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휴식 (12)
우리는 바로 오코너 버거 LA지점에 입장했다.
지유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여기 점장과 아는 사이라서.”
지난번 왔을 때 인사도 나눴다.
애초에 오코너 버거 지분 70퍼센트가 컨티뉴 캐피탈 소유다. 지금도 계속 투자를 하고 있고.
이 정도 투자하면 어느 지점을 가나 줄 안 서고 입장이 가능하다.
우리는 오코너 버거와 버터감자, 그리고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앗! 제가 살게요.”
“괜찮아. 후배에게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야.”
“감사합니다.”
햄버거는 금방 나왔다.
지유는 한 입 먹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맛있어?”
“예. 너무 맛있어요.”
“많이 먹어.”
작은 입으로 커다란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귀엽다.
후배라고는 해도 정작 학교에서는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차피 같이 학교를 다닌 건 1년 정도였고, 한국대가 좀 커야 말이지.
“그러고 보니 학교는?”
“휴학 중이에요. 2학년 1학기도 간신히 마쳤어요.”
하기야 해외 투어까지 하는 판에 학교 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아! 선배 공연 봤어요?”
“응. 잘 봤어.”
“어땠어요?”
난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엄청 잘하던데.”
원래 연예인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고, 딱히 콘서트 같은 걸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직접 공연을 보고 나니, 왜 사람들이 비싼 돈 내고 콘서트를 가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몸으로 그 커다란 무대를 꽉 채웠다는 게 신기하다.
지유는 날 보며 갑자기 웃었다.
“왜 웃어?”
“그냥요. 이렇게 외국에서 만나니 좀 신기해서요.”
사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외국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냥저냥 TV에 나오는 가수였는데, 그사이 누구나 인정할 만한 톱스타가 됐다.
“선배님 오늘 시간 괜찮아요?”
“뭐, 다른 일은 없어.”
엄밀히 따지면 난 지금 휴가 중이다.
“그럼 관광할래요? 제가 안내해줄게요.”
“자신 있어?”
“그럼요. 저 LA에 몇 달이나 있었는데요. 저만 따라오세요.”
우리는 햄버거를 다 먹고 일어났다.
기온은 낮지만, 햇살이 강해서 별로 춥지는 않았다.
먼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둘러보고, 비버리힐즈 쪽으로 이동했다.
저 멀리 언덕에는 흰색으로 된 그 유명한 할리우드(HOLLY WOOD) 사인이 보였다.
지유는 가이드처럼 설명해주었다.
“그거 알아요? 저 할리우드 사인은 원래 부동산 개발업체가 광고하기 위해 만든 거래요.”
“그래?”
처음 저걸 세운 사람은 저게 미국 영화산업의 상징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저 잘하면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을 수도 있대요.”
“어! 정말?”
“예. 이번에 페이지 감독이 찍는 영화에 오디션을 보라는 연락이 왔어요. 시나리오를 봤는데 조연이지만,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이에요.”
“올리버 페이지 감독?”
“네.”
할리우드에서도 거장이라 할 만한 유명 감독이다. 흥행작도 많고.
영화는 좋아하는 편이라 그럭저럭 많이 보는 편이다. 올리버 페이지 감독 영화 중 동양인 여자가 나오는 게 뭐가 있었지?
“‘더 임페커블(The Impeccable)’인가?”
그러자 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앗!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기사로 본 것 같아.”
“기사 아직 안 떴을 텐데…….”
난 대충 둘러댔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가 있어서.”
다행히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긴. 컨티뉴 캐피탈이면 그렇겠네요. 이번에 저희 기획사에도 투자했다던데.”
“나도 동호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
“그럼 저희는 같이 일하고 있는 셈이네요.”
얘는 내가 컨티뉴 캐피탈 대표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잘나가는 직원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영화에는 원래 조연으로 중국계 미국인 배우가 출연했다. 그 역할이 지유한테 돌아갔다고?
“아직 정해진 건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얘는 연기에도 재능이 있고 영어도 잘한다.
