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휴식 (6)
세나는 추궁하듯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을 하는 건데? 얼른 말해봐.”
다른 애들도 궁금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내가 컨티뉴 캐피탈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버지만 알고 계시고, 어머니와 세나는 모른다.
이걸 굳이 가족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싶지만…… 있다.
사실 나는 별문제가 없다.
어차피 내 정체를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세나 본인.
일반적으로 사모펀드 이름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차례 말하지만 한국 최대이자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인 MKK파트너스도 재계서열로 따지면 5위지만, 대부분은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컨티뉴 캐피탈은 다르다.
그동안 터트린 큰 사건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특히 GL케미칼과 GL엔텍 사태 때는 종일 언론에서 떠들어 댔으니, 투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오빠가 돈이 많다고 해서 세나의 삶이 달라질 건 없다. 세상에 그냥 부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컨티뉴 캐피탈 오너이자 대표라면?
당장 친구들이 보는 시선부터 달라질 것이다.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친구들을 만나고 놀러 다니는 것도 힘들어질 테고, 어쩌면 학교를 다니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도 있고.
그럼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나 성격상 자기 입으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게 뻔하다.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어머니와 세나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고.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냥 오빠가 돈 잘 번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난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아는 사람과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투자회사? 뭐 하는 건데?”
“뭐, 스타트업에 투자도 하고, 기업 인수도 하고.”
무려 스노우 크래시에 투자했다. 여기에 더해 퍼플게임즈, 레전드게임즈, 오코너 버거, 프리즈너 등도 인수했고.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자문과 자산 관리를 하는 등 투자 서비스를 제공하지.”
그 자문을 해주는 곳이 무려 사우디 국부펀드(PIF)다. 공동투자도 하고 있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나와는 달리, 소진이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아무튼 말해줘도 잘 모를 거야. 어차피 개인들 상대로는 영업 안 하고, 주로 기관들만 상대하니까.”
“흐음, 그래?”
“뭐, 그런 거지.”
얘기를 듣고 있던 조유진과 박세연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번 거예요?”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음…….”
이런 질문을 들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회귀를 했기 때문.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범하게 증권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겠지.
그렇다고 애들에게 오토바이 타다가 차에 치여서 회귀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기대감 어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줘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게 든다.
“다들 듣고 싶어?”
“네!”
이렇게 원하니 어쩔 수 없다.
난 세나와 친구들에게 회귀자의 성공 투자법……이 아니라,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쉽게 성공하는 비법 같은 건 없어. 뭐든 기본이 중요하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노력인데, 그냥 무작정 노력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먼저 원하는 목표를 설정한 다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세부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야 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매일 아침 그날 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서…….”
앞으로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될 만한 금과옥조와도 같은 얘기를 한창 열정적으로 쏟아내고 있는데, 세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네네, 잘 들었습니다. 얘들아, 우리 가는 동안 영화나 한 편 볼까?”
“난 미루 오빠 얘기 더 듣고 싶은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부분인데.
* * *
저녁이 될 때쯤 전용기는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와아! 나 미국 처음이야.”
세나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외국인들 엄청 많아. 다 외국인이야.”
“…….”
그야 외국이니까.
도착하기 전, 미리 LA JR블랙우드 호텔에 예약을 해놓은 덕분에 호텔 리무진이 공항에 대기 중이었다.
우리는 준비된 차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프레지덴셜룸을 본 애들은 깜짝 놀랐다.
“우와! 여기도 엄청 좋아!”
“너무 예쁘다.”
“야경 봐봐.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잠깐만. 어지럽히기 전에 사진부터 찍자.”
그 말에 다들 스마트폰을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세나는 나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우리 좀 찍어줘.”
어디를 가나 인증샷은 필수지.
난 원하는 만큼 찍어주었다.
“오빠도 찍어줄까?”
“됐어.”
나도 처음 왔을 때는 좀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중이다.
