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휴식 (1)
금융위기 이후 자산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슈퍼리치가 크게 늘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을 겨냥한 초고가 비즈니스 역시 활발하게 이뤄졌다. 주택, 시계, 자동차 할 것 없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비쌀수록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는 여행 역시 마찬가지.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은 100년 넘게 부유층을 상대로 영업을 해온 만큼 부자들의 니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떠다니는 호텔이나 다름없는 초호화 크루즈 여행이나, 전용기를 타고 전세계를 둘러보는 ‘제트 프라이빗 투어’ 등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휴식과 힐링 역시 중요한 여행의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블랙우드는 슈퍼리치들을 위한 리조트 건설에 앞장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자연이다. 입지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교통보다는 자연을 우선시했다.
어차피 여기를 이용할 고객들은 전용기를 타고 다니니, 항공편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최근에 카리브해 끝에 위치한 바베이도스에 초호화 리조트 ‘블랙우드 바베이도스 아일랜드’를 개장했다.
객실은 딱 60개뿐.
추가 비용 없이 모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올 인클루시브 형태로 가장 싼 객실이 1박에 10만 달러부터 시작하는데, 그마저도 2박부터 예약을 받는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과 일체화된 공간.
어느 객실에서든 창문만 열면 새하얀 해변과 푸른 바다가 보인다. 마치 자연을 안으로 들인 것 같은 형태다.
개장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는데, 할리우드 커플들이 다녀가며 더욱 유명해졌다. 얼마 전에는 여행 업체가 뽑은 가장 아름다운 리조트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난 혼자서 이곳에 왔다.
중년의 지배인은 직접 나와 나를 맞이했다.
“회장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리조트를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계신 동안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배인이 안내해준 객실로 들어가 보니,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곳이다.
방만 3개에 욕실도 3개.
창문을 열어놓으니 푸른 바다와 하늘이 보였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인터폰으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혼자 오면 심심할 것 같아서 선우와 시드를 꼬셔보았지만, 둘 다 바쁘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왔다.
가끔은 혼자서 고독을 즐길 필요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휴가를 간 게 언제였더라?
일단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다. 회귀하자마자 일하고 투자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그리고 1회차 때는 열심히 치킨 튀기느라 정신없었다.
난 테라스로 나가 썬베드에 앉아 드넓은 백사장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씨만 봐도 환상적이다. 괜히 사람들이 비싼 돈 내고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구나.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막상 오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쉴 땐 쉬어야지.”
* * *
한세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정소진, 조유경, 그리고 박예진.
정소진과는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고, 조유경과 박예진은 중학생 때 만나 친해졌다. 그녀들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주 모여 밥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세나는 좋겠다. 오빠가 차도 사주고.”
“진짜.”
“너무 부럽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오빠가 없는 조유경이 말했다.
“나도 오빠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자 정소진과 박예진은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마. 세상 모든 오빠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니까. 우리 오빠는 웬수나 다름없어.”
“맞아. 우리 오빠는 용돈 주기는커녕 나한테 빌려 간 돈도 안 갚고 있는데.”
한세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한미루가 딱 그랬지.’
그랬던 오빠가 달라졌다!
‘내가 살면서 우리 오빠를 자랑스러워하게 될 줄이야.’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걸 보니,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그런데 너희 오빠는 어떻게 돈을 번 거야?”
“글쎄.”
“혹시 코인 같은 거 해서 엄청 번 거 아니야?”
“코인?”
“지난번에 PD추적 보니까, 몇백만 원 투자해서 수백억 번 사람도 있다던데.”
들어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코인 열풍은 대학교에도 번졌다. 수업 중에도 하루 종일 코인 거래소만 들여다보고 있는 애들도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근데 요즘 코인이 엄청 떨어졌어. 우리 작은오빠도 코인 하다가 말아먹었잖아.”
“진짜?”
“응. 무슨 타이탄인가 하는 코인 샀다가 0원 됐대. 그 때문에 다 날려 먹고 빚까지 졌어. 아빠가 오기만 하면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겠다고 해서 지금 친구 집에 피신해 있는 중이야.”
