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뉴욕의 연말 (1)
링크랩스 인수를 위해 데이비드는 직접 본사가 있는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향했다.
페이스노트의 인수 계획이 엎어지는 바람에 당혹스러워하던 창업자들은 컨티뉴 캐피탈이 인수를 제안하자 깜짝 놀랐다.
[일단 루카스 CEO를 한번 만나보고 계약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링크랩스 창업자들이 페이스노트의 인수 협상에 응한 건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 지속적인 투자를 받고, 모기업과의 시너지를 누리기 위함. 과연 스노우 크래시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겠지.
“창업자들을 스노우 크래시로 데려가세요. 시드에게는 제가 말해놓을게요.”
1회차 때는 없었던 일이지만, 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시드는 천재 중의 천재.
두뇌나 신경과 관련된 쪽은 잘 몰라도 컴퓨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다. 아마 링크랩스의 기술 개발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캐머런 호킨스 박사와 빈센트 스완슨 박사가 시드를 만나본다면 페이스노트보다 스노우 크래시에 인수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
난 이어서 스노우 크래시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내 얘기를 들은 시드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어! 정말로 링크랩스 인수하는 거예요?]
“사준다고 했잖아.”
그냥 생색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링크랩스는 컨티뉴 캐피탈이 아니라, 스노우 크래시가 인수해 100퍼센트 자회사로 둘 생각이니까.
사실상 시드가 소유하게 되는 셈이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니까, 니가 잘 한번 얘기해봐.”
시드는 기뻐하며 말했다.
[알았어요. 역시 형이 최고예요.]
“뭘 이런 거 가지고.”
내가 이 정도다.
* * *
달력은 어느새 12월이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지만, 뉴욕의 분위기는 연말을 맞아 한껏 달아올랐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고, 트리와 형형색색의 장식이 반짝거렸다.
이때쯤 되면 회사들은 연말 결산을 하느라 바쁘다.
이는 컨티뉴 캐피탈 역시 마찬가지.
난 1년 동안의 수익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많이 벌었네요.”
모리스 피어슨은 혀를 내둘렀다.
“작성하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누가 이런 수익을 냈다고 저한테 말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1년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좀 많긴 했다.
한정그룹을 몰락시켰고, 블랙우드를 랜섬웨어에서 구해냈으며, 오코너 버거 프랜차이즈를 만들었고, 레전즈게임즈를 인수하고, 브라더후드M 확률조작을 폭로하고, 사마라 회장을 일본에서 탈출시켰다.
역시나 가장 큰 수익을 낸 건 GL케미칼과 GL엔텍 투자.
이 두 건의 투자로만 250억 달러가량을 벌었으니.
여기에 이번에 페이스노트 공매도로 번 180억 달러가 더해지며, 컨티뉴 캐피탈의 보유 자금은 600억 달러로 늘어났다.
알렉스 프레스턴에게 잔금을 지불하고, 다른 기업을 인수했는데도 이 정도인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러시 펀드의 수익은 뺀 거다.
그쪽은 PIF가 알아서 결산하겠지.
난 오랜만에 성윤아와 통화했다.
[무슨 일로 미국에 갔나 했더니, 페이스노트를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네요.]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다 본인들이 자초한 거지.”
[그걸 알린 게 미루 씨 아니에요?]
“그건 내부고발자의 역할이었죠.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칫! 거짓말.]
다시 말하지만, 나 없었어도 일어날 일이었다.
이렇게 설명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성윤아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미국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아직 일이 좀 남아서 내년에나 돌아갈 것 같아요.”
그녀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크리스마스에는 못 보겠네요.]
그러고 보니 작년 크리스마스는 그녀와 함께 보냈다.
같이 백화점에 쇼핑을 갔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주현진을 만났다.
잘살고 있으려나?
한정물산 주총 이후, 주현진은 마약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집행유예로 나왔다는 기사는 본 것 같은데, 그 뒤로는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별 관심도 없고.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이제는 완전히 용서했다.
부디 그가 재벌로서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전화를 끊은 다음 중얼거렸다.
