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휴식 (5)
난 오랜만에 성윤아와 통화했다.
[휴가라……. 좋겠네요. 전 매일 출근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야근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힘내요.”
내가 같은 회사를 다녀 봐서 그 심정 잘 알지.
[바베이도스는 어때요?]
“테일러 회장 추천으로 왔는데, 좋네요.”
[거기 1박에 10만 달러라면서요?]
“윤아 씨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잖아요.”
[무리예요, 무리. 우리 집이 미루 씨처럼 돈이 많은 줄 알아요?]
하기야, 회삿돈 쓰는 거라면 모를까, 개인 돈으로 10만 달러는 재벌이라도 쉽게 쓰기 힘들지.
성윤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루 씨가 데려가 준다면 모를까.]
난 흔쾌히 말했다.
“원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앗! 정말요?]
“예.”
동우정밀 채권에 투자했을 때 그녀 덕분에 유재호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받았던 도움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많은 걸 해줘도 부족하다.
[거기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이제 슬슬 돌아가려구요.”
[흐음, 혹시 거기서 미녀들과 놀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난 농담처럼 말했다.
“뭐, 여자들이랑 놀고 있긴 하죠.”
[뭐라구요!?]
“…….”
장난치려고 한 말에 왜 이렇게 놀라?
난 재빨리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장난이에요. 혼자 있다고 하니, 여동생이 친구들이랑 함께 왔어요.”
[아! 그 귀여운 여동생.]
“귀엽긴요.”
[왜요? 전 그런 여동생 있었으면 끌어안고 살았을 것 같은데.]
막상 세나 같은 여동생이 생기면 이런 말 절대 못 할 텐데.
말을 하던 성윤아는 뭔가 놀란 듯했다.
[어!]
“왜 그래요?”
[친구들이랑 함께 온 거면…… 혹시 그 애도 같이 있어요?]
“그 애가 누구예요?”
[그때 홍대에서 미루 씨 여동생이랑 같이 있던 친구 말이에요. 정소진이었나?]
“아! 소진이요. 예. 같이 왔어요.”
[어, 어째서요?]
“예? 어째서라니. 그야 세나 베프니까?”
[그, 그렇긴 한데…… 아! 대학생이라면서요? 대학생이 학교는 안 가고 그렇게 놀러 다녀도 되는 거예요?]
“지금 방학 중인데.”
[…….]
* * *
성윤아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블랙우드 바베이도스 아일랜드는 세계 최대 호텔그룹인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이 심혈을 다 해 만든 최고급 리조트.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한 유명인들이 다녀갔고, 재벌들 사이에서도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 한미루가 혼자서 거기로 휴가를 간다는 얘기를 듣고,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회사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뭐, 설사 휴가를 낼 수 있다고 해도…….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단둘이 섬으로 여행 가는 건 좀 이상하잖아.’
그런데 설마 동생이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갔을 줄이야!
성윤아는 홍대에서 봤던 정소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자는 여자가 잘 안다고, 한눈에 그녀의 성격이 여성스럽고,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대학생 특유의 풋풋함과 싱그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 그 부분에 있어서 별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온 그녀조차도 놀랄 정도의 볼륨감.
게다가 그날 한미루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건 그냥 친구의 오빠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잠깐만. 휴양지면 수영복을 입을 거 아니야?’
이건 위험하다.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성윤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전혀 걱정할 것 없어.’
왜냐하면…….
그녀는 확신하듯 말했다.
“그 사람은 눈치가 없으니까.”
* * *
내가 LA를 가기로 마음먹은 건 프리즈너에 한번 들러야 하기 때문.
투자할 때 얼굴 보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찾아갔다. 슬슬 한번 가볼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다.
좀비네이도2가 OTT와 케이블 채널뿐 아니라, 극장 흥행에서도 성공한 덕분에 프리즈너는 ‘그냥 B급 영화사’에서 ‘돈 많은 B급 영화사’로 업그레이드 됐다.
이 여세를 몰아 현재 페르난도 산체스 감독은 좀비네이도3를 제작 중.
