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뉴욕의 연말 (6)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와 코인맥스의 본사는 케이맨 군도에 있고, 다른 자회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돈을 번 방법은 간단하다.
반트코인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사들이고 채굴장을 차렸고, 사람들이 암호화폐를 거래할 곳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거래소를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에 이걸 했다.
말 그대로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이 정도는 해야 세계 1위의 부자가 될 수 있는 건가?
난 레너드 창에게 말했다.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도 많지 않나요?”
“본인이 이해 못하는 상품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암호화폐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반트코인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허리를 숙이며 덥석 받겠죠.”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 맞습니다. 본인은 가치가 없다고 말해도 남들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
원래 화폐란 그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 정말로 가치가 생겨난다.
그러니까 지금도 거래소에서 이렇게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겠지.
현재 시중에는 약 1만 종의 암호화폐가 거래되고 있고, 거래소 역시 500곳이 넘는다.
이 시장의 압도적인 1위는 역시나 코인맥스.
전세계 암호화폐 거래량의 무려 23퍼센트를 차지한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4위가 한국 거래소인 비트업이라는 것.
한국인들의 코인 사랑이란…….
“제가 처음 거래소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안 될 거라 말했죠. 코인맥스가 처음부터 1위였던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도 많았죠. 가장 큰 위기는 해킹 사건이었습니다.”
암호화폐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킹이 기승을 부렸다.
한때 세계 1위 거래소였던 스카이콕스는 해킹으로 인해 파산했다.
그리고 코인맥스 역시 해킹으로 전자지갑이 털리며, 반트코인 약 4만 개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기준으로 8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손실이었습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6억 달러죠.”
지금이야 8천만 달러쯤은 쉽게 배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몇 년 치 영업이익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때문에 다들 코인맥스가 파산을 선언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레너드 창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이 위기를 벗어났다.
먼저 그는 거래소의 책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약속했다.
단,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대신 거래소가 코인을 발행해 지급하고, 훗날 돈이 생기는 대로 회사가 이 코인을 사들여 현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피해배상으로 자체 발행한 암호화폐를 지급해서 피해자들 지갑에 넣어줬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돈이 생기는 대로 이 코인을 다시 사들였죠. 동시에 당장 돈이 필요하거나, 회사의 약속을 못 믿는 사람들은 바로 현금화할 수 있도록 코인을 거래소에 상장해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초기에 코인은 액면가의 20~30퍼센트 정도에 거래됐다. 하지만 코인맥스는 정말로 수익이 생길 때마다 일정 비율의 코인을 사들여서 소각했다.
소문이 퍼지자 코인 가격은 액면가인 1달러에 가깝게 거래됐고, 해킹 사건이 터진 지 3년 만에 코인맥스는 발행한 모든 코인을 사들여 소각하고 피해배상을 끝냈다.
“그 일로 인해 코인맥스는 대중의 신뢰도를 쌓았고, 해킹에 대한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대부분의 거래소들이 해킹 피해에 대해 나 몰라라 할 때, 코인맥스만은 끝까지 책임을 지고 배상했다.
믿을 수 있는 거래소라는 인식이 퍼지며 많은 사람들이 코인맥스로 몰렸다.
“덕분에 세계 1위 거래소로 올라섰으니, 해킹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네요.”
레너드 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그 위기에서 또 하나 배운 게 있었습니다.”
“뭔가요?”
“스테이블 코인의 필요성입니다.”
피해배상을 위해 발행한 암호화폐는 1코인에 1달러의 가치를 지녔다.
초기에는 크게 하락하기도 했지만 거래소에서 1달러에 계속 사들이며, 1코인의 가치는 90센트에서 1달러 사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치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배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페더를 발행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페더는 코인맥스, 더 나아가 암호화폐 시장을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페더(Pether)는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 자회사에서 발행한 스테이블 코인.
암호화폐의 가장 큰 장점은 거래의 편의성이다.
한국인은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금융 네트워크가 발달되지 않은 후진국의 경우 은행 계좌를 만들기도 어렵고, 1달러를 송금하기 위해 10달러의 수수료를 내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해외에서 결제하거나 돈을 송금할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많은 수수료가 발생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덕분에 은행을 통하지 않고,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전세계 어디에서나 편하게 송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실제 거래와 송금에 많이 쓰일까?
당연히 아니다.
당장 포털에 암호화폐를 검색해 보면 연관검색으로 ‘투자’가 뜨지, ‘거래’나 ‘송금’이 뜨지는 않는다.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가치가 수시로 변동하기 때문이다.
1달러였던 코인이 한 시간 후 50센트가 되거나 2달러가 된다면, 누가 이걸로 거래를 하겠는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이다.
가격이 수시로 변동하는 일반 암호화폐와는 달리 스테이블 코인은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
시장에는 다양한 스테이블 코인이 출시됐는데, 이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범용적으로 쓰이는 것이 바로 페더(Pether)다.