그렇다 해도 할리우드 진출이라니!
1회차 때와는 달리 대체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해진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뭐가?”
“그날 선배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에 대해서요.”
내가 지유에게 해준 말은 씨랩의 피처링을 맡지 말라는 것.
결국 지유가 거절하며, 피처링은 핑크걸스의 리더 케이나가 맡았다. 그런데 씨랩 게이트가 터지며, 케이나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핑크걸스는 해체됐다.
“그래서 선배님한테는 항상 고마워요.”
“고맙긴. 나도 찌라시만 보고 말해준 건데.”
내 말을 따른 건 본인의 선택이지.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한 곳만 더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데, 거기만 갔다가 돌아가요.”
“어딘데?”
“따라와 보시면 알아요.”
지유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그리피스 천문대.
LA에서는 제법 고지대에 위치해 야경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지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그대로네요. 예전에 자주 왔었는데.”
난 처음 와본다. 그런데 왠지 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 영화에 나온 곳 아닌가? 남녀 주인공들이 춤추던…….”
난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설마 그 영화 아직 안 나온 건 아니겠지?
내 말에 지유는 반색했다.
“아! 선배님도 그 영화 봤어요?”
다행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온 모양이다.
회귀했더니 이런 게 헷갈린단 말이지.
우리는 천천히 천문대 주변을 걸었다.
“예전에 여기서 친구랑 무허가로 버스킹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부터 가수를 하고 싶었나 보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요.”
왠지 버스킹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지유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날 언니랑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뭐 일은 잘하고 있나, 다른 동기들 어떻게 사나 그런 얘기지.”
“흐음, 그랬구나. 언니 많이 좋아했어요?”
“…….”
이건 왜 묻는 거야?
“사귈 때는 그랬지.”
“그럼 지금은요?”
“그냥 친구 사이지.”
헤어진 지 꽤 된 데다가 내 입장에서는 그 이후로도 10년이 더 지났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아무 감정 없이 편했다.
“언니가 첫사랑이었어요?”
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중학생 때 보고 반했으니, 첫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하긴, 언니는 예쁘니까요.”
이렇게 보니, 확실히 진세연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넌 만나는 사람 없어?”
내 말에 지유는 화들짝 놀랐다.
“저, 저요? 없어요.”
“아이돌들은 보통 몰래 사귄다던데.”
증권사 찌라시에 따르면, 아이돌들이 말로는 오직 팬들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다들 예쁜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기야 한창 나이대의 예쁘고 잘생긴 애들을 모아놓았는데 연애감정이 안 생길 리 없지.
거의 무슨 첩보 활동하듯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만나기도 하고, 방송에서 일부러 상대만 아는 손동작이나 제스처를 취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팬들에게 걸리기도 하고.
대체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는지 의문이지만, 몰래 사귄다 해도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 모양이다.
“남자 아이돌들에게서 연락 많이 오지 않아?”
“그렇긴 한데, 별로 관심 없어요.”
지유는 현재 여자 솔로 가수 중에는 원톱.
외모와 노래 실력 모두 웬만한 걸그룹 멤버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대시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전 절대 아니에요.”
왜 이렇게 단호하게 부정해?
“혹시 소속사가 연애 금지령이라도 내렸어?”
“아니에요. 저희 소속사는 그런 거 없어요. 제가 무슨 미성년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중에 결혼 못 하면 소속사에서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요.”
천문대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까부터 우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여성들이 다가왔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과 흑인 여성 한 명이다.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유 맞아요?”
“네?”
설마 여기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지라 지유는 살짝 당황했다.
“맞죠? 저 팬이에요!”
“저두요. 이번에 콘서트 꼭 가고 싶었는데.”
“아, 네.”
난 혹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말했다.
“전 매니저입니다.”
“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유는 사인을 해주고 팬들과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러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지?”
“연예인인가?”
뭐, K-팝에 관심 있는 팬들이 아니라면 모르겠지.
