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페더 (4)
시뇨리지(Seigniorage).
화폐 주조차익을 뜻하는 단어다.
1만 원짜리 금화를 만드는 데 2천 원이 들었다면, 국가는 금화 하나를 찍어 유통할 때마다 8천 원의 이익을 얻게 된다.
그나마 금화나 은화는 금속이라도 들어가지만, 현대의 화폐 제조 원가는 0원에 가깝다.
동전과 지폐를 만드는 대신 그냥 계좌에 숫자만 찍으면 되니까.
멋대로 숫자를 늘릴수록 이는 온전히 국가의 수익이 된다.
때문에 국가는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고, 위폐를 발행하거나 유통하면 강력하게 처벌한다.
그런데…….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태연하게 벌어지는 중이다.
너도나도 암호화폐를 만들고, 이를 거래소에 상장해 가격을 띄운다. 그리고 최초 발행자는 자신이 만든 암호화폐를 내다 팔아 막대한 시뇨리지를 챙겨간다.
그럼에도 이 시장에는 어떠한 규제도 이뤄지지 않는다.
난 1회차 때 본 미래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드가 만든 메타버스는 웬만한 국가보다도 거대한 규모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통화를 멋대로 찍어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의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드는 그걸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레너드 창과 시드의 차이다.
암호화폐 시장은 소수의 큰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레너드 창.
레너드 창에게 화폐는 그 자체가 투자의 대상이고, 부를 창출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그는 페더를 통해 암호화폐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다.
하지만 시드에게 있어서 암호화폐란 그저 메타버스 경제를 구축하고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화폐를 통해 경제 생태계를 만들면 부는 알아서 생성되게 되어 있다.
레너드 창은 장사꾼에 불과하지만, 시드는 메타버스 세계를 만드는 창조주다.
애초에 보는 시각과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다.
“전 암호화폐를 멋대로 발행해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형은 그런 놈들과 달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다르지.”
속으로 조금 뜨끔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도 암호화폐를 찍어내 한몫 챙기고 싶으니까.
그럼에도 단호하게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는, 시드가 그걸 극혐한다는 걸 알기 때문.
“암호화폐는 디지털 세계에 반드시 필요해요.”
기존 화폐는 은행을 통해서만 거래되고 보관된다.
해외송금의 경우 여러 은행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수수료가 많이 발생한다. 게다가 은행 서버가 점검에 들어가면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개인들끼리 송금이 가능하고, 이 거래는 블록체인을 통해 기록된다.
블록체인은 송금과 결제 등 ‘이미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가능하다.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 시스템을 통해 기간, 금액, 조건 등을 미리 코딩해 계약이 자동으로 이뤄지게 만들어, 사기를 예방하거나 유통업자나 저작권자에게 향후 발생할 수익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해요.”
“어째서?”
시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상세계가 없어도 현실세계는 존재해요. 하지만 현실세계 없이 가상세계는 존재하지 못하니까요.”
그 말대로다.
메타버스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현실의 육체가 존재해야만 거기에 접속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가상세계의 통화 역시 현실세계와 연동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거야?”
“맞아요. 암호화폐를 만드는 사람이나 투자하는 사람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탈중앙화를 외치는데, 그 사람들이 과연 국가보다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반트코인 창시자는 블록체인 시스템에 많은 사람이 참여해 보다 평등한 거래와 분배가 이뤄질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요?”
“투기의 대상이 됐지.”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더 많은 코인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을 얻게 된다. 부는 점점 소수에게 쏠리고, 그 소수는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국가보다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법정화폐 기반 스테이블 코인이 필요해요. 멋대로 발행하지도 못하고 투기 대상이 되지도 않을 테니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지.”
시드의 생각이 옳았음은 나중에 입증된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개발자들 몇 명이 백서랍시고 하나 내놓고 코인을 마구 찍어내는데, 어째서 엔플과 구블, AMZ 등은 암호화폐를 출시하지 않는 걸까?
이들의 신용이면 수억 달러의 암호화폐를 찍어내도 누구 하나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텐데.
정확히는 출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암호화폐가 규제에서 비켜나 있어도 기업 자체는 규제를 받으니까.
