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새로운 투자 (8)
난 회사로 출근했다.
혼자 있던 동호 선배는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유재호 회장 좀 만나고 오느라구요.”
“아, 그래?”
예전에는 유재호 회장이라고 하면 신기해하는 느낌 같은 게 있었는데, 요즘은 그냥 동네 아저씨 만나고 온 것처럼 반응한다.
“언제 출근했어요?”
“난 정시에 출근했지.”
“성실하네요.”
“그럼. 지사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성격만 보면 적당히 농땡이 치며 월급루팡이나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꽤 성실한 사람이다.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난 회사 안을 둘러보았다.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집기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김범석은 아예 음악 작업을 위한 기기들까지 가져다 놓았고.
“저희 조만간 이사할 거니까, 미리미리 짐 싸놓으세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로 이사하게?”
“유성타운이요.”
“거긴 왜?”
“이번에 유성물산이 유성타운 D동 매각하는 거 알죠?”
“기사 봤어. 진짜 판대?”
“예. 그 건물 저희가 살 거예요.”
동호 선배는 눈을 크게 떴다.
“뭐? 우리가 산다고?”
“예. 쿨거래하면 좀 싸게 준대요.”
“흠, 쿨거래는 깎아주는 게 국룰이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런 대형 빌딩은 거래하는 데 있어서 부대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게다가 건물 관리는 유성물산에, 경비는 와이원에 그대로 맡기기로 했다.
저쪽 입장에서는 건물 매각 후에도 장기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니, 그만큼 가격을 낮출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인데?”
“7천억 조금 넘지 않을까요?”
“음, 맨날 조 단위로 얘기하다가 7천억이라고 하니까 되게 싸 보인다.”
“그렇죠?”
나만 그런 거 아니지?
“그동안 니가 해준 거 생각하면 그냥 줘도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유재호 회장 개인 건물은 아니잖아요.”
유성물산 주주들의 소중한 자산이다. 따라서 매각 절차 역시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근데 굳이 이사할 필요가 있어? 어차피 셋밖에 없잖아.”
이게 가능한 건 나머지 업무를 전부 본사에 외주를 줬기 때문.
지사가 본사를 서포트하는 게 아니라, 본사가 지사를 서포트하는 상황이다.
“언제까지 우리 셋이 오붓하게 있겠어요? 이제부터는 인원도 늘어날 텐데 미리미리 대비해 놔야죠.”
엔터산업에 투자하는 투자부서와 패션산업에 투자하는 투자부서를 따로 둘 생각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보안이 너무 안 좋아요.”
“보안이 뭐가 필요해?”
“간판을 안 걸어놔서 그렇지, 여기가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게 알려지면 돈 날린 사람들이 몽둥이 들고 쳐들어오지 않을까요?”
“아, 그럴 수 있겠네. 유성타운 건물이면 보안 하나는 끝내주지. 거기는 노조가 몰려와서 시위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잖아.”
“그렇죠.”
얘기를 하는데 마침 김범석이 들어왔다.
동호 선배는 친구에게 말했다.
“야! 우리 이사할 거래.”
“어디로?”
“유성타운으로.”
“응?”
난 김범석에게 건물을 사게 될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아예 메이블 엔터도 입주하라고 권해보세요. 임대료 싸게 준다고. 소속사 왔다 갔다 하려면 귀찮잖아요.”
그 말에 김범석보다 동호 선배가 더 좋아했다.
“오! 좋은 생각이야. 그럼 루나틴즈도 볼 수 있겠네.”
“…….”
그저 머릿속엔 걸그룹 생각!
“매수가 끝나면 유성타운으로 들어가는 거야?”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 있나요? 지금도 비어있는 곳 많은데.”
현재 계열사들이 빠져나가며 빈 층들이 많다.
매각할 계획이었던 만큼 그 뒤로도 임대를 들이지 않았다. 원래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만큼 딱히 내부공사할 필요도 없다. 집기만 좀 가지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동호 선배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임대도 아니고, 사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아. 역시 한국인은 부동산이라는데, 나에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나 봐.”
“감동은 나중에 하고, 유성물산 찾아가서 매수 협상 좀 하고 와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응? 내가?”
“그럼 누가 가요?”
“저쪽에서는 누가 나오는데?”
그냥 빌딩도 아니고, 상업용 빌딩 중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거래 금액이다.
이 정도면 아마도…….
“건설부문급 사장이 직접 나오지 않을까요? 이름이 최만부였나?”
“……응?”
동호 선배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아파트 거래 한 번 안 해본 사람한테 7천억짜리 오피스 건물을 협상하고 오라는 게 말이 돼?”
“걱정할 것 없어요.”
“어떻게 걱정이 안 돼? 건설부문 본사는 용산에 있지 않아? 가격 물어보고 안 산다고 하면 ‘손님 맞을래요?’라고 하는 거 아니야?”
“…….”
대체 용산은 어떤 곳이지?
“그쪽에서 알아서 가격이랑 조건 제시할 거예요. 설마 아는 사이에 후려치겠어요?”
