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뉴욕의 연말 (3)
자선 파티가 열리는 곳은 타임스퀘어 근처에 위치한 뉴욕의 파이브시즌스 호텔.
우리는 리무진을 타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리무진 실내는 열 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었고, 난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에메랄드색 실크로 된 이브닝드레스는 몸매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 데다가 길게 옆트임이 되어 있다.
미인이 이런 복장을 하고 있으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
괜히 창밖을 쳐다보는데, 사라가 말했다.
“좀 긴장되네요. 이런 파티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데.”
그 말에 난 놀랐다.
“의외네요. 파티를 많이 가봤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공주님이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소리 내서 웃었다.
“전에 말했잖아요. 미국에 있을 땐 그냥 대학생이었다고.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설마 아버지가 왕족이고, 할아버지가 사우디 국왕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죠.”
“알게 됐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별 느낌 없었어요. 알겠지만 사우디에 왕자와 공주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으니까요.”
어림잡아 1만 5천 명.
이들 중 제대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고작 몇 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그냥 왕족의 이름뿐이다.
아마 라시드가 미국으로 유학을 오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촌오빠인 라시드를 만난 뒤 인생이 완전히 변했다.
정말로 공주님이 됐으니까.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라시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저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라시드가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 것은 사우디로 돌아간 이후고 왕세자가 된 건 최근이다.
“어째서 왕세자님을 위해 일하기로 한 거예요?”
“당연히 돈 때문이죠. 연봉을 많이 주거든요.”
“정말로 그게 다예요?”
그녀는 PIF의 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라시드 왕자의 측근으로 구분될 정도로 쿠데타에도 깊이 관여했다.
사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미샤 공주의 얘기를 해줬어요. 아버지에게는 조카인데, 실제로는 나이가 다섯 살 더 많은 공주님이었죠.”
사우디 국왕이나 왕족쯤 되면 아내도 많고 자식도 많다 보니, 형제자매끼리 나이가 50살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러니 조카가 나이가 많은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아름답고 착한 분이었대요. 그래서 국왕을 비롯해 왕실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아꼈죠.”
사라는 마치 동화를 읽어주듯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샤 공주님은 유럽을 동경해서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어요. 하지만 유럽은 너무 멀고, 그곳에서는 아랍의 전통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옆 나라인 레바논의 유학만을 허락했어요.”
레바논도 이슬람 국가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우디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다.
“그곳에서 미샤 공주님은 새르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실은 바로 공주를 불러들였어요.”
만약 사우디로 돌아가면 다시는 새르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안 미샤 공주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왕실에서는 강제송환을 위해 요원들을 파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샤 공주는 자살을 위장한 다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파리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공항에는 이미 사우디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체포돼 사우디로 송환됐죠.”
가문의 허락 없이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우디에서는 이를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간주한다.
이런 경우 가장은 당사자를 죽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한다. 때문에 이를 명예 살인이라 한다.
물론 지들끼리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실제로는 그냥 살인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국왕은 공주를 살리기 위해 그 남자와의 사랑을 부정하라고 했어요. 어떠한 감정도 행위도 없었다고 말이죠. 그 경우 자신은 살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을 거라는 것을 안 미샤 공주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어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공주인데도 그냥 죽였단 말이에요?”
“관대한 국왕은 자비를 베풀었어요.”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이런 경우 관습에 따라 돌팔매질로 죽이는 투석형에 처하는데, 총살형으로 해주었으니까요.”
“…….”
정말이지 대단한 자비다.
결국 미샤 공주는 사랑하는 남자가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고, 새르는 칼로 목이 잘리는 참수형에 처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를 비극의 러브스토리로 받아들였지만, 사우디인들은 왕실이 전통을 지킨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대요. 그래서 성인이 된 뒤 미국으로 떠나며 다시는 사우디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그랬군요.”
어째서 왕족으로서 지위를 버리고 미국으로 귀화했나 했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다행히 공주와는 달리 왕자는 어디로든 유학을 갈 수 있고, 누구를 만나도 상관없다.
차별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니까.
비록 40년 전쯤의 얘기라지만, 이게 실화라는 게 놀랍다.
그래도 지금 사우디가 이 정도는 아니다. 공식적으로 더 이상 투석형과 참수형도 집행하지 않는다.
뭐, 어딘가에서 몰래 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라시드는 예전부터 말했어요. 사우디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전 그 말을 믿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미샤 공주의 죽음을 보고 사우디와 연을 끊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우디를 개혁할 생각인 것이다.
“여성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겠네요.”
“맞아요.”
현재의 사회체제와 자원의존형의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여성 차별을 없애자고 소리쳐봐야 들을 리 없다.
하지만 제조업과 관광업을 발전시키고, 신산업을 육성한다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는 인권 향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제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죠.”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PIF 운영자로 금융계에 이름을 떨쳤다. 결혼은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쩌면 그 이후로도 사우디를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라시드 왕세자를 돕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이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달라 보였다.
과연 난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혼자는 왠지 긴장됐는데, 이렇게 같이 가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같이 갈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호의의 표시라고 봐도 좋겠지?