만약 기업이 자신들의 신용을 이용해 암호화폐를 발행한다면?
이는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실제로 페이스노트는 데브라라는 스테이블 코인을 출시하려 했지만, 규제 당국의 압박 때문에 포기했다.
스노우 크래시 역시 클라우드 빅4로 불리는 거대 기업.
만약 멋대로 암호화폐를 발행한다고 하면 정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아직 있지도 않은 규제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굳이 막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스테이블 코인의 이름은 뭐가 좋을까?”
시드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페니는 어때요?”
페니(Penny).
영어권 국가에서 동전이나 작은 돈의 단위를 뜻하는 단어다.
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그걸로 하자.”
“그런데 코인은 어디에 사용할 건데요?”
“시작은 일단 선불충전금 개념으로 봐야지. 일단 스노우 크래시의 클라우드 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연관된 블록밸리, 나이트 라이트, 레전드스토어, 블랙우드 호텔, 오코너 버거 등에서도 쓰이게 할 생각이야.”
1회차 때보다는 좀 이르지만, 지금부터 시작해도 안 될 건 없다. 어차피 자본이야 컨티뉴 캐피탈이 뒤를 받쳐주면 되니까.
“제대로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기능은 발행 뒤에 추가해도 되지 않아? 당장은 송금과 기본 플랫폼 기능만 있으면 돼.”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나요?”
이제 이유를 말해줄 차례다.
“페더에 대해 알지?”
“그럼요.”
난 이제까지의 얘기를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시드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 페더가 사기라는 거예요?”
“응. 아마 예치금 없이 페더를 발행했을 거야. 누구도 자산 내역을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까.”
“1달러가 없이 1페더를 발행했다면, 레너드 창은 그만큼의 이익을 자신의 주머니로 챙긴 셈이네요.”
“그래서 그의 주머니에 과연 얼마가 있는 확인해보려고.”
난 전략을 설명해주었다.
“디파이 프로토콜을 만들어서 페더를 스테이킹하면 페니를 이자로 지급하는 거야. 그리고 그만큼의 페니를 담보로 맡기고 페더를 빌려다가 파는 거지. 페니는 언제든 앱을 통해 달러로 바꿀 수 있도록 하고.”
“그건 별로 어렵지 않겠네요.”
“한창 바쁠 텐데 미안해.”
내 말에 시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재밌어하는 표정이다.
이 모습을 보니 든든하다.
“밥 먹으러 가자. 저녁 아직 안 먹었지?”
* * *
난 JR블랙우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씻지도 않고 드러누웠다.
JRB카드가 있으면 스위트룸 이상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내 이름을 확인한 직원은 스위트룸보다 두 배는 넓은 룸을 내주었다.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다.
예전에는 출장을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싼 호텔을 검색해서 찾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신기하다.
생각해 보면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말이지.
그때는 주식이 조금만 떨어져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수백만 원만 손실 봐도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판돈이 말도 안 되게 커졌다.
“암호화폐라…….”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1회차 때는 없었던 일이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누워서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강선우다.
난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았다.
[뭐하냐?]
“호텔에 있어.”
[누구랑?]
“혼자. 무슨 일이야?”
[입주 잘 끝났다고. 여기 좋네. 집에서도 가깝고.]
“좋지.”
유성물산이 유성그룹 사옥으로 지은 거니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지었겠는가? 그래서인지 10년 넘게 지났음에도 방금 지은 것처럼 깨끗하다.
[넌 뭐하고 있어?]
“뭐하긴. 친구가 만드는 게임에 투자해주려고 돈 버는 중이지.”
참고로 말이 투자지 실제로는 그냥 주는 거다.
SW게임즈 지분 100퍼센트를 소유한 곳은 K홀딩스. 조세회피처 버진 아일랜드에 있는 페이퍼 컴퍼니다.
그리고 이 회사의 소유주가 바로 강선우다.
[요즘은 또 무슨 투자를 하고 있는데?]
“암호화폐.”
