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휴식 (4)
세나와 친구들은 오일 마사지를 받고는 다들 뻗어서 일찍 잠들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놀았으니, 지칠 만도 하지.
난 혼자 밖으로 나와 리조트 안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생각해보면 회귀한 뒤로는 뭔가에 쫓기듯이 움직였다. 덕분에 많은 걸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지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며칠 지내니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세나가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래서 휴식과 가족이 중요한 모양이다.
증권사에서 일했을 때는 휴가를 가더라도 왠지 불안했었는데.
내가 없으면 업무가 안 돌아갈까 봐 걱정이었고, 내가 없어도 업무가 너무 잘 돌아갈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대표이자 오너인 만큼,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난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잘한 건 역시나 스노우 크래시 인수에 성공한 것.
다른 투자의 수익을 다 합쳐도 스노우 크래시 하나만 못하다.
모든 비즈니스의 중심에는 클라우드가 있다. 그 회사를 얻음으로써 미래로 가는 가장 중요한 키를 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도 바쁠 예정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통령 선거가 있고, 여러 사건사고가 벌어지니까. 그중 몇 개는 내가 직접 일으킬 생각이고.
클라우드 시장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서 메타버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조금씩 미래가 바뀐 만큼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나로 인해 인생이 바뀐 사람도 한둘이 아니겠구나. 나 때문에 망한 사람도 많은 만큼, 잘되는 사람도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한 남자가 해변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수염을 기른 백인이다.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쯤 됐으려나?
그냥 지나치려는데,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난 그에게 슬쩍 다가갔다.
“다리안 헤럴슨 씨 맞죠?”
다리안 헤럴슨.
10대에 아역으로 할리우드에 데뷔해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 영화배우다.
30대까지는 꽃미남으로 유명했고, 중년에 접어든 이후에는 중후한 매력과 연기력을 뽐냈다. 할리우드 남자 배우를 꼽아보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배우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 전체가 새빨갛고, 눈은 살짝 풀려있다.
“누군가 했더니, 팔자 좋게 여자 네 명 끼고 놀고 있던 남자로군.”
“…….”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으려나?
“아! 오해하지 마세요. 여동생과 친구들이니까요.”
“관심 없으니, 이만 가보쇼.”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얼른 꺼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솔직히 좀 당황했다.
팬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한 사람 아니었나?
그 순간, 난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회귀를 하는 바람에 깜빡했는데, 그는 원래 성격이 까칠하기로 유명했다.
동료 배우나 감독과도 부딪치는 일이 많았고, 면전에 대고 욕을 하거나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성격과 알코올 중독 문제 때문에 이혼도 두 번이나 했다.
하지만 어떠한 일을 계기로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계기는 바로 두 번째 아내와의 소송전.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애니타 버몬트라는 신인배우였다.
하지만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여자 쪽에서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그는 애니타에게 1천만 달러의 위자료를 주고 이혼에 합의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그 이후에 생겨났다.
합의서에 따르면 두 사람 다 결혼생활 중 있었던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키고, 더 이상 서로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애니타가 이 합의를 깨트리고, 다리안 헤럴슨이 자신을 수차례 폭행하고 위협을 가했다는 식으로 언론에 인터뷰를 한 것이다.
할리우드가 독특한 게 마약을 하거나 불륜을 저질러도 멀쩡히 잘 활동하는 반면, 가정폭력범은 거의 인간쓰레기 취급받는다.
그는 애니타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애니타 역시 그에게 맞소송을 걸었다.
사태가 커지며 그가 출연하기로 예정됐던 영화는 전부 취소됐다. 그중에는 시리즈물의 후속작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딱 이 시기쯤 전 와이프와 소송전을 벌이고 있겠구나.
그래서 사람들 눈을 피해 혼자 여기에 온 건가?
웬만하면 그냥 모른 척 지나가겠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난 그의 팬이니까.
난 가라는 손짓을 못 본 척하며 그에게 말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진 찍자는 거라면…….”
