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휴식 (3)
난 세나와 함께 해변을 걸었다.
세나는 돌핀팬츠에 커다란 티셔츠, 그리고 쪼리를 신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는 동그랗게 말아서 위로 올려 묶었다. 일명 똥머리다.
세나는 손으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직도 배불러.”
“그러게 적당히 먹으라니까.”
“남기면 미안하잖아.”
“애초에 적게 시키면 되지 않았을까?”
“내 친구들 먹는 거 봤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하긴.”
애들 먹는 걸 보니, 1박 30만 달러가 아깝지 않았다.
“와! 하늘 예쁘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별들이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고 있었다.
“별 엄청 많아. 아! 저 별 움직이는데.”
난 슬쩍 본 다음 말했다.
“저건 별이 아니라, 저궤도 인공위성 같은데.”
“……분위기 깨는 말 하지 말아 줄래?”
그래. 별이든 위성이든 뭐가 중요하나?
반짝이기만 하면 되지.
세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나 어렸을 때 가족끼리 바다에 놀러갔던 때 생각난다. 어디였더라? 속초였나?”
“아마 강릉이었을걸. 그래도 그걸 기억하네.”
“그럼. 나 잃어버린 줄 알고 오빠가 엄청 찾으러 다니지 않았었나?”
“그, 그런 일이 있었나?”
“응. 엄마가 그랬는데 울면서 찾아다녔다고 했어.”
“에이, 설마…….”
기억 안 나는 척했지만, 사실은 똑똑히 기억난다.
세나를 데리고 둘이 해변으로 나갔는데, 애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혹시 물에 빠졌나, 이상한 놈들에게 납치됐나 해서 미친 듯이 찾으러 돌아다녔다.
결국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가 울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작 돌아와서 자고 있었다.
그때 얘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가?
그 꼬맹이가 어느새 다 컸다.
다 커도 160이 안 되긴 하지만.
“히힛! 오빠 덕분에 친구들이랑 이런 곳도 와보네. 친구들이 나 엄청 부러워하는 거 알아?”
난 피식 웃었다.
“뭘 이 정도로.”
어차피 숙소를 같이 쓰니, 전용기 태운 거 빼면 따로 돈 나갈 것도 없다.
여동생이 으쓱하는 걸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집에도 잘 가지 않았고, 세나와도 소원해졌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보긴 했지만,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 만큼, 이번에는 정말 잘해줘야지.
“엣취!”
“춥지? 이만 들어가자.”
* * *
한미루와 한세나가 산책을 나간 사이.
정소진, 박세연, 조유경은 한 방에 모였다. 침대는 셋이 누워도 남을 만큼 컸고, 창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조유경이 말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박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영화에서나 보던 곳을 실제로 오게 될 줄이야.”
“세나 오빠 너무 멋있지 않아?”
“아까 걸어오는데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어.”
“어!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야 햇빛을 등지고 걸어왔기 때문이지만…….
정소진은 자신의 오빠를 떠올렸다.
집에서 철없이 게임만 하는 오빠를 보다가 세나의 오빠를 보니, 진짜 어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조유경이 물었다.
“소진이 넌 예전에도 봤다고 했지?”
“응. 세나네 집에 놀러가면 가끔 공부 봐주고 그랬어.”
그때는 그냥 친구 오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맞다. 세나네 오빠, 공부도 엄청 잘한다고 했지?”
“응. 미루 오빠, 한국대 경제학과 나왔어.”
“세나는 좋겠다. 저런 멋진 오빠도 있고.”
“우리 오빠가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그런데 여자친구는 있을까?”
“당연히 있지 않겠어? 혹시 금발 미녀랑 사귀고 있을 수도 있어.”
“힝, 그렇겠지?”
정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세나가 없다고 했잖아.”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
“맞아. 동생 몰래 사귀고 있을 수도 있지.”
“혹시 미국에서 금발 미녀랑 만나는 게 아닐까?”
그 말에 정소진은 울상을 지었다.
* * *
휴양지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다.
특히 카리브해는 물이 깨끗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를 나가지 않는 건 큰 손해다.