내 말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
[응? 코인을 한다고?]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암호화폐에 발을 담그게 된 건 이 자식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제2의 에런 화이트를 꿈꾸며 교내 동호회에도 가입해 주식투자에 발을 들였다.
동호 선배의 가르침 아래 열심히 기업을 분석해 투자했지만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선우가 암호화폐에 투자하자고 순진한 나를 꼬드겼다.
‘대세는 암호화폐야. 이게 미래의 화폐가 될 거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투자해야 해. 이게 블록체인이라는 건데…… 분산 컴퓨팅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프로토콜이 어쩌구…… 웹 3.0 시대가 열리면 저쩌구…….’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국 최고 이과대 하이스트생이 열변을 토하니 왠지 그럴듯했다.
당시는 그야말로 코인열풍이었다.
100만 원도 안 하던 반트코인은 순식간에 1천만 원, 2천만 원으로 올랐고, 전문가고 언론이고 반트코인이 1억 원까지 갈 거라고 떠들어댔다.
웃긴 사실은 반트코인은 그나마 적게 오른 편이었다. 알트코인 중에서는 어제까지 1원이던 게 자고 일어나니 100원이 되는 일도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돈이 복사되던 시절이었다.
처음 맛본 암호화폐 투자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이 취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주린이에서 코린이로 진화했다.
그 결과……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선우의 말에는 한 가지 큰 모순점이 있었다.
암호화폐가 통화로 쓰이려면 가격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투자 대상이라면 계속해서 가격이 올라야 한다.
즉, 미래의 화폐가 되는 것과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사실 암호화폐가 자산이냐 화폐냐는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시각이 엇갈리고, 국가마다 규제도 다르다.
“너 이제 코인 투자는 안 하지?”
[나야 끊은 지 한참 됐지. 주변에 하는 사람들 많지만.]
“그래?”
[응. 요즘 또 제2의 코인붐이야.]
실제로 암호화폐 시총과 거래소 거래량 모두 꾸준히 우상향 중이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열정 역시 큰 역할을 했다.
투자하면 주식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옛말. 이제 대세는 주식이 아닌 코인이다!
통계만 놓고 봐도 개인의 일평균 코스피 거래대금이 15조 원인 데 비해, 암호화폐 거래대금은 무려 18조 원으로 20퍼센트 더 높다.
이러니 한국인들만 이용하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당당하게 세계 4위까지 올라선 거겠지.
[게임업계도 코인 때문에 난리야. 너 위너팩토리 알지?]
“드래곤의 전설인가?”
[맞아.]
대략 20년 전쯤 만들어진 중견 게임회사다.
이 게임회사가 최근 유명해진 것은 드래곤의 전설 5를 출시했기 때문…… 이 아니라, 자체 코인인 리믹스를 출시했기 때문.
위너팩토리는 드래곤의 전설 5를 내놓으며 P2E(Play to Earn) 게임을 주창했다. 플레이를 통해 게임 내에서 얻은 재화로 돈을 벌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믹스라는 코인을 만들어 자사 게임에서 벌어들인 게임머니를 리믹스를 통해 현금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 리믹스 가격은 크게 올랐고, 위너팩토리 주가 역시 열 배 가까이 뛰었다.
그리고 위너팩토리는 가격이 오른 리믹스를 3000억 원가량 매도해 최대의 이익을 거뒀다.
작년 영업이익의 대부분은 리믹스 코인 판매수익이었으니, 이쯤 되면 게임회사인지 코인회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얼마 전 나온 발표를 보면 대박이야. 리믹스에 이어 스테이블 코인 리믹스 달러를 출시하고, 웹 3.0 서비스 중심 생태계를 구축해 DAO, 디파이, NFT를 활성화하겠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사람 있어?”
[글쎄. 말하는 사람도 잘 모를걸. 어쨌거나 발표 이후 코인 가격은 오르던데.]
“…….”
하기야 코인이 어디에 쓰일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가격만 오르면 되지.
얘기를 하다 보니 슬슬 졸리다.
“나 내일 일찍 나가봐야 하니 이만 끊는다.”
[어디 가는데?]
“위싱턴 D.C.”
[거기는 왜?]
“상원의원을 만나기로 해서.”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