난 지유에게 말했다.
“팬들을 위해 노래 한 곡 해줘.”
“여기서요?”
“몰래 버스킹도 했었다며?”
지유는 왠지 쑥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렸을 때였는데. 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
내가 지유 노래 중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은하수과 달빛’인데…… 이 노래는 아직 나오기 전인가?
“아무거나.”
“그럼 시작할게요.”
지유는 스마트폰으로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를 불렀다.
“Oh, I love to see you walk into the room…….”
비욘세의 헬로우인가?
마이크도 없이 부름에도 LA의 밤하늘 가득 지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세 주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다들 스마트폰을 들어 영상을 찍었다.
대체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성량이 나오는지 신기하다.
원래는 한 곡만 부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몰려서 다섯 곡이나 불렀다.
사람들이 몰리자 다가온 경비원들은 해산시키기는커녕 본인들도 팔짱을 낀 채 노래를 감상했다.
난 너무 늦지 않게 호텔로 데려다주었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지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쁘실 텐데 오늘 감사했습니다.”
“나도 재밌었어. 다음에는 서울에서 봐.”
내 말에 지유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 * *
탑티어 엔터의 유현무 대표.
뮤키즈를 키워낸 장본인인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 박진웅 사장을 만나 보고를 받았다.
“뭐?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습니다.”
“얘기를 한 직원이 한미루라고 했지?”
“예.”
유현무 대표는 재계 쪽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았고, 한미루에 대한 얘기도 들어봤다.
‘한정그룹 주총에서 총수 일가를 날린 장본인 아닌가?’
그 후의 여러 행보를 보면, 적어도 그냥 직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얘기를 했는지. 한마디도 빠짐없이 자세히 말해봐.”
“어, 그러니까…….”
박진웅 사장은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대화를 전해주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핵심 요구는 두 가지.
바로 지분 70퍼센트를 달라는 것과 수수료를 최대한 낮추라는 것이다.
‘수수료를 낮춰서 더 많은 아티스트와 팬을 확보하면 수익은 따라오게 될 거라고?’
탑티어 엔터의 경우 뮤키즈의 수익 비중이 무려 60퍼센트.
때문에 만약 뮤키즈에 문제가 생기면 K-팝 플랫폼인 애니버스를 제2의 캐시카우로 키울 생각이었다.
여기에 투자하겠다는 곳은 많았다.
그럼에도 컨티뉴 캐피탈에게 협력을 요청한 가장 큰 이유는 스노우 크래시 때문. 스노우 크래시와 협업한 블랙우드 인터내셔널과 레전드게임즈 모두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니까.
그런데 한미루의 말은 애니버스로 수익사업을 하기보다는, 이를 통해 K-팝을 더 키워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K-팝의 향후 성장 가능성을 훨씬 크게 보고 있다는 뜻인가?’
뮤키즈가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수년 동안 꾸준히 뿌려놓은 씨앗이 이제 조금씩 성과를 내는 중이다.
하지만 이 인기가 어느 정도 이어질지, 그리고 어느 정도 더 커질지는 그조차도 가늠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K-팝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수수료를 올려받는 것보다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유현무 대표는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한 다음, 한미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미루 팀장님. 탑티어 엔터의 유현무 대표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대표가 직접 전화를 했음에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며칠 전 박진웅 사장이 찾아뵙고 얘기를 나눴다고 들었는데, 저희 쪽의 실례가 많았습니다.”
[뭘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마치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투였다.
“말씀해주신 내용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예. 그 문제는 이동호 지사장님과 상의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얘기를 하며 유현무 대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왠지 윗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심지어는 지사장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도 그렇고.
어쨌거나 잘 얘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한미루가 말했다.
[아!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유현무 대표는 살짝 긴장했다.
“예. 말씀해주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한미루의 부탁을 들은 유현무 대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우 쉬운 부탁이네요. 알겠습니다.”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인물과 지명, 단체, 그 밖의 일체의 명칭이나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이고,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