이동하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일찍 나가봐야 해서, 저녁은 그냥 호텔 뷔페로 먹기로 했다.
JR블랙우드 호텔 뷔페가 또 맛있기로 유명하지.
특히 유명한 건 디저트.
“여기 디저트 봐봐!”
“우와! 종류별로 다 있어.”
“뭐부터 먹지?”
“힝, 오늘은 진짜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넷이서 몰려다니는 걸 보면, 무슨 강아지들 뭉쳐 다니는 것 같다.
음식 뜨기도 귀찮아서 그냥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소진이가 슬쩍 접시를 내밀었다.
“이것 좀 드세요. 기다려서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 대게네.”
“예. 저쪽에 랍스터도 있어요.”
역시 고급 호텔 뷔페답다.
내가 대게 다리를 들고 어떻게 빼먹을지 몰라 헤매자, 소진이가 말했다.
“제가 발라드릴까요?”
“응?”
뭐라 하기도 전에 다리를 가져가 꼼꼼하게 게살을 발라 내 접시에 덜어주었다.
소진이는 살짝 화장을 한 상태였다. 입술에 바른 틴트가 반짝거렸다.
“드세요, 오빠.”
“고마워.”
마침 둘만 있으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면 번호 좀 알려줄래?”
소진이는 화들짝 놀랐다.
“예? 제, 제 번호요?”
“혹시 세나에게 무슨 일 생기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줬으면 해서.”
둘은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고, 늘 단짝처럼 붙어 다닌다.
밖에서는 나나 부모님보다도 더 세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아! 그래서…….”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번호 알려주기 좀 그러면, 내 번호 알려줄 테니 저장만 해놔.”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번호 찍어주시면 제가 바로 문자 보내놓을게요.”
우리는 서로 번호를 교환했다.
소진이는 웃으며 말했다.
“세나가 부럽네요. 이런 오빠가 있어서. 저희 오빠는 안 그런데.”
난 피식 웃었다.
“몰라서 그렇지, 너희 오빠도 여동생 걱정 많이 하고 있을걸.”
미우나 고우나 동생이니까.
“내일 디즈니랜드 너무 기대돼요. 오빠는 뭐부터 타고 싶어요?”
“어, 난 같이 안 가는데. 따로 일이 좀 있어서.”
“그, 그렇구나.”
소진이는 눈에 띄게 실망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며칠 동안 같이 있으면서 생각해본 결과, 얘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난 식사가 끝날 때쯤 얘기했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세나는 작은 입으로 열심히 먹으며 나에게 물었다.
“오빠는 같이 안 간다고?”
“응. 일이 있어서.”
“우리끼리 어떻게 가?”
“걱정 마. 전문 가이드 붙여줄 테니까.”
블랙우드 호텔에서는 VIP 고객을 위한 쇼핑 가이드와 여행 가이드도 제공한다.
이미 티켓을 예약하고, 가이드와 경호원을 부탁해 놓았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은 없지만, 다행히 소진이가 영어를 잘하니 별문제는 없을 거다.
“가서 재밌게 놀다 와.”
* * *
프레지덴셜룸은 세나와 친구들이 편하게 쓰라고 하고, 난 룸을 따로 잡았다. 그리고 이따 시드가 쓸 방도 미리 잡아놓았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왁자지껄하다가 조용해지니, 왠지 어색하군.
오랜만에 고독을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야.”
문을 열어보니 세나가 있었다.
그새 씻었는지 생얼에 반바지에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똥머리를 하고 있었다.
“왜 왔어?”
“오빠 혼자 심심할까 봐.”
세나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아, 좋다. 여기가 미국이라니. 오빠 덕에 미국도 다 와보네.”
“그렇게 좋아?”
“응. 오빠는 좋겠다. 맨날 미국 놀러 다니고.”
“일하러 온 거야, 일하러.”
기왕 둘만 있게 된 김에 난 며칠 전부터 궁금했던 걸 슬쩍 물어보았다.
