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휴식 (8)
이동호는 비즈니스석에 올라탔다.
굳이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비즈니스석을 택한 이유는 같이 가는 사람들 때문.
A380 기종의 94석이나 되는 비즈니스석은 아이돌로 가득했다.
이동호는 루나틴즈, 쥬얼리즈, 걸프렌즈, 레몬핑크 등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걸그룹 말고도 보이그룹도 많았지만, 어차피 남자 아이돌은 관심 밖이었다.
메이블 엔터 홍서진 대표가 다가와서 물었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예.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즈니스석에 타는 건 연예인과 엔터사 임원들 정도. 일반 스태프들은 이코노미석이었다.
편안한 이동호와 달리, 기획사 임원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이동호에게 말을 걸 기회를 노렸다.
현재 컨티뉴 캐피탈은 한국 연예계 최대 큰손.
한미루는 딱히 특정 기업이 아닌 연예 산업 전반에 투자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엔터사고 제작사고, 일단 괜찮다 싶은 곳들에는 전부 돈을 넣었다.
비상장사는 직접 만나 협상해서 지분을 사들였고, 상장사는 대략 10퍼센트 범위 내에서 장내 매수했다.
잘나가는 엔터사라고 해봐야 대부분 시총은 1, 2조 원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방위적으로 투자했음에도 총 투자비는 겨우 3조 원.
‘3조 원이 겨우라니.’
재벌그룹이 들어도 기막혀 할 것이다.
하지만…….
‘GL케미칼과 GL엔텍 투자로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실제로 컨티뉴 캐피탈의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보면 그다지 큰 비중이 있는 편은 아니다.
IT와 게임 등 주력 투자처에 비한다면, 이 정도면 소액 투자에 가깝다. 아마 이 돈을 다 날린다고 해도 한미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리포트나 쓰고 있었을 텐데, 이제는 지위가 완전히 달라졌다.
‘잘 키운 후배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옆에 앉은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가 진짜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이라구요?”
“그렇다니까.”
아나운서 진세연.
그녀가 이동호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같이 학교를 다녔던, 학과 후배이기 때문.
진세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전에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지사장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 어떻게요?”
“훗, 열심히 일하다 보니 스카우트당했지.”
“그럼 미루는요?”
“음, 걘 한국지사에서는 팀장급이야.”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 한국에서 쓰는 명함에는 팀장이라고 적어놓았으니까.
‘본사에서는 공동대표지만.’
사모펀드에서 팀장급이면 웬만한 증권사 과장보다 높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사모펀드가 컨티뉴 캐피탈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선배는 LA에 왜 가는 거예요?”
“세계 시장에서 K-팝의 성공 가능성과 투자한 기업들이 잘하고 있나 확인하러 가는 거지. 그래야 향후 투자 방향도 설정할 테고.”
그 말에 임원과 매니저들은 잔뜩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원하는 엔터사들은 한둘이 아니다.
‘공연을 보고 투자 결정을 내리려는 건가?’
‘이번 기회에 잘 보여야 해.’
‘눈도장 확실하게 찍어놔야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동호는 후배와 계속 잡담을 했다.
“아! 지금 LA에 미루도 있어.”
그 말에 이번에는 진세연의 옆에 앉은 여성이 물었다.
“정말요? 미루 선배님이요?”
“응.”
* * *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세나와 친구들이 가고 나니 왠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 날 바로 동호 선배가 도착했다.
“왔어요?”
“하이. 오랜만이야.”
증권사 다닐 때의 후줄근한 모습과는 달리, 핏이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넥타이핀과 커프스를 끼고, 명품 구두를 신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신수가 훤해 보인다.
“그렇게 입으니, 성공한 사업가 같네요.”
“그래? 아름 씨가 골라준 건데 꽤 괜찮아?”
“자주 만나요?”
“같은 건물에서 일하니, 출장 갈 때 빼면 거의 매일 보지.”
민아름이 진행하는 패션 사업도 잘 진행 중이다.
