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 로무.
미 공군 정비사였던 그는 재작년 전역했다.
원래는 특기를 살려 비행기 정비 쪽의 일을 알아보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는 임시직으로 경비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은 3교대제로 이뤄졌고, 그는 주로 야간근무에 투입됐다.
업무는 고되지만, 수입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임시직이다 보니, 언제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고.
‘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배운 거라고는 비행기 정비하는 기술뿐이고, 나이도 있다 보니, 자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팀장과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돌았다.
팀장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말했다.
“이번에 브롱스에서 또 총기 사고가 일어났군. 두 명이 사망했다는데.”
“그렇군요.”
그는 슬쩍 정치 토크를 시작했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월레스 대통령은 뭘 하는 게 없어. 대체 누가 이런 놈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다음 대통령은 꼭 필립스 상원의원이 돼야 할 텐데.”
크리스는 말했다.
“예전에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좋은 분이죠.”
그 말에 팀장은 깜짝 놀랐다.
“정말? 필립스 상원의원을 만났다고?”
“일전에 같은 비행기에 탔었습니다. 활주로에서 비행기 엔진이 터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내려서 한동안 같이 있었죠.”
“어! 그거 알아! 그때 테러라고 오보가 나는 바람에 난리가 나지 않았었나? 여행 온 한국인이었나 일본인이 엔진 소리 듣고 이상을 알아채서 활주로에서 멈춰 세웠다고.”
“한국인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크리스는 그날 자신의 옆자리에 탔던 승객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가 우리 모두를 살렸죠.”
일은 해가 뜨고 나서야 끝났다.
“수고했네.”
“내일 뵙겠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크리스토퍼 로무 씨 핸드폰 맞나요?]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안녕하세요. 한미루라고 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상대의 이름을 들은 그는 깜짝 놀라며 반갑게 소리쳤다.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 * *
크리스토퍼가 사는 곳은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월스트리트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곳.
그때 뉴욕주에 산다고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설마 이 정도로 가까이에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춘 곳은 주택가의 작은 2층 집.
난 차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민머리에 거구의 남자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하하! 이 친구, 이게 얼마 만인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 그나저나 한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일 때문에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나?”
“월스트리트에 있는 사모펀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흠, 사모펀드. 은행 같은 건가?”
“비슷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금융회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하면 알지 않을까?
난 안으로 들어섰다.
40대 중반 정도의 동양인 여성이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한국어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남편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발음은 또박또박하지만, 억양은 교포 같은 느낌이다.
“어! 한국분이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왔어요.”
그리고 보니 1회차 때 기사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난 오기 전 호텔에서 사온 케이크를 내밀었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건 아니지만 선물입니다.”
“어머, 고마워요.”
매일 한정으로만 판매하는 비싼 케이크다.
크리스는 아이들을 소개해주었다.
“내 딸과 아들이네.”
딸은 현재 대학생이고, 아들은 고등학생이다.
발음이 살짝 어설프지만, 한국어도 곧잘 했다.
딸은 엄마를 닮았는지 한국인 같은 외모고, 반면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키가 190센티는 넘어 보였다.
부럽다…….
세상에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으니, 키와 머리카락.
이제 와서 키를 키울 수는 없으니, 머리카락이라도 잘 관리해야지.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난 소파에 앉아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매일 혼자서 넓은 호텔에 있다가 사람 사는 집에 오니, 왠지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갑자기 집이 그리워진다.
식사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야채로 만들어진 샐러드, 통조림 콩이 들어간 비프스튜, 치즈에 버무린 마카로니, 소스를 발라 구운 베이컨 등이 차려져 있었다.
여기에 더해 불고기와 김밥도 있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전 뭐든 잘 먹습니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크리스와 가족들은 식전기도를 올렸다.
역시 기독교의 나라.
생각해 보면 미국 가정집에 초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눴다.
“아내분이 한국인인 줄은 몰랐어요.”
“내가 말 안 했나? 그래서 주한미군에 자원한 거네.”
“아하! 그랬군요.”
참고로 그는 오산 공군기지에서 일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군요.”
서울에서 오산이면 실제로도 그렇게 멀지 않다.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거의 옆집이나 다름없고.
“이제 보니 애처가시군요.”
“하하! 물론이지.”
그의 아내가 말했다.
“전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왔어요.”
그녀의 한국 이름은 이름은 윤나영. 미국 이름은 샐리 윤이라고 한다.
“두 분은 어쩌다가 만나게 되신 거예요?”
크리스는 호탕하게 말했다.
“아내가 부대 근처에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네. 남자답게 다가가 데이트를 신청했지.”
샐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때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요. 민머리에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더듬더듬 말하는데, 거절하면 울 것 같아서 승낙했어요.”
“아,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샐리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저한테요?”
“예. 남편이 항상 얘기했어요. 미루 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예?”
크리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네. 그래도 자네 덕에 그 비행기에 탄 사람들 모두가 목숨을 건지지 않았나?”
“…….”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건 원래 그가 했던 일이니까. 다만 내가 필립스 상원의원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 공을 가로챘을 뿐이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제 덕이에요? 크리스 덕분이지. 크리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걸요.”
“에이, 난 그저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을 뿐인데. 비행기를 멈춰 세운 건 자네 아닌가?”
“…….”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가 나서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다.
뭐, 그의 입장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겠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필립스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모두가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을 거네.”
이 얘기를 계속했다가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
난 자녀들로 화제를 돌렸다.
