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새로운 투자 (9)
난 성윤아와 함께 매장에서 차를 수령했다.
취등록과 보험등록은 딜러가 알아서 처리해줬다.
미니 오너가 철저하게 검수해본 결과 차는 아무 이상 없이 깨끗했다. 이걸 이제 여동생에게 전해주면 오늘의 업무가 끝나는 것이다.
난 세나에게 전화했다.
[어, 오빠!]
주변이 좀 시끄럽다.
“뭐하고 있어?”
[여기 지금 홍대 근처 코노. 지금 친구랑 놀고 있는데.]
“…….”
내 동생은 절대 공부를 하지 않는다.
대체 대학은 왜 간 걸까? 남들도 가기 때문에 갔나?
“저녁이나 먹자.”
[나 친구랑 있는데. 친구도 같이 먹어도 돼?]
“그러든지.”
[알았어. 오빠가 이쪽으로 올 거야?]
“그럴까?”
난 전화를 끊은 다음 성윤아에게 말했다.
“저 지금 여동생 만나러 갈 건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괜찮아요?”
“그럼요. 저녁 안 먹어서 지금 배고파요.”
뭐, 본인이 안 불편하다면 괜찮겠지?
“먹고 싶은 거 말해요. 오늘 고생했으니 제가 쏠게요.”
성윤아는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탑 열고 달려요.”
플렉스하기에는 차가 좀 미니한 게 아닌가 싶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자동차 소프트탑을 열고 젊음의 거리 홍대로 향했다.
* * *
금요일 밤에 홍대에 차를 타고 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성윤아는 거리를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 엄청나게 많네요.”
거리 전체가 사람으로 꽉 차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단위 면적당 인구밀도가 전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난 간신히 공영주차장에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자 성윤아는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홍대 안 와봤어요?”
“가끔 오긴 했는데, 이렇게 사람 많은 건 처음 봐요.”
이것이 바로 불금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반쯤 헐벗은 복장이었다. 추위도 젊음의 열기를 이길 순 없는 법이지
차에서 내린 나는 동생에게 전화해 위치를 알려줬다.
잠시 기다리자 세나가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다행히 내 동생의 복장은 단정했다. 엄마 몰래 클럽 갈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나의 옆에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함께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어째 얼굴이 좀 낯익다.
예전에 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어, 너…… 소진이 맞지?”
내 말에 그녀는 얼굴이 밝아졌다.
“맞아요! 오빠, 저 기억하시는구나.”
“그럼. 집에 많이 놀러 왔었잖아. 되게 오랜만이네.”
“예. 3년 정도 됐을 거예요.”
얘 입장에서 3년이면 나한테는 13년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세나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기 때문. 중학생 때는 내가 잠깐 과외 비슷하게 공부하는 것도 가르쳐주고 그랬다.
“못 본 사이 엄청 컸네. 너도 학생이야?”
“예. 지금 강서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이쪽에서 만난 거구나.”
하긴, 얘는 내 동생과는 다르게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오빠는 잘 지내셨어요?”
“응. 뭐, 일하고 있지.”
“세나한테 들었어요. 요즘 엄청 잘나가시고 돈도 많이 버신다구.”
“하하,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세나는 내 옆을 보며 물었다.
“이분은 누구셔?”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DA금융그룹 회장 손녀? 입사 동기?
잠시 고민하는데, 세나가 먼저 말했다.
“어! 설마 여자친구?”
그러자 성윤아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전 미루 씨 입사 동기예요. 성윤아라고 해요.”
“아, 역시. 이렇게 예쁘신데 우리 오빠랑 사귈 리 없죠.”
“…….”
뭐, 인마?
세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한세나예요.”
대충 다 인사를 나눈 뒤.
세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오빠 주변에는 왜 이렇게 예쁜 여사친들이 많아?”
“응? 한 명 소개해줬는데, 많다니?”
그러자 세나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 그, 그랬지. 내가 착각했네.”
“응?”
“아무것도 아니야.”
혼자 비밀 어쩌구 하며 중얼거리는 걸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딱히 궁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
“저녁은 뭐 먹을래?”
세나는 바로 말했다.
“치맥. 우리 오늘 치맥하려고 만났어.”