“어느새 또 크리스마스구나.”
컨티뉴 캐피탈 역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다.
기독교인이 많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는 매우 중요한 행사.
미국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주로 가족과 함께 보낸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 노동자. 만리타향에서 홀로 외롭게 방에 있어야 한다.
정확히는 JR블랙우드 스위트룸에. 그나마 방이라도 좋아서 다행이다.
마침 출장을 갔던 데이비드가 돌아왔다.
“크리스마스에는 뭐하시나요?”
내 물음에 그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딸을 보러 갑니다.”
“아, 그렇겠네요.”
어차피 할 일이 없는 만큼 난 그에게 말했다.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정말입니까?”
“예. 오랜만에 메기도 보고 싶어서요.”
“오신다면 환영입니다. 그날은 많은 사람이 오니까요.”
데이비드의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은 뉴욕 최대의 소아병동이다.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에게 뜻깊은 날인만큼,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크리스마스 파티와 이벤트를 연다고 한다.
“빈손으로 가기 좀 그런데, 뭔가 준비할 게 없을까요?”
데이비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코너 버거는 어떻습니까?”
“햄버거를요?”
“예. 메기에게 들으니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직원과 자원봉사자들도 좋아할 겁니다.”
“아하! 좋은 생각이네요.”
햄버거는 미국인들의 소울푸드.
김치 싫어하는 한국인은 있어도 햄버거 싫어하는 미국인은 없다.
오코너 버거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정작 본고장인 뉴욕에서는 펍에서 파는 만큼 아이들이 사먹기 쉽지 않다.
대량 주문이 가능한지 오코너 사장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 * *
난 오코너 펍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게! 오코너 가문의 은인!”
오코너 사장은 반가워하며 나를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낯선 남자의 체취에 숨이 막힐 것 같으니, 제발 이것 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 영업 시작 전이라 사람은 없었다.
“햄버거 먹으러 왔나? 바로 만들어주겠네.”
“그것도 그건데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뭔가?”
얘기를 하려는데 트리시가 들어왔다.
“어! 미루 여기 있었네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코너 사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아픈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햄버거를 대량 주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내 말을 들은 오코너 사장은 보란 듯이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그런 좋은 일이라면 빠질 수 없지! 어차피 크리스마스는 휴무니,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네.”
트리시는 손을 들었다.
“저도 갈게요.”
“트리시도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찡긋했다.
“예. 마침 크리스마스 관련해 어떤 기사를 쓸지 고민 중이었거든요. 뉴욕의 소아병동에서 열리는 파티, 좋을 것 같아요. 병원에 연락해서 취재 허가 받아야겠네요.”
* * *
크리스마스 이브.
난 데이비드의 차를 타고 메기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메기는 요즘 어때요?”
“건강한 편이라 마음이 좀 놓입니다.”
“치료비는 문제없죠?”
“물론입니다.”
처음 그를 스카우팅하며 연봉 10만 달러에 10년 동안 두 배씩 올려주기로 약속했다.
올해 지급할 연봉이라고 해봐야 고작 20만 달러.
하지만 정말로 그만큼만 주는 건 아니다. 각종 수당과 성공보수로 1000만 달러 정도는 지급하니까.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이것도 적은 거다. 실제로 백지수표를 내밀며 오라고 하는 투자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의 차는 연식이 10년 정도 된 중형차.
예전에 중고로 산 자동차를 그대로 타고 다닌다고 한다.
물론 회사차는 따로 있지만, 그는 사적인 일에는 절대 회사차를 이용하지 않는다.
차 정도는 바꿔도 되지 않나? 설마 돈이 없는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는 돈을 주로 어디에 쓰나요?”
“비밀입니다.”
비밀이라고 하니 왠지 더 궁금해진다.
“설마 저 못 믿어요? 우리가 그냥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럼 어떤 사이입니까?”
“음, 또 하나의 가족이랄까요?”
“…….”
데이비드는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뭘요.”
“보스한테만 말하는 겁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사실은 메기 치료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픈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어! 정말요?”