“그, 그래?”
‘우리 오빠는 괜찮겠지?’
다행히 집안이 조용한 걸 보면 별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조유경이 정소진에게 물었다.
“넌 세나 오빠 봤지?”
정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루 오빠 완전 멋있어.”
“진짜?”
“여자친구는 있대?”
한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없을걸.”
정소진은 그날 만났던 한미루와 옆에 있던 여성을 떠올렸다.
“그날 엄청 예쁜 언니랑 같이 있었잖아.”
“오빠한테 물어보니 그냥 직장 동기래.”
“그, 그래?”
“응. 분명히 그랬어.”
그 말에 정소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평소처럼 한참 잡담을 나눈 뒤, 드디어 본론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갈 거야?”
오늘 만난 이유는 여행 계획을 짜기 위함.
이틀 후에 출발 예정인데, 아직 목적지도 못 정했다.
“강릉 어때? 거기 카페 거리 좋다던데.”
“여수는? 거기 포차 유명하잖아.”
“전주 한옥마을 가볼까?”
“그런데 우리 뭐 타고 가?”
“세나 차 타고 가면 되잖아.”
“미니에 네 명이 탈 수 있어?”
“우리 타잖아.”
“아니, 타기야 타겠지만 짐은 어디에 실어?”
“어, 그러게.”
한세나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버지 차 빌리면 될 것 같은데.”
벤츠 S클래스 마이바흐면 네 명에 짐까지 실어도 충분하다.
“그럼 아버지는 뭐 타고 출근하셔?”
“내 미니?”
“…….”
조유경이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아! 해외여행 가고 싶다.”
그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양지가 최고지. 새하얀 백사장, 푸른 바다. 최고급 리조트.”
“그러게. 요즘같이 추울 때 보라카이나 세부 같은 데 가면 좋을 텐데.”
“돈만 있으면 해외여행 가는 건데.”
“그런데 돈이 없잖아.”
“우린 안 되겠지?”
박예진이 물었다.
“세나 너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아?”
“응?”
“너네 집 이제 부자잖아.”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세나네는 부자지.”
“그, 그런가?”
한세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차는 국산 중형차에서 벤츠 S클래스로 바뀌었고, 집은 펜트하우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기사도 생기고, 일하는 아주머니도 생겼다.
아버지 회사도 잘되는 것 같고, 오빠는 엄청 큰돈을 번 것 같다.
이 정도면 재벌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충분히 부자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다만 그동안 용돈이 별로 오르지 않아 체감을 못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 용돈은 왜 그대로야?’
문득 다른 게 다 올라도 월급은 안 오르는 직장인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한국에 있으면 용돈이라도 달라고 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미국으로 간 뒤 감감무소식이다.
그 순간,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오빠 찬스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한세나는 슬쩍 말했다.
“우리 오빠한테 한번 물어볼까?”
“응?”
“지난번에 보니까 막 호텔 쪽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 같던데. 잘하면 비행기표나 숙소 같은 것도 싸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래?”
그 말에 친구들은 일제히 기대를 나타냈다.
한세나는 오랜만에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리조트에서의 한가한 일상이 이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보통 증시와 뉴스부터 체크했는데, 이곳에 온 뒤로는 일부러 핸드폰도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째가 되자 슬슬 심심해졌다.
원래는 한 열흘 있을 생각으로 왔는데, 슬슬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역시 난 차가운 도시의 남자인가?
아르누보 양식보다는 아르데코 양식이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인가?
그래도 기왕 휴가를 왔으니, 일주일은 버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했나 해서 봤더니 여동생이다.
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잉~ 오빠앙~.]
“…….”
뭐지, 이 다정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는?
괜히 기분이 불쾌해졌다.
“끊는다.”
[앗! 끊지 마.]
먹히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걸 보면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인데?”
[요즘 코인 많이 떨어졌다는데 오빠는 괜찮은 거야?]
“갑자기 뭔 소리야?”
[예진이네 작은오빠는 타이탄인가 투자했다가 다 날려서 집에서 쫓겨났대.]
