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크리스토퍼 (2)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크리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 이거 뭐 방송사에서 하는 몰래카메라 같은 겁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크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맥크리 변호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니라 전부 진짜입니다.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차량 인도와 주택 융자금이 전부 해결되고, 자녀분들은 장학금을 받게 되실 겁니다. 이에 따른 세금 문제 역시 전부 이쪽에서 처리할 테니, 아무것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일반 가정에서 가장 많은 돈이 지출되는 항목은 주택 융자금과 자녀들 학비, 그리고 차량 구입비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그냥 주겠다니!
마치 파워볼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달콤한 제안에는 함정이 숨어있기 마련.
‘혹시 제안을 받으면 어딘가로 끌려가, 목숨을 건 게임에 강제로 참가해야 하는 건가?’
크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대체 누가 저에게 이런 걸 해준다는 겁니까?”
“로무 씨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전에 로무 씨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요.”
“그게 누구입니까?”
“당장 밝히기를 원하지는 않으시는데…….”
크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주는 건지도 모르는 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맥크리 변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브리프 케이스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럼 이 편지를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크리스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펼쳐 보았다.
[안녕하세요, 크리스.
딱히 티를 내고 싶지는 않지만, 변호사의 말을 믿지 않으실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써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비행기를 멈추고 모두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크리스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날 비행기를 멈춰 세운 건 제가 아니라 크리스였어요.
만약 크리스가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 역시 몰랐을 테니까요.
크리스야말로 모두를 살린 진정한 영웅입니다.
크리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 일로 저에게 고마워하거나,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본인이 한 일이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ps1. 칸쿤에 있는 JR블랙우드 리조트 이용권을 보내드립니다. 아내와 여행 한 번 다녀오세요. 브릿지월드 항공 비즈니스석 이용이 가능하실 테니 비행기표는 동봉하지 않습니다.
ps2. 저희 회사에서 조만간 전용기를 구매할 생각입니다. 이를 관리하고 정비할 사람이 필요한데, 관심 있으면 아래 번호로 연락주세요.
-당신의 친구로부터-]
크리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편지를 읽어보았다.
“이, 이게 대체…….”
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 여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엔진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말하긴 했어도, 당당하게 비행기를 멈춰 세운 것은 그였다.
그가 스스로 영웅이라고 한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린단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그 친구가 이 정도로 돈이 많았어!?’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게다가 그날 비행기 좌석도 자신의 옆자리인 이코노미석이었다.
그런데 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차도 사주고, 주택 융자금까지 대신 갚아준단 말인가? 게다가 자녀들 장학금까지!
“이 친구는 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백만장자라도 됩니까?”
그 말에 맥크리 변호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백만장자요? 억만장자라는 표현도 부족할 겁니다.
“그래도 이런 큰돈을…….”
“로무 씨에게는 큰돈이겠지만, 보스에게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트에서 젤리 한 봉지 사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
“그렇다 해도 아무에게나 이런 친절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로무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맥크리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주지 않으신다면, 저 큰 차를 몰고 제가 계속 찾아와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크리스는 아내를 보았다. 그의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전생이 큰일을 했나 보네요.”
“이거 참…….
고민 끝에 크리스는 펜을 들고 서류에 사인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 * *
페더 사태로 촉발된 암호화폐 폭락세는 다행히 진정됐다.
그렇다고 다시 올랐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폭락은 멈췄다.
암호화폐 관련 기업들은 폭락했지만 증시는 별문제 없었다. 오히려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빠진 자금이 증시로 흘러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 사이, 뉴욕주는 미국 최초로 스테이블 코인 규제를 시행했다.
뉴욕주 금융 서비스부(DFS).
원래 월스트리트 굼융사들을 규제하던 곳으로 이번에 암호화폐와 관련해 칼을 빼들었다.
달러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 코인은 DFS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예치금은 회사 자산과 분리해 수탁기관에 보관, 예치금은 매월 회계 심사를 받아야 한다. 또한 예치금 항목은 예금과 미국 국채로 명시했다.
컨티뉴 캐피탈은 바로 DFS가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페니야 이미 은행 수준의 자체 규제를 하고 있었으니,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른 곳들은 난리가 났고, 일부 업체들은 뉴욕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차피 조만간 연방정부 차원에서 규제가 이뤄질 테니, 옮겨도 별 소용은 없겠지만.
난 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했다.
얼마 전까지 정신없이 바빴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한산했다. 투자 안 하고 있을 때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직원들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래서 전용기를 살 생각입니다.”
내 말에 데이비드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는 사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전용기를 사겠다는 겁니까?”
“필요하잖아요.”
한국에서만 사업할 거라면 굳이 전용기가 필요 없다.
그러나 땅이 넓은 미국은 다르다. 당장 나만 해도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옆집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회사가 아닌 개인이 전용기를 소유하는 경우도 많고, 이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서비스 역시 잘 발달해 있다.
라스베이거스 같은 데서 큰 행사가 열리면 공항에 종일 전용기가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유성이나 GL 등의 재벌그룹들은 당연히 전용기가 있다.