신생 브랜드를 사들이고, 기존 브랜드들과는 제휴를 맺었다. 엔터와 패션은 시너지도 괜찮은 편이지.
“아까 공항에 팬들 엄청 몰려 있더라. K-팝의 인기가 이 정도였나?”
“그래요?”
“응. 예전의 K-팝이 아니야. 이번 공연 예매 뜬 지 5분 만에 매진됐고, 암표가 열 배 가격에도 팔리고 있어.”
외국에서도 K-팝 공연이 자주 열리지만, 이 정도 규모의 행사는 흔치 않다.
그야말로 한국의 내로라하는 아이돌들은 전부 참가하는 ‘K-팝 페스티벌’이다.
“미국 본토는 물론이고, 캐나다와 멕시코 등에서도 예매가 몰린 모양이야.”
하기야 미국 다른 지역에서 오나, 캐나다나 멕시코에서 오나, 어차피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미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팬들로 인해 현재 주변의 웬만한 중소 호텔 등은 매진이고, 한인타운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생각인지, 한국문화원과 관광청까지 지원에 나서 부스를 차려놓고 한국 문화와 관광 홍보에 나섰다.
“선배 룸 잡아놨어요.”
난 프레지덴셜룸으로 안내해줬다.
내부를 확인한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나보고 여기를 쓰라고?”
“네.”
“여기 엄청 좋네. 맨날 이런 데서 지내는 거야?”
“맨날은 아니구요. 보통은 스위트룸 쓰죠.”
룸이 아무리 커봐야 어차피 잠밖에 안 잔다.
“블랙우드를 고객으로 삼으니 이런 게 좋네.”
“좋죠.”
돈을 떠나서, 예약 걱정 없이 전세계 호텔을 내 집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아! 이따 세연이랑 보기로 했어.”
“시간 뺄 수 있대요?”
“응. 아무래도 가수들에 비하면 스케줄이 널널한 모양이야.”
기획사 소속인 가수와는 달리, 아나운서는 방송사 소속이다. 업무시간만 끝나면 뭘 하든 자유겠지.
우리는 호텔의 바로 향했다.
유리벽 너머로 LA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난 간단한 식사와 함께 위스키를 주문했다.
“역시 비싼 술이 맛있어. 옛날에는 왜 이 돈 주고 마시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비싼 데는 비싼 이유가 있는 법이죠.”
“학교 앞 술집에서 같이 소주 마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요.”
그때만 해도 이렇게 성공할 줄은 나도 몰랐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요즘 한국은 어때요?”
“똑같지. 아! 우리국민당 경선, 남궁석 의원이 이긴 거 알지?”
“기사 봤어요.”
GL엔텍 사태 이후 남궁석 의원이 무난히 경선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그건 내가 정치판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 거였다.
임창식 의원은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경선 룰을 정할 때 당원과 일반 여론조사 비율이 7대3으로 정해졌고, 임창식 의원 쪽에 유리해진 만큼 경선은 거의 박빙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암호화폐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람에 개 같이 멸망했지. 하필 그 타이밍에 새턴과 타이탄이 폭락하고, 시장 전체가 터져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 이번에 뻘짓 하는 거 보고 우리 아버지도 욕하더라. 임창식 후원금까지 낼 정도로 열성 지지자였는데.”
정권교체 여론이 워낙 높은 만큼, 경선에서 이겼으면, 대선은 프리패스다.
만에 하나 이변이 생긴다 해도 어쨌거나 임창식이 대통령이 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으니.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내가 대한민국을 살렸다.
“남궁석 의원은 니가 대통령 만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는 걸 알려나?”
“모르는 편이 낫겠죠.”
안다고 해도 나한테 뭐 챙겨줄 것도 아니고.
“요즘 컨티뉴 캐피탈의 위상이 장난 아니야. 이번에 페더 몰락시켜서 얼마나 벌었지?”
“350억 달러 정도요.”
동호 선배는 혀를 내둘렀다.
“투자 한 번에 40조 원이라니. 다른 대기업들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지겠는데.”
하기야, GL전자가 4만 명 고용해서 1년에 겨우 1조 번다.