법정화폐 담보 코인으로 1페더는 1달러로 페깅(Pegging)되어 있다. 1달러를 내면 1페더가 발행되고, 반대로 1페더를 가져가면 1달러를 내준다.
“페더는 거래를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암호화폐뿐 아니라 실제 거래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죠.”
페더가 성공한 걸 보고 CBDC의 성공도 확신하게 된 건가?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성공한 사람 특유의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솔직히 존경스럽다.
모두가 안 될 거라 생각할 때 그는 도전했고, 성공했으니까.
아마 옛날이었다면 그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난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그는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다음에 좀 더 긴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예. 오늘 즐거웠습니다.”
난 그 명함을 받아들고, 내 명함을 건네주었다.
* * *
초저녁에 열린 파티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정이 되기 전.
난 사라와 함께 파티장을 나왔고, 우리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사라는 나에게 물었다.
“오늘 파티는 어땠어요?”
“재밌었어요.”
훗날 영화로나 보게 될 사기꾼도 직접 만났고, 비공식 세계 1위 부자도 만났다. 어디서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이다.
“창 회장과 길게 얘기하는 것 같던데.”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암호화폐에 관심 있어요?”
“돈이 된다면요.”
오늘 들은 얘기에서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사라는요?”
“저도 즐거웠어요. 한 해의 마지막을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이제 30분 정도만 있으면 새해네요.”
뉴욕에서 맞는 새해라니.
왠지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좀 아쉽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데,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지금 타임스퀘어에서 행사 중일 텐데.”
“어! 한번 가볼까요?”
매년 12월 31일.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서는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표정을 보니 가보고 싶은 모양이다.
사실 나도 가보고 싶다. 내가 뉴요커도 아니고, 살면서 타임스퀘어에서 새해를 맞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겠는가?
운전기사가 말했다.
“교통을 통제하는 중이라 안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그럼 근처까지만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보겠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타임스퀘어 근처. 조금만 가면 된다.
리무진이 출발했고. 사라의 경호원들이 탄 차량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차는 얼마 못 가 꽉 막혔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
이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20여 분.
기사가 말했다.
“더는 못 가겠는데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운전기사에게 100달러짜리 열 장 정도를 건네주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다 행복한 새해 되십시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뒤따라오던 차에서 두 명의 경호원이 내렸다. 좀 귀찮긴 하지만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타임스퀘어를 향해 걸어갔다.
“춥진 않아요?”
“예.”
이브닝드레스의 방한력은 없다시피 하지만, 다행히 그 위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를 입었다.
문제는 구두였다.
사라는 몸을 비틀거렸고, 난 재빨리 그녀를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예.”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발은 별로 안 괜찮아 보인다.
그녀의 신발은 굽이 10센티가 넘는 킬힐.
파티장 내내 신고 있었는데, 이걸 신고 계속 걷다가는 발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주변에 혹시 신발을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둘러봤지만,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업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침 여자 셋이 지나갔다.
한 명은 운동화를, 한 명은 플랫슈즈를, 한 명은 굽이 낮은 로퍼를 신었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그 구두 어디 거예요?”
“베르사체예요.”
“소중한 건가요?”
“아니요. 그냥 비서가 가져다준 거 신은 거예요.”
“그럼 이렇게 하죠.”
난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사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여성분이 신고 있는 하이힐 보이시죠?”
“예. 왜 그러죠?”
“베르사체라고 하는데, 예쁘지 않아요?”
명품이고 아니고를 떠나 크리스털이 박혀있는 구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쁘고 비싸 보였다.
“그래서요?”
“발이 불편해서 그런데, 혹시 신발 바꿔 신을 생각 없나요?”
갑작스런 제안에 세 사람 모두 당황했다.
가운데에 있는 여성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진짜 베르사체 맞아요?”
짝퉁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모양이다.
내가 또 이런 의심을 해소하는 방법을 잘 안다.
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추가로 500달러 드릴게요. 어때요?”
그러자 그녀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신발을 바꿔 신겠다고 나섰다.
그중에서 사라는 사이즈가 맞는 운동화를 골랐고, 베르사체 하이힐과 500달러를 얻은 여성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어때요? 이제 괜찮죠?”
“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어서 가죠.”
이브닝드레스에 운동화라니. 그래도 잘 어울린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자정이 되기 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장은 수많은 뉴요커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거리가 멀어 중앙에 설치된 공연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광판의 숫자는 잘 보였다.
이윽고,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불꽃이 쏘아지고, 1톤가량의 색종이가 하늘을 수놓았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해피 뉴 이어!”
다들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난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과 눈처럼 흩날리는 색종이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새해네요.”
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해도 잘 부탁해요.”
사라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