“저야말로 초청해줘서 고마워요.”
대화를 하는 사이 리무진은 파이브시즌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입구에서부터 통제가 시작됐다. 고급차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고, 직원들은 차량을 발렛파킹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레드카펫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자 외모 하나만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에게 집중됐다.
때문에 괜히 옆에 있는 나까지 시선을 받았다.
상류층 파티라고 해서 무슨 별천지가 펼쳐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쪽에서는 클래식 연주자들의 음악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뉴욕답게 다양한 인종들이 있지만, 역시나 백인들이 가장 많다. 비율로 치면 80퍼센트 정도 되려나?
자선 파티라는 컨셉에 맞게 파티 참석자들은 기부금을 내고, 그렇게 낸 기부금은 여러 재단에 전달된다.
이런 곳에 와도 별 느낌 없는 걸 보니 그동안 돈을 많이 벌긴 벌었나 보다.
뉴욕의 자선 파티답게 금융계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에는 PIF와 관계를 맺고 있는 곳도 여럿이다. 이래서 사라가 파티에 얼굴을 비춰야 했던 모양이다.
사라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난 파티장을 구경했다.
저녁 시간에 열리는 파티라 샴페인과 음료는 물론, 다양한 핑거푸드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핫윙도 있다.
난 하나를 집어 먹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 닭 이렇게 튀기는 거 아닌데.
뉴욕의 고급 호텔에서 제공하는 치킨이라고 해도 K-치킨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한때 한정치킨 가맹점주로서 쉐프들 불러서 닭 튀기는 법을 교육해주고 싶다. 참고로 내 머릿속에는 대략 9년 후까지의 한정치킨 레시피가 들어있다.
이걸로 치킨가게를 창업했어도 잘하지 않았을까?
회귀자의 성공 치킨집이라든지.
적당히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분위기를 살피는데,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 에릭 로즈라고 합니다. 로즈 올가니제이션에서 투자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들어본 적 있다.
로즈 올가니제이션은 로즈 가문이 만든 부동산 복합기업. 건설, 시공, 거래, 중개, 투자, 자산관리, 리조트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로즈가는 뉴욕의 유명한 부동산 재벌. 뉴욕시에는 로즈가가 건설하고 소유한 랜드마크가 여럿이다.
그리고 이 회사의 CEO인 존 로즈는 현재 뉴욕시 부시장으로 재직 중이다.
경제와 정치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있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경제인이 정치에 뛰어드는 게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3선 동안 뉴욕시장을 했던 마이클 블룸버그의 경우 개인자산이 대략 800억 달러다. 이는 한국 1위에서 10위 부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
지난번 대선에는 민주당 경선에 나가서 10억 달러 정도 쓰고는 지지율이 생각보다 안 나오자 쿨하게 포기했다.
역시 자본주의의 본고장이랄까?
“에이버리 본부장과 함께 오셨던데, 혹시 PIF 관계자신가요?”
하기야 사우디 공주님과 함께 온 동양인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내가 관종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다.
난 웃으며 말했다.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컨티뉴 캐피탈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 * *
최근 가장 유명한 사모펀드를 하나 꼽아보라고 하면 모두가 컨티뉴 캐피탈을 꼽을 것이다.
설립된지 불과 2년도 안 된 이 투자회사는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투자사가 됐다.
일반적인 투자사들은 주식을 사거나 팔거나 하지, 공매도나 옵션에 손대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엠프티풀 리서치 같이 공매도를 전문으로 하는 투자사도 있지만, 투자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성공 확률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은 달랐다.
애초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토머스 모터스 폭락 때문.
그 뒤로도 여러 공매도로 명성을 떨쳤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모든 자산을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 투자는 언제나 큰 성공을 거뒀다.
심지어 바로 직전에는 미국 빅5 기업 중 하나인 페이스노트마저 침몰시켰다!
단지 공매도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가를 폭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유명세와는 별개로 패밀리 오피스로 운영되는 만큼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언론 인터뷰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록허트 대표와는 달리, 다른 대표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어쨌거나 무일푼이나 다름없던 데이비드 록허트가 컨티뉴 캐피탈을 만든 것에는 그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컨티뉴 캐피탈 공동대표라고?”
“설마 그 한미루?”
“에이버리 본부장과는 무슨 관계지?”
“친한 사이처럼 보이는데.”
“컨티뉴 캐피탈과 PIF는 러시펀드로 협력하고 있으니.”
할리우드 스타, 스타트업 창업자 같이 신흥 부자가 많은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뉴욕에는 역사와 유서가 깊은 전통적인 부자가 많다.
때문에 뉴욕 사교계는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적당히 돈 좀 있는 졸부들은 아예 끼워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적당히’일 때 얘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파티에 참석한 여성들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
“저렇게 젊다고?”
“저 사람이 록허트 대표와 함께 컨티뉴 캐피탈을 이끌고 있다는 거야?”
“대체 재산이 얼마인 거지?”
그의 모습을 보며 한 여성이 눈을 빛냈다.
‘저 사람이 한미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