난 성윤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럼요. 저 치킨 좋아해요.”
대한민국은 널린 게 치킨가게라 굳이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세나가 택한 곳은 한정치킨.
그놈의 한정치킨…….
볼 때마다 치킨집 사장 시절이 생각이 난다. 주현진의 갑질만 아니었어도 장사가 잘됐을 테고, 그럼 내가 회귀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왜 하필 여기야?”
“왜? 오빠 한정치킨 엄청 좋아하잖아. 맨날 한정치킨만 시켜 먹었으면서.”
한때는 그랬었지.
어쨌거나 우리는 가게로 들어갔다.
난 치킨 두 마리와 맥주를 주문하려는 세나에게 말했다.
“맥주 말고 콜라 시켜.”
“아, 왜? 우리 술 마시러 온 건데.”
그야 이따 넌 운전해야 하니까.
난 합리적인 이유를 말해주었다.
“술 섭취는 몸을 무겁게 만들 뿐이지.”
“뭔 헛소리야?”
그냥 헛소리 한번 해봤다.
“이따 운전해야 돼.”
“그럼 난 마셔도 되잖아.”
“…….”
니가 이따 운전해야 한다고.
치킨이 나오자 우리는 콜라로 가볍게 건배했다.
난 한입 먹어본 다음 한때 한정치킨 가맹점주로서 품평을 했다.
“닭 이렇게 튀기는 거 아닌데. 온도를 잘못 맞췄는지 덜 바삭해. 양념도 골고루 안 묻어있고. 이러면 안 돼,”
세나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누가 보면 닭 좀 튀겨본 줄.”
“훗.”
이제까지 내가 튀긴 닭만 수만 마리는 되지 않을까?
사실 나 때는 웬만한 조리는 기계가 다 했다.
장인이 망치를 두드려서 만든 칼보다 기계로 압착해서 찍어낸 칼이 더 성능이 뛰어나듯, 사람 손맛보다는 레시피에 따른 기계의 정확한 조리가 더 맛있는 법.
뭔 반도체도 아니고, 치킨 본사 영업이익률이 30퍼센트를 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어색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성윤아는 세나와 소진이와 금방 친해졌다.
“언니, 너무 예뻐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과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도 어리고 예쁘네요. 저도 대학생 때가 좋았는데.”
덕담 배틀인가?
난 소진이에게 물었다.
“경영학과면 진로는 정했어?”
“예. 졸업하면 금융사에 취직하고 싶어요. 증권사나 사모펀드예요.”
“오, 그래?”
이렇게 또 한 명의 금융 꿈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는구나.
세나는 닭다리를 뜯으며 물었다.
“그런데 오빠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사모펀드에서 일하는 중이지.”
“그럼 일하면서 막 재벌들도 만나?”
“뭐…… 사업상 만날 때도 있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재벌이고. 사업 때문에 만난 건 아니지만.
“아! 맞다. 이거 줄게.”
세나는 가방을 뒤져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동생의 마음이 담긴 선물.”
“응?”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할까?
뭔가 해서 열어보니 키링이다.
“오빠 차키에 달고 다니라고.”
굳이?
난 잠시 키링과 세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어디 아프니?”
“아니, 멀쩡한데.”
“…….”
그런데 왜 안 하던 짓을 해?
세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강력하게 바라는 것 같은 눈빛.
난 그 눈을 보고 뭔가 깨달았다.
“너 눈동자 색이 왜 이래? 써클렌즈 꼈어?”
“갑자기 뭔 소리야? 맨날 끼고 다녔는데.”
왜 난 몰랐지?
어쨌거나 오빠를 챙기는 모습에 살짝 감격스럽다. 갑자기 애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감동했지?”
“감동은 무슨.”
우리는 치킨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공영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세나에게 말했다.
“나도 줄 거 있는데.”
“뭔데?”
“손 내밀어 봐.”
난 그 위에 차키를 올려놓았다.
세나는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한번 눌러봐.”
삐빅!
버튼을 누르자 옆에 있는 차에서 불이 들어왔다.
미니쿠퍼를 본 세나는 괴성을 질렀다.
“우와앙! 미니쿠퍼다. 이거 설마 뚜껑도 열리는 거야?”
“응. 열려.”