딸의 이름은 레이첼, 아들 이름은 패트릭이다.
딸은 현재 뉴욕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패트릭은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딸에게 말을 걸었다.
“뉴욕대 경제학과 다닌다며?”
“예. 나중에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게 꿈이에요.”
크리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똑똑하네.”
하기야 뉴욕대 경제학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한국대 경제학과보다 경쟁률이 높지 않을까?
레이첼이 말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아! 지금은 본사로 출장 온 거고, 원래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
“어떤 일을 하시는 거예요?”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겠지?
난 적당히 둘러댔다.
“뭐, 기업 분석도 하고 투자도 하지. 최근에는 한국 연예 기획사들에도 투자했고.”
패트릭이 물었다.
“앗! 정말요? 무슨 회사인데요?”
“메이블 엔터라고 루나틴즈라는 걸그룹이 있는 곳인데…….”
그러자 그는 손뼉을 쳤다.
“어! 저 알아요. 루나틴즈는 미국에서도 유명해요.”
“그래?”
“예. 요즘 K-팝과 한국 드라마가 인기니까요.”
이게 무슨 에이튜브 썸네일에 나오듯…….
‘세계가 경악!’
‘미국 학생들 K-팝 듣고 기절!!’
‘한국 드라마 열풍으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혀!!!’
뭐, 이런 것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법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 애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식사가 끝난 뒤.
크리스는 아이들과 함께 뒷정리를 했고, 샐리는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설거지를 하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분이죠.”
1회차 때 그가 아니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 달라졌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테고.
“한국으로 간 건 저희 부모님 때문이었어요. 한국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하자, 바로 주한미군 파병을 지원했어요. 덕분에 돌아가실 때까지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파병으로 번 돈은 대부분 치료비로 썼다고 한다.
책임감이 보통이 아니다. 하기야 그러니 엔진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비행기를 멈춰 세웠겠지.
“언제든 또 놀러 와요.”
“알겠습니다.”
* * *
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크리스는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나왔다.
“정말 괜찮은데요.”
“괜찮긴.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내가 데려다주겠네.”
그는 집 앞에 서 있는 대형 픽업트럭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난 차의 비주얼을 슬쩍 본 다음 물었다.
“이 차 굴러는 가나요?”
“물론! 아직 20만 마일밖에 안 탔네.”
“…….”
20만 킬로도 불안한데, 마일이라고?
어쨌거나 차에 올라탔다.
그는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이거 또 말썽이군.”
부릉! 부르릉!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시동이 걸렸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지난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오늘 어땠나?”
“아주 좋았어요.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와줘서 내가 고맙네. 그동안 아내도 아이들도 자네를 많이 보고 싶어 했네.”
“지금 하시는 일은 어때요?”
“경비일 말인가? 임시직이라서 계속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보는 중이네.”
“어떤 일이요?”
“항공기 정비 쪽을 찾고 있네만, 쉽지 않더군.”
“그렇군요.”
원래 그는 차기 대통령을 살린 사람으로 유명해진다.
필립스 상원의원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백악관에 초청도 받고, 이후로도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 공과 명예를 가로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나로 인해 피해를 받은 셈이다.
그러니 그만한 보상을 해줘야겠지.
난 헤어지기 전 크리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내 말에 그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 * *
일을 끝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크리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거래처에서 CCTV를 설치했으니 인력을 줄여달라는 통보를 해왔네. 미안하지만, 내일부터는 나올 필요가 없네.”
“알겠습니다.”
그는 캐비닛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큰일이로군.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해야지?’
우울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웬 검은색 픽업트럭 한 대가 그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차종은 포드 슈퍼듀티 F-450.
뽑은 지 얼마 안 됐는지 새 차처럼 반짝거렸다.
‘좋은 차로군. 난 언제 저런 차 타보나?’
차에서는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흑인 남성이 내렸다. 그는 크리스에게 물었다.
“여기가 크리스토퍼 로무 씨 댁입니까?”
“제가 크리스토퍼입니다. 누구십니까?”
그는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브루스 맥크리 변호사입니다.”
“변호사?”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크리스는 명함을 확인했다.
딱히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수상한 사람이라 해도 주먹 한 방이면 제압 가능하고.
크리스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오시죠.”
크리스와 샐리는 식탁에서 손님을 마주 보고 앉았다.
‘대체 변호사가 무슨 일이지?’
크리스가 물었다.
“누가 저를 고소하기라도 했습니까?”
맥크리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로무 씨에게 몇 가지 동의를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요.”
“동의요?”
“일단 서류를 보시겠습니까?”
그는 브리프 케이스에서 여러 서류를 꺼내 들었다.
“먼저 이건 새 차에 대한 인수 계약서입니다.”
“새 차요?”
맥크리 변호사는 차키를 함께 내밀었다.
“예. 방금 타고 온 픽업트럭입니다.”
샐리는 깜짝 놀랐다.
“설마 당신 차 샀어요?”
크리스는 펄쩍 뛰었다.
“아, 아니야, 여보! 할부금 낼 돈도 없는데 무슨…….”
그러자 변호사가 말했다.
“할부금은 내실 필요 없습니다. 공짜니까요.”
“공짜?”
“이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세금과 보험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이게 무슨…….”
너무 뜬금없는 얘기다 보니,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변호사는 계속해서 서류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주택 융자금 완납에 동의한다는 서류고, 이건 자녀분의 장학금을 지원받는다는 동의서입니다. 학비와 함께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도 함께 지급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