“소진이 말이야.”
“응. 왜?”
“혹시 남자친구 있어?”
“없는데…….”
대답을 하던 세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냉소를 지었다.
“허얼, 뭐야? 지금 여동생의 친구를 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니 내가 되게 쓰레기 같다.”
“맞잖아. 어떻게 동생 같은 애한테 흑심을 품을 수 있어?”
“아니, 내가 흑심을 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소진이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 말에 세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오빠 미쳤어? 대체 왜 갑자기 그런 헛된 망상을 하는 거야?”
“망상이 아니라, 왠지 내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 같아서.”
“네. 도끼병 오지구요.”
“아까 이것저것 먹으라고 가져다준 거 못 봤어?”
“응. 나한테도 가져다줬어.”
“게살도 발라줬어.”
“그거야 오빠가 제대로 못 발라먹으니 그런 거지. 깻잎 잡아준 거라면 모를까, 게살 발라준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깻잎은 또 뭐야? 애인도 아닌데 그걸 왜 잡아줘?”
“내 말이. 아무튼 그거야 오빠가 밥 사주고 좋은 곳도 데려와 줬으니 고마워서 그런 거고. 그리고 소진이가 원래 주위 사람들 잘 챙기는 편이야. 나랑 밥 먹을 때도 수저 챙겨주고, 물 따라주고 그래.”
“그래?”
역시 나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우리 소진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같이 다니면 남자애들이 막 말 걸고 그래.”
“뭐…….”
인기가 없을 수 없겠지.
“분명히 말하는데, 소진이 혼낼 생각하지 마.”
“내가 왜 혼내?”
“고백해서 혼내주지 말라고. 그 고백하지 마.”
“아니…….”
고백할 생각도 없는데 얘는 자꾸 뭔 소리야?
“그리고 내가 친구라 잘 아는데, 소진이 좋아하는 사람 있어.”
“누군데?”
“최연우.”
“그게 누구야?”
세나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최연우를 모를 수 있어? 뮤키즈 몰라?”
“아…… 뮤키즈는 알지.
뮤키즈는 6인조 남자 아이돌.
한국 최고의 아이돌이자, 현재 K-팝 열풍을 이끄는 주역이다. 영어로 된 앨범을 발매한 적이 없음에도 한국보다 미국에서 인기가 더 많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빌보드 차트 순위에 들 정도다.
아이돌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알고 있을 정도면 말 다 했지.
“최연우에 비하면 오빠는…….”
“거기까지.”
친오빠를 아이돌과 비교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참고로 난 제논 좋아해.”
“그건 또 누구야?”
“뮤키즈 서브보컬. 미국 혼혈인데 엄청 잘생겼어. 나 나중에 제논 오빠랑 결혼할 거야.”
“…….”
걘 무슨 죄야?
아니, 나한테는 방금 고백해서 혼내주지 말라며?
“뭐, 어쨌거나 아니면 말고.”
괜한 오해를 할뻔했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적당한 키에 갈색 곱슬머리. 주근깨가 남아있는 얼굴.
다름 아닌 시드다.
“어서 와. 잘 도착했네.”
“네, 형.”
시드는 내 뒤에 있는 세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예요?”
“어! 이쪽은 한세나라고 내 여동생.”
세나도 나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시드라고 같이 일하는 동생이야.”
“아! 회사 직원인 모양이네.”
“비슷해.”
세나와 시드가 한 공간에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신기하다.
인류 최고의 지성과 바보의 역사적인 만남이다.
“헬로. 나이스투미츄.”
세나는 더할 나위 정직한 발음으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왠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드 같은 천재가 내 여동생을 만나서 바보가 옮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이건 인류 전체의 손실이다!
“자, 잠깐!”
말릴 새도 없이 시드는 세나의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헉!”
세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난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어, 바보가 옮을까 봐?”
그러자 세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풋! 뭐야? 이 사람 바보야?”
“…….”
원래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