리조트에서는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패러세일링, 바나나보트, 제트스키 등 온갖 해양 스포츠를 제공했다.
이건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요트를 빌려 바다로 나갔다. 뒤쪽에 모터보트와 제트스키가 수납된 3층 구조의 대형요트다.
하루 렌트비는 3만 달러.
직원들 인건비와 각종 레저 비용이 포함된 점을 감안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심지어는 비상시를 대비해 간호사와 전문 사진사도 탑승했다.
세나는 소리를 내질렀다.
“우와! 엄청 커!”
소진이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저, 이런 거 처음 타 봐요.”
세나는 나에게 물었다.
“오빠는 이런 거 많이 타 봤지?”
“그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다른 애들이 먼저 말했다.
“당연히 많이 타 봤겠지.”
“그쵸, 오빠?”
“…….”
아니야, 얘들아. 나도 오늘 처음 타보는 거야.
하지만 애들 앞에서는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하는 법.
난 어른이니까. 그것이 어른이니까…….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요트에 올라탔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선장은 나에게 말했다.
“지배인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난 직원들과도 일일이 인사했다.
내부에는 침실과 욕실이 구비되어 있고, 갑판에는 온수가 나오는 풀이 있어서 추울 때 몸을 덥힐 수 있었다.
실내를 둘러 보니 왜 부자들이 요트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다.
요트는 30분가량 이동해 바다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우와아!”
“와아아!”
사방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여기가 카리브해구나.
한때 해적들이 악명을 떨치던 바다가 몇 세기가 흐른 지금 최고급 휴양지가 됐다.
직원들은 모터보트를 바다로 내렸다.
“다들 구명조끼 잘 맸지?”
“네!”
세나와 친구들은 모터보트에 매달린 바나나보트를 타고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다들 바다에 내동댕이쳐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다들 물에 빠져서도 깔깔거렸다.
이어서 패러세일링도 했다.
모터보트에 낙하산을 매달고 달려서 하늘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바람이 세면 못 한다는데, 다행히 날씨가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난 세나와 함께 탔다.
“이거 무서운 거 아니야?”
“안 무서워.”
이건 그래도 예전에 놀러 가서 타봤다.
모터보트가 빠르게 달리자 낙하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올랐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에 세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전 예뻐! 저기 다른 섬 보인다!”
우리가 노는 사이 직원들은 요트 최상층에 풍선 미끄럼틀을 설치했다. 여기에 물을 흘려보내면 워터슬라이드가 되는 것이다.
지치지도 않는지 세나와 친구들은 몇 번이고 미끄럼틀을 타고 바다에 뛰어내렸다.
“오빠는 왜 보고만 있어?”
“응. 너 실컷 타.”
“뭔 소리야? 오빠도 타야지. 얘들아! 우리 오빠 잡아!”
“와아아!”
“자, 잠깐!”
점심은 배 위에서 먹었다.
직원들은 익숙한 솜씨로 그릴에 고기와 함께 새우와 조개, 그리고 손질한 생선을 구워 주었다.
실컷 놀았기 때문인지 다들 잘 먹었다.
해양 스포츠의 백미는 역시 스쿠버다이빙.
여기서는 난파선과 바다거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스쿠버다이빙 할 줄 아는 사람?”
정소진이 손을 들었다.
“저 어드밴스드예요.”
“오! 진짜?”
“예. 아버지가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하셔서요.”
참고로 난 오픈워터다.
대학생 때 선우랑 세부에 놀러가서 땄다.
우리는 장비를 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스쿠버다이빙을 할 줄 아는 나와 소진이는 알아서 다이버를 따라다녔고, 못하는 애들은 다이버들이 바닷속에서 양손으로 붙잡고 데리고 다녔다.
바다는 바닥이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난파선은 이미 물고기집이 된 지 오래.
주변에는 산호초와 다양한 물고기들이 있고,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바다거북이도 보였다.
한 다이버가 간식을 꺼내 들자 거북이들이 몰려들었다. 세나와 친구들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다른 다이버는 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실컷 놀고 해가 질 때쯤에야 요트는 다시 리조트로 돌아갔다.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며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난간에 기대 수면으로 미치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소진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소진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래도 여기 엄청 비싸잖아요.”