혼자 찾아가는 것보다는 시드를 데려가는 게 좋겠지?
애초에 내가 프리즈너를 인수한 건 시드 때문이니.
난 시드에게 전화했다.
[예, 형.]
“일하고 있어?”
[네. 블록 밸리 서비스를 위한 위해 서버 구축 중이에요.]
퍼플게임즈가 제작한 블록 밸리의 서비스가 얼마 안 남았다.
1회차 때 블록 밸리는 인디 게임으로 출시했다.
처음부터 멀티 플레이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대박이 터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초창기 몇 년 동안은 서버가 터지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서비스 전에 가능한 많은 서버를 확보해 달라고 주문했다.
단순히 용량을 확보하는 걸 넘어서 전세계 어디서든 접속이 원활하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개발자들은 아직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과도한 투자를 우려했지만, 난 다르다.
아예 퍼블리싱을 맡은 레전드게임즈에도 주요국 동시 출시와 함께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준비하라고 부탁해 놓았다.
“프리즈너에 갈 생각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갈래?”
[정말요? 저도 가도 돼요?]
“그럼. 산체스 감독도 좋아할 거야.”
그러자 시드는 바로 말했다.
[바쁘지만, 갈게요.]
“알았어. 그럼 내일 LA에서 봐.”
시드가 혼자 비행기 타는 게 왠지 불안해서, 캐시 볼로드 CFO에게 따로 연락해서 수행할 직원을 한 명 붙여 달라고 지시했다.
* * *
꿈같은 시간은 금방 지났다.
내일이면 다 같이 이 섬을 떠나야 한다.
통화를 하고 돌아와 보니, 조유경과 박세연이 울고 있었다.
난 놀라서 세나에게 물었다.
“니가 때렸어?”
“아, 뭐래?”
“그럼 왜 울어?”
조유경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흑흑, 여기를 떠나는 게 너무 슬퍼서요.”
박세연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힝, 저두요.”
하긴, 살면서 언제 이런 곳에 와 보겠는가?
애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소진이는 친구들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우리 나중에 돈 벌어서 꼭 여기 다시 오자.”
“응응.”
보기 좋은 모습이다.
1박에 10만 달러니, 지금부터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난 마음속으로 애들을 응원해주었다.
세나와 친구들은 다들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지?”
“그러게. 어제 온 것만 같은데.”
난 애들에게 물었다.
“난 일 때문에 LA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LA공항으로 가서 거기서 다른 전용기로 갈아탈래, 아니면 여기로 전용기 불러줄까?”
세나와 친구들이 타고 온 전용기는 공항 격납고에서 대기 중이지만, 내가 타고 온 전용기는 빌린 거라 이미 다른 곳으로 갔다.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굳이 그럴 것까지. 그냥 다 같이 타고 LA로 같이 가면 되지.”
다른 애들도 다들 동의했다.
“오케이. 그럼 같이 LA로 가자.”
세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러고 보니, LA에 디즈니랜드 있지 않아?”
“아마 있을걸.”
애너하임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게이머들에게는 디즈니랜드보다는 아이스스톰의 게임쇼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말에 세나는 바로 소리쳤다.
“오빠! 디즈니랜드 가자!”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예전부터 디즈니랜드 가고 싶다고 했잖아.”
“니가 언제부터 디즈니 만화를 좋아했다고?”
“뭔 소리야? 나 스타워즈 좋아하는데.”
“아, 그랬지.”
어렸을 때 여동생과 함께 스타워즈를 봤던 기억이 난다.
난 그냥 그랬던 것 같은데, 세나는 엄마한테 라이트 세이버를 사달라고 졸랐었지. 혹시 내 여동생이 커서 제다이가 되지는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파다완도 되지 못했다.
다크사이드에 물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특하다.
“오빠아아~ 디즈니랜드 가고 싶어~ 가고 싶단 말이야.”
“…….”
초등학생 시절 네버랜드 가고 싶다며 조르던 내 동생이 어느새 디즈니랜드 가자고 조르는 걸 보니, 다 컸다는 생각이 든다.