그런데 그 40배를 투자 한 번으로 벌어들인 것이다. 금융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한 일만으로 전설은 아니어도 레전드는 되지 않을까?”
“뭐,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지금까지 한 일은 미래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거다.
아직 클라우드와 게임 시장을 장악하지도 않았고, 메타버스는 열리지도 않았다.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내가 회귀하기 직전은 메타버스의 태동기였다.
이번에는 나로 인해 몇 년은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1회차 때와는 달리 바로 롤프 부치와 알렉스 프레스턴을 내쫓고, 시드가 CEO가 됐으니까.
“어! 세연이 왔나 보네. 여기야!”
동호 선배는 손을 흔들었다.
세연이는 스키니진에 패딩,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은 편한 차림이었다. 여전히 예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냥 그렇지.”
진세연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학교에서 얼굴 보던 후배들과 LA에서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네. 자자, 한잔하자.”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동호 선배가 물었다.
“지유는 뭐하고 있어?”
“안무 연습하러 갔어요.”
“도착하자마자 고생이네. 가수도 쉬운 일이 아니야.”
“컨티뉴 캐피탈이 이번에 지유네 소속사 지분도 샀다면서요?”
“응.”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연계기획사와 드라마, 영화 제작사의 지분을 다 사들인 만큼, 거기에는 지유의 소속사인 레인보우 레코드 역시 포함되어 있다.
진세연은 슬쩍 물었다.
“선배, 혹시 방송 나올 생각 없어요?”
“방송?”
“같은 과 선후배라고 하니까, 방송에 섭외 좀 해보라고 하던데요.”
“나가서 무슨 말을 해?”
“컨티뉴 캐피탈의 비전과 향후 세계 경제 전망 같은 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실제로 잘 모른다.
괜히 나가서 헛소리하면 수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아무튼 꼭 나와 달래요.”
“생각 좀 해보고. 아니면, 범석이라도 내보내든지 할게.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주영이 결혼했다며?”
“예. 남편이 호주인이에요. 그래서 결혼식도 멜버른에서 간단하게 했대요.”
“이야! 국제결혼이라니. 그럼 앞으로 어디서 사는 거야? 호주에서?”
“한국 들어올 거라는데요.”
한번 얘기를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몇 시간 후, 동호 선배는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졸려서 안 되겠다. 난 먼저 자러 간다.”
“벌써요?”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해서.”
동호 선배가 가고 나자, 난 진세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술 남았는데 아깝잖아. 다 마시고 가자.”
“그럴까?”
난 옛 여친과 둘이 술을 마셨다.
“이 호텔에서 지내는 거야?”
“응.”
“여기 비쌀 텐데.”
“블랙우드가 컨티뉴 캐피탈이랑 협력하고 있어서, 할인 많이 해주거든.”
“좋겠다.”
우리는 각자 지난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요즘 잘나간다며?”
“잘나가긴. 그래 봐야 월급쟁이인데. 그래도 회사 다닐 때보다는 훨씬 재밌어.”
“적성에 잘 맞나 보네.”
“응.”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바베이도스로 휴가를 다녀왔다고 하자 진세연은 깜짝 놀랐다.
“진짜? 거기 나도 한번 꼭 가보고 싶었는데. 혼자 간 거야?”
“가긴 혼자 갔는데, 동생이 친구들 데리고 놀러 왔어.”
“동생이 좋아했겠는데.”
“아주 실컷 놀다 갔지.”
보통 그 정도 놀았으면 공부할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내 여동생이 그럴 리 없겠지.
진세연은 술을 마시며 물었다.
“그런 곳은 애인과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이.”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어?”
“응.”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글쎄.”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했다.
진세연은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왜 헤어졌더라?”
난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뭔가 잘못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진세연과 사귀고 있을 때로 회귀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났을까?
하지만 그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러니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진세연은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나는 건 좀 그렇겠지?”
미련이 남았다기보다는 그냥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처럼 친구로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우리 중학교 때부터 친구네.”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진짜?”
“응.”
“흐음, 든든하네.”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