“절대 전 아내랑 합의하지 마세요. 합의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마세요.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소송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전 아내와의 소송은 무려 4년을 끌고, 그동안 그는 작품 활동이 완전히 끊긴다. 그 이후 화려하게 재기하긴 했지만, 날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
난 계속해서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지금 자신을 가정폭력 피해자로 대중에게 이미지 메이킹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1천만 달러 위자료에 이어서 또 돈을 받고 합의하면 이미지가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 합의를 거절하고, 오히려 당신이 폭행을 했기 때문에 돈을 제시했다는 식으로 몰아갈 겁니다.”
애니타는 그가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거나 욕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직접 폭행을 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사건은 원래 직접 증거보다는 정황증거와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평소에도 알코올 중독과 폭력 문제가 있었던 만큼, 현재 여론은 확실히 불리했다.
설사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어차피 여론전에서 지면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끝장이다.
때문에 그는 하루빨리 소송을 마무리하기 위해 거액의 합의금을 제시했지만…… 애니타는 이를 오히려 이를 언론에 알려 소송에 활용했다.
그로 인해 소송은 그에게 더욱 불리해지고 길어졌다.
전문가들 말에 따르면 차라리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했다면 1년 안에 소송이 끝났을 거라고 한다.
“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팬입니다.”
* * *
다리안 헤럴슨은 눈앞에 서 있는 동양인 청년을 보았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합의를 안 하면? 이 소송에서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째서?”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아내를 때린 적이 없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지?”
“때렸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술 취해서 난동을 피우고 집안을 부순 건 사실이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적은 없었어.”
“그럼 제 말이 맞잖아요.”
“하지만 설사 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생각보다 당신의 편이 많을 테니까.”
“내 편이 있을 거라고?”
“예. 당신은 최고의 배우니까요.”
그는 모르지만, 청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들 부부와 관련된 영화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대에 섰다. 그중에는 그와 싸웠거나 사이가 안 좋았던, 감독과 스텝, 배우들도 여럿 있었다.
다리안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 모두는 그의 편에 섰다. 심지어는 아내 측에서 요청한 증인조차 다리안이 애니타를 때린 걸 못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끝까지 싸우세요.”
“뭘 위해서?”
“저를 위해서요.”
그 말에 다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보았다.
청년을 계속해서 말했다.
“어렸을 때 봤던 영화들을 아직도 기억해요. 더글라스 형사는 온갖 사건을 해결하고, 나쁜 놈들을 잡아넣었죠. 그리고 맥케인은 유쾌한 사기꾼이었고, 레이는…… 음, 그냥 미친놈이었죠.”
다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대로 끝나면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당신을 그저 여자나 때린 가정폭력범으로 기억할 겁니다. 그래도 좋아요?”
“…….”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애니타의 폭로 이후.
타블로이드들은 그동안 그가 저질렀던 사건 사고들을 끄집어내서 그를 가정폭력범으로 몰아갔다.
이는 주류 언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라고 해명문을 내고 변명을 해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이런 사건은 피해자의 증언이 우선시 된다. 아직 재판은 제대로 시작도 안 했지만, 그는 아내를 폭행한 쓰레기로 낙인찍혔다.
이곳에 온 것도 휴가가 아니라, 대중의 시선을 피해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도망쳐 온 곳에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이번 기회에 술도 좀 끊으시는 게 어때요? 법정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가야죠.”
그 말에 다리안은 술병을 입에 데려다가 멈칫했다.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팬 앞에서 계속 추태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남은 술을 버렸다.
“당신 이름은?”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시간 괜찮으면 나랑 얘기 좀 하겠나?”
“여기서는 남는 게 시간이죠.”
다리안은 그와 앉아 술 대신 물과 콜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이 재밌게 본 영화를 말해주었고, 다리안은 그 영화를 찍을 때 있었던 각종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임에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느껴졌다.
“여기에는 언제까지 계실 거예요?”
“오늘 떠날 거야.”
“어! 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원래는 좀 오래 있을 생각이었는데, 네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돌아가서 재판을 준비해야지. 가자마자 변호사부터 잘라야겠군.”
