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뉴욕의 연말 (5)
자칭 프랑스 상속녀 에밀리 클로에.
하지만 그녀는 알제리 출신으로,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주했다.
리옹의 평범한 가정에서 살던 그녀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시카고의 부잣집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베이비시터로 일하며, 부자들의 생활양식을 익혔다.
이후 평소 동경하던 뉴욕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신분 위장을 시작했다.
그동안 번 돈으로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고급 호텔에 머물며 직원들에게 100달러짜리를 팁으로 뿌렸다.
그리고 파티에서 우연히(?) 상류층 여성들을 만났고, 그녀들에게 자신을 프랑스 원전재벌의 외동딸이라 속였다.
상류층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린스타그램에 업로드했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은 정말로 그녀가 상속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아놓은 돈은 금방 떨어졌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었다. 그 시점에서는 사업하는 남자친구를 만났고, 그의 카드를 펑펑 쓰고 다녔으니까.
에밀리 클로에의 목표가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상류층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거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는 거였는지.
어쨌거나 그녀는 유명세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셜 클럽이라는 비즈니스를 구상했다.
그런데 이게 꽤 괜찮은 사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돈을 투자했고, 3천만 달러의 대출을 승인받기 직전까지 갔으니까.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역사가 짧기 때문인지 미국인들은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에 대해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상속녀라는 콘셉트는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게다가 이런 폐쇄적인 사교 모임의 특성상 외부인은 배척하는 반면, 내부인에게는 관대하다.
따라서 안에 들어오기는 매우 힘들지만, 막상 한번 들어오면 검증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겠지.
에밀리 클로에의 사기 행각, 일명 ‘상속녀 스캔들’은 당시 뉴욕 사교계의 꽤 큰 사건이었다.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대형은행마저 속을 뻔했으니.
재밌는 사실은 그녀에게 돈을 투자한 명사 중 상당수가 피해 본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역임한 할아버지도 아니고, 이런 어린 여자애한테 속아 넘어갔으니, 얼마나 쪽팔렸겠는가?
한동안 뉴욕 상류층 전체가 조롱거리가 됐다.
어쨌거나 에밀리 클로에는 결국 사기 행각이 들통나 교도소로 들어간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비극으로 끝난 것 같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희극이다.
그녀는 재판을 받는 동안 자신의 사기 행각에 대한 책을 써서 그동안 진 빚을 다 갚았고, 그녀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이유 역시 영화를 봤기 때문.
그리고 그녀는 5년 만에 가석방됐다. 그 이후에도 린스타와 에이튜브 등에서 인플루언서로 활동했다.
원하는 대로 상류층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는 살게 됐다.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 되는 세상이다.
이러니 다들 기를 쓰고 유명해지려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밀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을 모욕해도 유분수지! 기분 더럽네요! 이런 거지 같은 파티에는 조금도 더 있기 싫어요!”
그녀는 화가 난 듯 빠른 걸음으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난 멍하니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뭐해요? 혹시 돈 빌려주거나, 투자했으면 어서 잡아요. 지금 놓치면 한동안 못 볼걸요.”
그 말에 1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르르 그녀를 쫓아갔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내 덕에 신용사회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간 것 같아 괜히 뿌듯하다.
설마 이런 곳에서까지 사기꾼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난 동호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일단 사기꾼은 만났고, 그다음은 뭐였더라?
* * *
약간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파티는 계속됐다.
사라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말하는 게 뭔가 좀 이상해서 한번 찔러봤어요.”
“그런데 정말 사기꾼이 맞았다는 건가요?”
“그런 거죠.”
사라는 소리 내서 웃었다.
“역시 미루 씨랑 같이 오니 재밌네요. 파티는 어때요?”
“재밌게 즐기고 있어요. 인사는 다 했어요?”
“예. 거의 끝난 것 같아요. 아직 안 온 사람이 몇 명 있어서, 그 사람들만 보고 갈 생각이에요. 미루 씨는요?”
“그때 저도 같이 가요.”
나 혼자 남아 있어서 뭐하겠나?
둘이 대화를 하는데,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이는 30대 중반.
키는 175센티 정도, 체형은 평범하다. 검은색 뿔테안경을 낀 동양인이다.
그는 사라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반가워요.”
“이쪽 분은 누구신가요?”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아까는 없었던 모양이다.
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컨티뉴 캐피탈 공동대표 한미루입니다.”
그는 살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 CEO 레너드 창입니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지난 생에나 이번 생에나 그는 유명한 사업가니까.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홍콩 출신의 사업가 레너드 창.
비교적 초창기에 반트코인을 접하고 블록체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코인을 만들고, 이를 거래할 수 있는 거래소를 직접 만들었다.
그게 바로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맥스다.
현재 비상장이지만 상장시 최소 2000억 달러를 갈 거라는 전망이 있을 정도다.