다 큰 애가 무슨 놀이공원이야?
“친구들은 일찍 돌아가 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러자 셋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빠. 저희 시간 많아요.”
“아, 그런데 유경이 넌 영어 스터디 있다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 미국 가는 게 영어 스터디지.”
난 애들에게 물었다.
“너희도 가고 싶어?”
그러자 셋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네에!!”
“…….”
누가 세나 친구들 아니랄까 봐 노는 것에는 한마음 한뜻이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디즈니랜드에서 놀다 가.”
“와아아아!”
다 같이 얼싸안고 방방 뛰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세나와 친구들은 바베이도스를 떠나는 걸 언제 아쉬워했냐는 듯, 디즈니랜드에서 뭐 하고 놀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환승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미국에 입국하려면 비자가 필요하다.
난 린지 패트릭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컨티뉴 캐피탈의 직원이자 데이비드의 개인비서다.
[예, 대표님.]
“내일 여동생과 친구들 해서 네 명을 미국으로 데려갈 건데, 비자가 필요해서요. 지금 여권 사진을 메일로 보냈으니, 즉시 신청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다 같이 전용기에 올라탔다.
난 찬찬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고, 좌석은 리클라이너 기능은 물론, 완전히 평평하게 눕힐 수도 있다.
벽에는 이착륙시에 펼쳐서 앉을 수 있도록 간이 좌석이 몇 개 더 배치되어 있다.
일반 항공기에 비하면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이 있어서 영화를 보거나 회의를 할 수도 있고.
애초에 업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 만큼, 위성 안테나를 통해 인터넷과 통화가 가능하다.
빌려서는 타봤지만, 내 전용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색다르다. 새 차를 뽑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세나는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전용기 타니까 엄청 편하다.”
가장 편한 건 굳이 비행기 스케줄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
돈은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은 게 차이 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적이다. 때문에 부자들은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려 이륙했다. 다들 창가에 붙어서 작아지는 섬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베이도스에서 LA까지는 몇 시간 안 걸린다.
세나는 나에게 물었다.
“이런 거 빌리는 데는 얼마나 들어? 엄청 비싸지?”
“빌린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산 건데.”
세나는 입을 쩍 벌렸다.
“뭐? 비행기를 샀다고?”
“응. 앞으로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설마 샀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다른 애들도 깜짝 놀랐다.
왠지 애들 앞에서 돈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보는 세나 친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전까지는 그냥 돈 많은 친구 오빠를 보는 눈이었다면, 이제는 친구의 ‘엄청’ 돈 많은 오빠를 보는 눈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세나는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
“오빠 나도 전용기 한 대만 사주면 안 돼?”
“뭐하게? 지하주차장에 파킹해놓고 학교 갈 때 타고 다니게?”
“그, 그럼 가끔 빌려 타는 건 안 될까?”
“응. 안 돼.”
세나는 삐진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와, 진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한테 너무한다.”
“여동생이 하나밖에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이런 애 둘 있었으면, 아무리 나라도 감당이 안 된다.
“됐어. 치사해서 안 타.”
“지금 내리게? 낙하산 줄까?”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전용기에는 낙하산이 구비돼어 있다.
소진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는 무슨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응?”
그 말에 세나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뭔가 수상해.”
“뭐가?”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회사원이었는데. 갑자기 때려치우더니, 이제는 이런 전용기도 사고. 혹시 나쁜 일 같은 건 하는 건 아니야?”
“나쁜 일이 뭔데?”
“막 까만돈을 받아서, 돈빨래를 한다든지.”
“……검은돈과 돈세탁 아닐까?”
까만돈을 왜 빨아?
“정말로 범죄 저지르는 거 아니지?”
“저지르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
“…….”
아, 그건 안 되지.
그런 얘기 들으시면 뒷목 잡고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참고로 범죄를 저지르기는커녕 모나앱으로 범죄자들을 열심히 낚는 중이다. 나만큼 국가 안보에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