그 이유는 지금 고용한 변호사가 합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
합의만이 최선이라나 뭐라나?
한미루는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새로운 변호사는 여자로 고용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어째서?”
“애니타는 법정에서도 남자에게 공격당하는 포지션을 유지하려 할 테니까요. 그러니 여자를 통해 공격하는 편이 효과적일 겁니다.”
“하하…….”
귀중한 조언이다.
다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있는 여자 변호사를 찾아봐야겠군.”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처를 알려줘. 나중에 새로 영화를 찍게 되면, 시사회에 널 가장 먼저 초청할 테니.”
“기대할게요.”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리안은 걸어가는 한미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뭐하는 사람인지도 안 물어봤군.’
이런 곳에 올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재판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다.
* * *
매우 신기한 경함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만나, 몇 시간 동안이나 얘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오기를 잘했다.
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호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휴가는 잘 즐기고 있어? 거기 엄청 좋다던데.]
“좋아요. 나중에 꼭 와보세요.”
직접 와보니 어째서 블랙우드가 이런 외진 곳에 초고가 리조트를 지었는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자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프라이버시 때문이다. 유명인들은 항상 주위의 시선에 시달리기 마련.
그러니 휴가 때만이라도 남들의 시선을 피해 여유를 즐기고 싶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개인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된다. 애초에 아무나 올 수가 없는 곳이니까.
1박에 무려 10만 달러지만, 돈을 낸다고 아무나 예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블랙우드 호텔의 등급이 되거나, 처음 이용하는 고객이면 추천인이 있어야 한다.
[오! 나중에 나도 한번 가봐야겠네.]
“같이 갈 애인은 있구요?”
[지금부터 노력해야지.]
난 자랑하듯 말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요?”
[무슨 일?]
“여기서 다리안 헤럴슨을 만났어요.”
역시나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뭐? 진짜?]
“예.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지금 전 와이프 폭행한 걸로 재판 중 아닌가?]
“에이, 그런 건 다 루머예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사인은 받았어?]
“아…….”
깜빡했다.
뭐, 다음에 받으면 되겠지.
[그보다 지난번에 얘기한 거 기억하지?]
“뭐요?”
[이번에 LA에서 최대 규모로 K-팝 페스티벌이 열리거든.]
“아! 그게 왜요?”
[여기에 루나틴즈도 가거든. 요즘 미국에서 루나틴즈 인기가 장난 아닌 모양이야.]
과거에는 한국 아이돌이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신인가수로 재데뷔하듯 밑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페이스노트, 린스타그램, 에이튜브, 넷플레이 등등.
SNS와 스트리밍 서비스의 발달 덕분에 이제는 좁은 방구석에서도 인터넷만 있으면 전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온갖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루나틴즈는 그동안 린스타그램과 에이튜브에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올렸고, 알게 모르게 미국에서 팬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이번 ‘LA K-팝 페스티벌’에서 그 포텐이 제대로 터져, 글로벌 원탑 여자 아이돌로 우뚝 선다.
[그래서 나도 가기로 했어.]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선배가 왜 와요?”
동호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사사로운 팬심 때문이 아니라, 투자자로서 공연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새로 투자할 만한 곳이 있는지 물색도 해야 하고.]
“…….”
누가 봐도 사사로운 팬심 같지 않나?
“부지사장은요?”
[걔는 회사를 지켜야지.]
“K-팝 페스티벌인데 초청 안 받았어요?”
[잘 모르나 본데, 걔는 내수용이야.]
“…….”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K-팝 열풍은 아이돌 중심. 아무래도 발라드 가수는 좀 소외되기 마련이지. 이제 와서 아이돌로 데뷔하기는 늦었겠지.
[아! 이번에 지유도 오고, 진세연도 온다는데.]
“왜요?”
[지유야 가수로 참석하고, 세연이도 방송 때문에 오겠지.]
“둘 다 잘나가네요.”
[잘나가지. 그나저나 너도 올 거지?]
“제가요?”
[와서 보면 좋잖아.]
생각해보니, 어차피 LA를 가봐야 하긴 한다.
“한번 생각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