“부담 가질 것 없어. 숙소야 어차피 같이 쓰는 건데.”
“전용기도 태워주셨잖아요.”
“그거야 한 명이 타나 여러 명이 타나 똑같잖아. 오히려 세나와 함께 와줘서 내가 고맙지. 다들 오지 않았으면 나 혼자 리조트에서 심심하게 있었을 테니.”
“정말요?”
“응. 덕분에 이렇게 요트를 빌려서 바다에도 나오고, 즐겁게 놀았네.”
소진이는 프릴이 달린 모노키니에 비치타월을 둘렀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는 아직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얼굴은 동글동글하니 귀여운데, 몸매가 예사롭지 않다. 키는 세나와 비슷하지만, 유아체형인 세나와는 완전히 반대다.
이 얼굴에 이 몸매가 말이 되나?
중학생 때는 세나랑 큰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둘 사이에 결코 좁힐 수 없는 이런 격차를 만들어낸 거지?
난 시선이 괜히 그쪽(?)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공부는 잘하고 있어?”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리 세나도 공부 좀 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세나 혹시 남자친구 있는 건 아니지?”
“예. 없어요.”
만약 있으면 어떤 놈인지 얼굴 한번 보려고 했는데.
소진이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 저도 남자친구 없어요.”
“그래? 인기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얼굴도 얼굴이지만, 이 몸매면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경영학과면 남자도 많아서 들이대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을까?
소진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인기 별로 없어요. 공부도 해야 하고.”
“아주 좋은 자세야.”
매우 바람직하고 기특하다.
대학생이면 공부해야지, 연애가 웬 말인가?
“호, 혹시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
“정말요?”
“응. 없으니 이 좋은 휴양지에 혼자 왔지.”
여자사람친구는 몇 명 있지만, 아직 여자친구는 없다.
어째서인지 소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 다행이에요!”
“……응?”
뭐가 다행이야?
잠시 후, 요트는 리조트와 연결된 선착장에 도착했다.
난 선장과 직원들에게 두둑이 팁을 주었다.
* * *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나와는 달리, 세나와 친구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저녁을 먹고 수영장에서 놀았다.
정말이지 다들 체력이 넘치는구나.
난 썬베드에 누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서로 장난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하루 종일 놀았음에도 지치지도 않은 모습이다.
무슨 강아지들 뛰어노는 것 같기도 하고.
세나는 내 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다.”
“재밌어?”
“응응. 너무 재밌어. 이게까지 가본 곳 중 여기가 제일 재밌는 것 같아.”
“다행이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부른 보람이 있다.
“고마워, 오빠.”
“응?”
“애들이 다 고맙대. 딱히 해줄 건 없어서 다 같이 감사 편지를 쓸까 생각 중이야.”
“응. 그런 거 하지 마. 누가 쓰려고 하면 꼭 말리고.”
“알았어. 난 뭐 오빠 도와줄 거 없나?”
“…….”
순간, 좀 놀랐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하다니.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응? 내가 뭘 했다고?”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잘해드리는 게 도와주는 거야. 덕분에 내가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가족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혼자서 그 돈 끌어안고 죽을 것도 아니고.
돈 벌어서 가족들 호강시켜주는 거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지.
1회차 때는 부모님 속만 썩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지난 생에서 못했던 효도도 실컷 할 생각이다.
돈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효도가 돈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다행히 부모님 옆에 세나가 있어서 안심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하면서도 내내 신경이 쓰였을 테니까.
“진짜?”
“응. 오빠를 대신해 부모님께 잘해드려. 생일과 기념일도 잘 챙겨드리고,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바로바로 연락하고.”
세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힛! 알았어. 걱정 마, 오빠.”
왠지 내 여동생이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응?”
세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용돈 좀 올려주면 안 돼? 요즘 기름값도 많이 올랐단 말이야.”
“…….”
아무래도 내가 잠깐 미쳤나 보다.
정신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