.
[Take me home, country road~]
“웬 컨트리 음악이야? 이런 거 좋아해?”
“미국 도로를 달릴 땐 이런 음악을 들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우리는 함께 컨트리 음악을 흥얼거렸다.
“역시 캘리포니아가 날씨가 좋아.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네.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에 살까?”
“언제는 뉴욕에 살고 싶다면서요?”
“어디 살지 고민 중이야. 뉴욕에서 화려한 삶을 살 것인가, 캘리포니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 것인가.”
“둘 다 살아보면 되죠.”
집 두 채 사놓고 전용기로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않을까?
은퇴할 때는 펜트하우스나 대저택을 살 만큼 벌어놓았을 테니.
산타모니카까지는 금방이다.
태평양에 접한 해안 도시로 미국에서도 살기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여러 유명 게임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중 한 게임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를 반겨준 사람은 찰스 그리핀, 켄 어틀리.
다름 아닌 퍼플게임즈의 공동 CEO다.
난 동호 선배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이동호.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루퍼스 씨는요?”
“안에 있습니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루퍼스 배일리는 자신은 경영에는 관심 없다며, 경영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CTO(Chief Technical Officer, 최고기술책임자)를 맡았다.
사무실 안에는 150명의 인원이 개발에 매진 중이었다.
이전에 왔을 때에 비해 열 배가 늘었다.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사무실도 이곳으로 이전했다.
출시가 코앞인 만큼 다들 좀비 같은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었다.
난 루퍼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감자칩을 먹으며 일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내가 다가가자 그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예. 오, 오랜만입니다.”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여전히 낯을 가리는 듯하다.
책상은 지저분했고, 다 먹은 감자칩 봉지와 부스러기가 널려 있었다.
그나저나 이전보다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운동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귀하기 전까지 쓰러졌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건강에는 별 이상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건강검진은 받게 해야겠다.
혼자만 받으라고 하면 그러니, 전직원 건강검진 같은 걸 시행하든지 해야지.
“저기…….”
“예?”
“감사합니다. 루카스 CEO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감사하는지 모르겠지만…….
“예.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루퍼스는 계속 일하라고 두고, 우리는 미팅실에 앉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블록 밸리의 정식 출시가 사흘 후로 다가왔기 때문.
찰스 그리핀이 말했다.
“처음 개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규모가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켄 어틀리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흥행을 못 하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한 돈만 해도 1억 달러가 넘고, 레전드게임즈 역시 퍼블리싱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현재 개발 인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매년 수천만 달러씩 지출되니, 만약 게임이 망하기라도 하면 파산이다.
“걱정할 것 없어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직원을 뽑아야 할걸요.”
일반적으로 게임이 출시되고 나면, 개발팀은 해체되거나, 다른 게임 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블록 밸리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닌, 게임 플랫폼이자 메타버스의 초기 형태니까.
* * *
연초는 신작 게임들이 많이 쏟아지는 시기다.
그 이유는 많은 게임사들의 회계 연도가 3월 말에 끝나기 때문. 그러니 그전에 최대한 게임을 출시해 매출과 이익을 높이려는 것이다.
유명 게임사들의 게임 출시가 줄을 잇는 가운데, 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게임이 있었다.
바로 ‘블록 밸리(Block Vally)’.
이를 만든 곳은 퍼플게임즈라는 인디 게임사. 과거 ‘해머 워리어’라는 인디 게임을 만들었던 곳이다.
제법 잘 만든 게임이었고, 판매량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일부 팬들은 후속작을 기대했다.
하지만 블록 밸리가 주목을 받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했기 때문. 여기에 더해 레전드게임즈가 전세계 퍼블리싱을 맡았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미국 최대 게임 웹진 게임스파크(Game Spark).
이곳의 기자인 짐 슈나이더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로 통했다.
그의 꿈은 원래 게임 개발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코딩에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었고, 기획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개발자 대신 기자가 됐다.
대부분의 게임 기자들은 출시된 게임을 해보고 리뷰를 쓰거나, 게임사가 던져준 정보로 홍보성 기사를 썼다.
그러나 짐 슈나이더는 달랐다.
그는 직접 발로 뛰며 게임사 직원들을 만나고, 마치 탐사 보도라도 하듯 게임회사의 내부 사정과 개발 과정을 파헤쳤다.
짐 슈나이더는 적절한 인터넷 밈과 게임 밈, 유행어 등을 섞어서 기사를 썼고, 아무리 유명하고 거대한 게임사라 해도 거침없이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덕분에 게이머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그는 게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음악,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은 창작자가 만든 것을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게임은 다른 문화상품과는 달리 소비자의 플레이를 통해 완성된다.
똑같은 게임이라도 어떻게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소위 말하는 똥겜이 될 수도 있고, 갓겜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오직 게임만이 지닌 매력이다.
그리고 이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게임 기자의 역할이다.
짐 슈나이더는 게임스파크의 기자로서 출시를 앞둔 블록 밸리를 먼저 해볼 수 있었다.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한 게임이라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블록 밸리에 주목했다. 하지만 무조건 돈을 쏟아붓는다고 좋은 게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게임을 만들던 작은 게임사가 대기업에 인수된 뒤 망가진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AE 개놈들!’
그렇다면 블록 밸리는 어떨까?
이제까지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게임 장르는 ‘오픈월드 샌드박스 롤플레잉’.
‘마이 크래프트랑 비슷한 류의 게임인가?’
한때 이런 샌드박스형 게임들이 유행이었고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마이 크래프트 외에는 크게 성공한 게 없었다.
그는 게임을 시작해보았다.
‘역시 그래픽은 크게 뛰어나지 않군.’
요즘 나오는 트리플A급 게임에 비한다면 조악한 수준이다. 이건 샌드박스 게임 특성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싱글 플레이는 그다지 대단할 게 없었다.
마치 미니게임처럼 여러 장르의 짧은 게임들이 들어 있었다.
FPS(1인칭 슈팅 게임), TPS(3인칭 슈팅 게임), 타이쿤(경영 시뮬레이션), 일상 커뮤니케이션, RPG(롤플레잉 게임), 배틀로얄, 레이싱, 퍼즐, 추리 등등.
‘딱히 깊이는 없군.’
여기까지는 높은 평가를 주기 힘들었다.
하지만…….
원래 샌드박스형 게임은 싱글 플레이보다는 그 이후의 제작과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뭔가를 창작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장르의 재미다.
그런데 블록 밸리는 다른 샌드박스 게임들과는 한 가지 큰 차별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게임 내 스튜디오에서 제공하는 개발툴을 활용해 새로운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코딩을 못 해도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가능할까?
개발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루기 쉬웠다.
어린아이라도 몇 시간만 배우면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게임을 떠올렸다.
수십 명이 한 공간 안에 모여 정해진 룰에 따라 미션을 수행해 탈출하는 형태의 게임.
최후에 살아남은 한 명이 승자가 되는 배틀로얄이 아닌,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승리의 조건이다.
처음에 짐 슈나이더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작을 시작했다.
어느새 그는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게임 제작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