이 거래소의 85퍼센트를 보유한 최대 주주는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 이는 레너드 창의 개인 투자회사다.
여기까지만 해도 엄청난데, 사실 그의 재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코인맥스 지분이 아니다.
바로 암호화폐.
그는 사람들이 암호화폐가 뭔지 블록체인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반트코인과 엘더리움을 사 모았고, 중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채굴장을 운영했다.
게다가 코인맥스는 여러 종류의 자체 코인을 발행했다.
이를 다 합치면 그의 재산이 2500억 달러는 가뿐히 넘지 않을까?
때문에 비공식적으로는 그가 세계 1위의 부자라는 얘기도 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내가 미래 지식을 활용해 그렇게 벌었는데도, 그가 거래소와 암호화폐로 번 돈과 엇비슷하다니.
인사를 나눈 후에도 그는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까지 리야드에 머물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왕세자님께서 네옴시티 건설에 대해…….”
표정과 말투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약간 치근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세요. 인사 좀 하고 올게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설마 나한테 떠넘긴 건가?
레너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정말 멋진 여성입니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강인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투자를 잘하기로 유명한데, 혹시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은 투자처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반트코인과 엘더리움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기존 투자사들은 회의적이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화폐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유서 깊은 투자사들도 반트코인을 사들이고, 관련 상품을 출시하는 중이다.
암호화폐와 관련해 각종 파생상품과 선물시장도 만들어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에런 화이트만 해도 암호화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폰지사기라고 말할 정도니까.
“창업을 목표로 하던 시절 우연히 친구를 통해 반트코인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에 흠뻑 빠져들었죠.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반트코인을 사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던가요?”
내 말에 그는 웃었다.
“99퍼센트는 제 말을 안 들었습니다. 하지만 10달러라도 샀던 사람은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죠.”
한때 반트코인은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도 재밌는 장난감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누군가 이걸로 피자를 시켜 먹어볼 생각을 했다. 그는 피자 두 판을 시켜주면, 1만 반트코인을 지급해주겠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본 누군가가 피자를 시켜줬고, 1만 반트코인을 받았다.
당시 1만 반트코인의 가격은 약 40달러였다.
그랬는데 그로부터 10년도 안 지난 현재 1만 반트코인은 약 4억 달러…… 그러니까 4500억 원쯤 한다.
만약 이 시기에 반트코인 10달러를 샀다면, 지금쯤 1억 달러를 벌었을 것이다. 그보다 조금 뒤에 샀더라도 수백, 수천만 달러는 벌었을 테고.
정말이지 인생이 바뀔 만한 금액이다.
“컨티뉴 캐피탈은 리포트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죠. 앞으로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될 거라고. 전 화폐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많은 나라들이 암호화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될 겁니다.”
엘살바도르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경우 아예 반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말하는 건 유로나 달러 대신 반트코인이나 엘더리움을 화폐로 쓸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혹시 CBDC를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란 단어 그대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
한마디로 정부가 돈을 찍는 대신, 그만큼의 암호화폐를 찍어 유통한다고 보면 된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원화나 달러랄까?
“CBDC는 수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은행을 거치지 않으니 언제든 결제가 가능하고, 처리 속도가 빠르고, 관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죠. 랜섬웨어 등의 사이버 공격에도 안전하고, 각종 거래가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조지폐도 방지할 수 있죠.”
많은 국가에서 암호화폐를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규제하려는 이유는, 이게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블랙우드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범죄자들은 이제 달러보다 암호화폐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CBDC는 기존 암호화폐와는 개념이 좀 다르다.
기존의 암호화폐가 탈중앙화를 표방하는 반면, CBDC는 국가가 운영하는 중앙화된 형태의 암호화폐다.
철저하게 정부의 통제 아래 발행되고, 유통되고, 관리된다.
다시 말해 기존 화폐에 비해 오히려 정부의 통제력이 훨씬 강화된다.
이러니 굳이 도입을 안 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캐나다, 영국, 일본, 한국 등 많은 나라에서 CBDC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정부가 CBDC를 발행하고 운영하려면, 이에 대한 노하우가 있는 곳과 협력해야 한다.
어떤 코인을 얼마나 발행할지, 이를 어떻게 유통하고 관리할지 등등.
마치 중앙은행 같은 역할을 중개기관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하는 것은 당연히 기존에 암호화폐를 유통해 본 회사다.
예를 들어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라든지…….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만간 암호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하게 될 겁니다.”
왠지 그의 얘기가 허황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아마 지금도 몇몇 국가와 손을 잡고 준비 중일 테니까.
현재 달러를 발행하는 곳은 연방준비제도(Fed).
만약 향후 달러가 CBDC로 대체된다면, 뉴커런시 엔터프라이즈가 Fed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미래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네요.”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난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으니까.
난 레너드 창을 보며 동호 선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판매원과 사기꾼.
그는 과연 둘 중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