그러자 데이비드가 되물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아니, 뭐…….”
그야 1회차 때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니까.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데이비드는 나중에 아픈 아이들의 치료를 돕기 위한 재단을 설립할 거라는 포부까지 밝혔다.
미국은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국가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해 복지 제도가 그리 잘 되어 있는 편이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만 달러가 넘는 나라지만, 극빈층이 2천만 명에 달한다.
특히나 의료 복지는 사실상 민간의 영역에만 의존하고 있다.
부족한 국가의 역할을 메워주는 것은 바로 기부.
어떻게 보면 국가가 세금을 거둬서 해야 할 일을 개인들에게 맡겨두고 있는 셈이다.
다행인 것은 미국은 기부 문화가 잘 발달돼 있다.
모은 재산을 온갖 편법을 동원해 악착같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한국 재벌과는 달리, 미국 슈퍼리치들 중에는 살아생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냉철한 사업가나 투자자가 자선사업을 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세계 최대 투자자인 에런 화이트도 그렇고, NS 창업자인 베일도 게이츠도 그렇고.
스스로 재단을 만들어서 기부를 홍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사람도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데이비드는 후자인 셈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투자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아마 친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겠지.
“그런데 이걸 비밀로 하는 이유가 있나요?”
“기부자가 알려지면 도움받은 아이들이 기부자에게 고마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특정 개인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사회에 고마움을 가졌으면 합니다.”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이래서 1회차 때도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보스는 그 많은 돈을 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 거기까지는 고민 안 해봤어요.”
일반적으로는 돈을 벌기보다는 쓰기가 훨씬 쉽다.
그러나 이것도 일정 금액을 넘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10조 벌기 VS 10조 쓰기.
언뜻 보면 전자가 훨씬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후자가 훨씬 어렵다. 금을 사더라도 기업이 투자 목적으로 사는 걸 제외하고 순수한 소비로 10조를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집사고, 차사고, 전용기 사고, 요트 사고, 명품 사고 해봐야 1조나 쓸 수 있으려나?
이미 평생 써도 다 쓰기 힘들 만큼 돈을 벌었지만, 계속 투자를 하는 이유는 그게 내 목표이기 때문.
운동선수들이 더 나은 기록을 목표로 하듯, 난 투자자로서 더 많은 수익을 목표로 할 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후대에 천년만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나야 내가 번 거니 이러한 부를 가져도 되지만, 내 자식은 그렇지 않다.
본인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고 싶을 만큼은 주더라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줘서는 안 되겠지.
뭐, 아직 결혼도 안 했으니, 일단 벌면서 어떻게 쓸지는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 * *
소아병동 중앙에는 트리가 들어섰고, 형형색색의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동안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벽에 전시됐고, 트리 앞에서는 합창단과 연주단이 캐럴을 불렀다.
산타복과 루돌프복, 그리고 여러 캐릭터 복장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은 병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꾸러미를 나눠주었다.
아직 어린 중고등학생이나, 온가족이 자원봉사를 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소아병동이 아니라, 파티장 같은 분위기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데이비드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음, 좀 신기해서요.”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애인과 놀거나, 친구들 만나 술 먹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세상에는 배워할 게 참 많다.
우리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메기는 반갑게 소리쳤다.
“아빠!”
“우리 딸 잘 있었어?”
데이비드는 한껏 웃으며 딸을 껴안았다.
평소의 냉철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헤실헤실 웃는 표정을 보니 딸 바보가 따로 없다.
메기는 나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
곱실거리는 금발, 둥그런 얼굴, 빵빵한 볼, 커다랗고 푸른 눈망울,
진짜 너무 귀엽다.
나도 이런 딸이 있으면 딸 바보가 될 것 같다.
잠시 후, 오코너 사장과 트리시가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오코너 사장은 펍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와아! 오코너 버거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어서 직원들과 보호자들에게도 나눠주었고, 다들 맛있게 먹었다.
트리시는 아이들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으로 찍었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마치 아기 천사들 같아요.”
“그러게요.”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낯선 땅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