“내 거지? 나 주는 거 맞지?”
“사달라며?”
“오빠, 사랑해!”
난 끌어안으려는 세나를 말렸다.
“진정해. 누가 보면 친한 줄 오해할라.”
“잘 타고 다닐게, 오빠.”
“그래. 사고 안 내고 타고 다니면, 나중에 더 좋은 차 사줄게.”
“진짜? 뭐? 설마 페라리?”
“…….”
애가 왜 이렇게 페라리를 좋아해?
뭐, 누군들 안 좋아하겠냐만.
소진이는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좋겠다, 세나야. 나도 이런 오빠 있었으면.”
세나는 차에 올라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소프트탑을 열었다.
“우와! 진짜 열리네. 대박! 오빠, 나 사진 좀 찍어줘.”
세나는 핸드폰을 나한테 건네주었다.
사진을 찍으며 보니 동생이 해맑게 웃고 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세나는 친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운전 잘 할 수 있겠어?”
“그럼. 아빠 차로 엄청 연습했어. 엄마랑 마트도 몇 번 다녀왔고.”
물론 벤츠 S클래스 마이바흐는 아니고, 예전에 아버지가 타시던 10년 된 중형차로 연습했다는 거겠지.
소진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오빠.”
“뭘, 겨우 치킨 가지고. 나중에 놀러 오면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요? 기대할게요.”
세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성윤아는 나에게 말했다.
“인기 좋네요.”
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가 이 정도입니다.”
성윤아는 살짝 눈을 흘겼다.
“그렇게 좋아요?”
“아, 아니…….”
좋아하면 안 되나?
난 인기 좀 있으면 안 돼?
* * *
차를 넘겨주고 나니 우리는 뚜벅이가 됐다.
“이제 어떡할까요?”
“미루 씨만 괜찮으면 좀 더 놀다가요. 저 이 시간에 홍대는 처음이라서.”
나도 오랜만이긴 하다.
아무래도 요즘은 강남을 벗어날 일이 없어서.
“그럼 일단 좀 걸을까요?”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우리는 천천히 홍대 거리를 걸었다.
“세나는 백화점에서 아름 언니 만난 모양인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 가방이 에르메스였잖아요. 그 가방, 등급 낮으면 못 사는 거예요. 그리고 운동화는 구찌던데. 아름 언니가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신발 사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뭐? 그게 정말이에요?”
명품 가방에 명품 신발이라니!
나중에 집 가면 혼 좀 내야겠다.
“어! 몰랐어요? 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몰랐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성윤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죠? 남자들은 가방이나 신발 안 봐요?”
“…….”
봐도 어떻게 알아? 차라리 핸드폰 기종이나 자동차 휠 바뀐 거라면 모를까.
자정이 넘은 시간이지만,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났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토하는 사람, 웃고 떠드는 사람 등등.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들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같이 술 마시자고 꼬셨다.
“아오! 이번에 몇 번째 까인 거지?”
“저쪽에 세 명 온다. 가서 말 걸어봐.”
“좋아! 될 때까지 들이댄다!”
“…….”
저렇게까지 해서 여자와 술을 마셔야 하는 걸까? 그냥 남자끼리 마시면 안 되는 걸까?
성윤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열정이 대단하네요. 홍대에 오니 저 왠지 엄청 나이 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윤아 씨 아직 어린데.”
“정말요?”
“예. 완전 애죠.”
성윤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풋! 애는 무슨.”
회귀하기 전에는 30대 후반이었다.
그 나이쯤 되면 20대는 다 어려 보이기 마련이지.
“미루 씨는 왠지 어른스러운 것 같아요.”
“전 어른이니까요.”
“칫!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길 한쪽에서 남녀가 버스킹 중이었다. 노래는 ‘꿈을 찾는 소녀’.
“이 노래 요즘 인기던데.”
“들어봤어요?”
“그럼요. 좋아하는 노래에요.”
“좀 듣다 갈까요?”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버스킹을 구경했다.
난 성윤아의 옆모습을 힐끔 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 말했다.
“어! 눈이다.”
“진짜네.”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말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성윤아는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올해 첫눈이네요.”
“시간 참 빠르네요.”
벌써 이런 계절이 됐다.
우리는 예전보다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