“아…… 하필 타이탄을?”
그럼 집에서 쫓겨날 만하지. 호적에서 안 파인 것만 해도 다행 아닐까?
[혹시 오빠는 코인 투자 같은 거 안 했지?]
“뭐…….”
투자를 하긴 했지.
내가 폭락시킨 쪽이지만.
[오빠 아직도 미국이야?]
“아니.”
[그럼?]
“지금 휴가 중이야.”
[뭐? 휴가? 왜 난 안 데려가?]
“넌 매일이 휴가 아니니?”
난 내 여동생이 공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휴가 어디로 갔어?]
“바베이도스.”
[거기가 어디야?]
“카리브해 쪽이야.”
[앗! 진짜? 나도 카리브해 가고 싶어! 카리브해!]
“너 카리브해가 어디인지 아니?”
[그럼. 내가 카리브베이를 한두 번 가본 줄 알아? 거기 파도풀 쩔어.]
“…….”
응. 니 풀(Fool)이 더 쩔어.
카리브베이는 유성그룹에서 운영하는 워터파크.
뭐, 거기나 여기나 물이 있다는 건 똑같지.
[거기서 뭐해?]
“그냥 리조트에 있지.”
[리조트 이름이 뭐야?]
“블랙우드 바베이도스 아일랜드.”
[우와! 듣기만 해도 좋아 보인다. 나도 갈래. 나도 가면 안 돼?]
“니가 왜 와?”
[오빠는 맨날 공부만 하는 여동생이 불쌍하지도 않아?]
“…….”
다시 말하지만, 난 내 여동생이 공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너 학교는 안 가니?”
[뭔 소리야? 지금 방학 중인데.]
“아…….”
방학이었구나.
어차피 공부를 안 하니, 학기 중과 방학 중의 차이가 있나 모르겠다만.
“그런데 여기 와도 별로 할 건 없어. 혼자 오면 심심할 텐데.”
[그럼 나 친구들 데려가도 돼?]
“몇 명?”
[소진이랑 해서 총 네 명.]
그래. 공부가 뭐가 중요하겠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중요하지.
“뭐, 그러든지.”
[오예! 뭐 챙기면 돼?]
“여권하고 입을 옷만 챙겨. 수영복이랑.”
[오호! 그렇게 수영복 입은 동생 모습이 보고 싶어? 좋아. 오빠를 위해 스페셜 비키니를 입어줄 테니 기대해.]
“……좋은 말로 할 때 래시가드 입자.”
[아, 왜에?]
“비키니 입을 거면 카리브베이나 가.”
[아! 다행히 오빠를 위해 래시가드도 사놓았어. 근데 거기 가려면 비행기 타고 가야 하나?]
“그럼 걸어오게?”
당연하게도 바베이도스까지 오는 직항편은 없다.
내 여동생이라면 환승장에서 헤매다가 국제미아가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아니, 그러고도 남는다.
“비행기 보내줄 테니까 그거 타고 와.”
* * *
한세나는 전화를 끊었다.
친구들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오빠 지금 휴양지에 있대.”
“그래서?”
한세나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도 가자! 언니가 쏜다!”
그 말에 친구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오오!”
“언니 너무 멋있어요.”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바베이도스라는데. 카리브해에 있대.”
“응?”
대체 어딘가 해서 다들 구블맵을 켜서 확인해보았다.
“어! 혹시 여기 아니야?”
“여기라고?”
한세나는 당황했다.
휴양지라기에 적당히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곳을 생각했는데,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라가 있었어?’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리조트 이름은 뭐야?”
“블랙우드 뭐였는데.”
“설마 이거야? 블랙우드 바베이도스 아일랜드?”
“아, 맞아. 그거.”
“여기 1박에 10만 달러라는데.”
“……응?”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깐. 여기를 가자고?”
“진짜?”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가?”
“오빠가 비행기 보내준대.”
그 말에 다들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비행기를 어떻게 보내줘?”
“그, 글쎄.”
정소진이 물었다.
“혹시 전용기 같은 거 보내준다는 게 아닐까?”
그 말에 한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