내가 알기로 유성그룹은 4대를 보유 중이다. 그중 한 대는 사실상 유재호 회장 개인용이고, 나머지는 임원들이 출장 때 사용한다고 한다.
한번 타고나면 애사심이 샘솟는다고 하던데.
“비용을 생각한다면 빌려 쓰는 편이 낫긴 합니다만, 사도 괜찮긴 하겠군요. 몇 대나 구매하실 생각입니까?”
“직원들도 쓰려면 세 대는 필요하지 않겠어요?”
한 대는 내가 타고 다녀야 하니까.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하시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쏘쏘하다.
전용기쯤이야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랄까?
“데이비드는 뭐 갖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돈 쓰는 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버는 게 훨씬 재밌죠.”
난 피식 웃었다.
“남을 위해서는 잘 쓰지 않나요?”
아무래도 소비보다는 기부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다.
부자의 공통점은 돈이 많다는 것. 그러나 소비에 있어서는 각자 스타일이 다르다.
에런 화이트의 경우 결혼할 때 산 낡은 집에서 계속 살며 낡은 차를 타고 다니고 아침에는 맥모닝을 먹는다. 세계 10대 부자 중 한 명인 아케아 회장은 이코노미석만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고는 매년 수십억 달러씩을 기부한다.
반면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사치를 누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누구라고는 말 안 하겠는데, 오일국 모 왕자의 경우 유럽 곳곳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고, 슈퍼카만 수십 대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휴가를 들기던 도중 지나가던 요트가 마음에 들자 그 자리에서 주인을 불러 5억 유로를 내고 바로 인도받았다고 한다.
세상에 나랏돈 쓰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지.
전용기를 사겠다는 얘기를 전하자, 동호 선배는 반색했다.
[그래! 우리도 전용기 뽑을 때가 됐어. 내가 타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글로벌 비즈니스하려면 필요하다니까.]
“…….”
본인이 타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전용기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해? 걸프스트림에 주문 넣으면 되나?]
“아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려구요.”
[아는 사람? 누구?]
다행히 내가 또 이쪽 전문가를 알고 있다.
* * *
난 피터 테일러 회장에게 전화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네.]
이게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다.
신산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덕분에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은 창사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으니까.
그래서인지 페니 결제 도입 역시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번에 또 엄청난 일을 했던데. 이번에 암호화폐가 줄줄이 폭락하는 걸 보니, 랜섬웨어 사태 때 우리 회사를 공매도한 사모펀드가 생각나더군.]
“……그 위기를 멋지게 극복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전용기를 구매할 생각이라 좀 여쭤보려구요.”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곳곳에 호텔이 있는 글로벌기업.
여기에 전용기 공유와 대여 서비스도 하고 있는 만큼 수십 대의 전용기를 보유 중이다.
[그러고 보니, 컨티뉴 캐피탈은 아직 전용기가 없군.]
“예.”
[잘됐군. 마침 지금이 전용기 사기 딱 좋은 시기네. 새것과 중고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어째서요?”
[누구 때문에 코인이 대폭락한 바람에 손실 본 투자자들이 전용기부터 팔고 있으니까.]
“…….”
그동안 암호화폐 폭등 덕분에, 암호화폐 개발자와 투자자들은 세계 부자 순위에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암호화폐가 폭락하자 다시 줄줄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동안 코인 올랐다고 헛바람 들어서 전용기부터 질렀는데, 갑자기 폭락하는 바람에 인수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몇 대나 필요한가?]
“세 대 구매할 생각입니다.”
[바로 알아봐 주겠네. 요트 매물도 나오는 모양인데, 요트는 별 관심 없나?]
“흠, 요트요?”
[두 개 사서 뉴욕에 하나, 캘리포니아에 하나 놔두면 좋지 않겠나?]
요트 가격은 전용기보다도 훨씬 천차만별이다.
싼 건 수백만 달러지만, 비싼 건 수억 달러다.
전용기 크기야 어차피 거기서 거기지만, 요트는 크기부터가 다르다. 어떤 건 안에 수영장과 헬기 착륙장까지 갖춘 그야말로 떠다니는 섬 수준이다.
예를 들어 오일국 모 왕자님이 5억 유로 주고 산 그런 요트 말이다.
“괜찮은 거 있으면 알아봐 주세요.”
[잘 생각했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당분간은 좀 쉴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지. 사람이든 기업이든 스트레스를 잘 관리해야 오래가는 법이네.]
돈의 단위가 크면, 스트레스의 크기도 커지기 마련.
괜히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에서 요가와 명상이 유행하는 게 아니다. 일부는 아예 전문의와 상담하거나 라이프 코칭을 받기도 한다.
돈만 내면…….
‘호흡을 다스리고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야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몸에 힘을 빼고 견디는 힘을 기르세요.’
‘몸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대충 이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한다.
들으면 좀 도움이 되려나?
[이번 기회에 휴가를 가는 건 어떤가?]
“휴가요?”
[도시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거지. 지난달, 우리 회사가 리조트를 새로 오픈했는데, 혹시 생각 있나? 장담컨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리조트라고 자부하네.]
왠지 마음에 끌리는 제안이다.
나에게는 지금 휴가가 필요하니까.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