“원래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야. 너 민식이 알지? 걔 중고차 딜러인 친척한테 중고차 샀다가 수리비가 차값만큼 깨졌어.”
“아, 민식이한테 그런 안타까운 일이.”
민식이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래서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이 허용돼야 하는 거다.
하지만 이건 믿고 살 수 있는 대기업 물건이니 안심해도 좋다. 수십조짜리 사업을 같이하는 판에 고작 수천억짜리 건물을 후려치겠는가?
“내가 유성물산 사장이랑 건물 매매 협상이라니…….”
난 급격하게 위축되려는 동호 선배에게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이 왜 이렇게 소심해요? 전자라면 모를까 물산에 밀릴 것 없어요.”
“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아직 소시민 증후군 같은 게 좀 있어.”
“…….”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안다.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다가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진 거라 충분히 이해한다.
난 동호 선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딴 거 버리고, 어깨 쫙 펴고 당당하게 다녀와요.”
* * *
난 DA증권 본사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여의도도 오랜만이구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왔기 때문인지, 거리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 표정만 봐도 오늘 시장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이 된다.
잠시 기다리자, 성윤아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어요?”
“저도 방금 왔어요.”
사복 입은 모습도 예쁘지만, 역시 정장을 입은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 표정을 보니, 막판에 장이 좀 올랐나 보네요.”
“1퍼센트 넘게 하락했는데요.”
“예? 그런데 왜 다들 표정이 좋지.”
“금요일이잖아요.”
“아…….”
내일부터 주말이면, 돈 날려도 웃을 만하지.
예상이 틀린 게 뻘쭘해서 난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여의도는 여전히 직장인들이 많네요. 저도 여기서 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실제로 얼마 안 됐잖아요.”
난 교수에게 들은 얘기를 떠올렸다.
“왜 여의도가 한국의 금융중심지가 됐는지 알아요?”
“흐음, 왜 그런데요?”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 같은 표정이다.
“대충 80년쯤에 정부가 한국의 월스트리트를 만들겠다고 여의도에 금융업을 유치하기 시작했거든요. 먼저 명동에 있던 한국증권거래소가 이전했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금융기관들도 함께 이전했죠.”
금융과 산업은 양쪽 날개와도 같다.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 때문에 산업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어느 나라든 금융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한국은 서울 여의도를 금융중심지로, 중국은 상하이 푸동을 금융중심지로 육성했다.
“거래소가 가니 증권사들은 알아서 따라왔죠.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만, 당시만 해도 직접 거래소에 갈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는 거래소와 거리가 가까울수록 주문 들어가는 속도가 빨랐대요.”
성윤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지 않을까요? YK증권사만 해도 자신들은 거래소와 같은 건물을 쓰기 때문에 서버를 거치지 않아 주문 전달 속도가 0.004초 빠르다고 주장하고 있잖아요.”
0.004초면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금융시장에서는 0.001초에도 수백, 수천억이 왔다 갔다 한다.
주식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주문은 0.1초라도 빠른 사람이 먼저 체결된다. 동시에 들어갈 경우 물량이 많은 쪽부터 체결되고.
실제로 인터넷망, 서버, 날씨 등의 약간의 변수에 따라 속도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
증권사들의 경우 대부분 거래소와 연결된 직통회선을 사용한다. 수많은 거래를 처리할 수 있도록 안정성이 높고 속도도 더 빠르다.
똑같은 정보를 동시에 얻어도 기관이 개인보다 빠르게 매매를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거래소 이용이 많은 증권사들은 여의도에 몰려있는 반면, 사모펀드들은 강남에 뿔뿔이 흩어져 있죠.”
“광화문과 종로 쪽에도 많지 않아요?”
“그쪽에는 대사관들이 몰려 있잖아요. 그래서 외국계 금융사들이 선호하죠.”
“아하!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성윤아는 빨대로 커피를 저으며 물었다.
“낮에는 뭐했어요?”
“유재호 회장을 만났어요.”
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해주었다.
성윤아는 깜짝 놀랐다.
“어! 유성타운 건물을 산다구요? 그거 매각 주관사 따내려고 여러 곳에서 경쟁 중일 텐데.”
이 정도 건물이면 거래수수료만 해도 백억 대다. 눈에 불을 켜도 달려들 만하지.
난 어깨를 펴고 턱을 들며 말했다.
“저 이제 강남 건물주입니다.”
이쯤 되면 카프리아TV에 접속해 BJ에게 달풍을 쏴줄 자격이 생기지 않았을까?
성윤아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멋있어 보이는데요.”
잡담이 대충 끝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만난 이유는 지난번 계약한 미니쿠퍼가 출고되는 날이기 때문.
“저 혼자 받으러 가도 되는데.”
“제가 소개해줬는데 끝까지 책임져야죠.”
“책임질 게 있나요?”
“뭐, 엔진에 이상은 없는지, 차가 잘 나가는지 등등.”
“그걸 볼 줄 알아요?”
성윤아는 자신있게 말했다.
“왜 이래요? 저 미니 오너에요.”
“알아요. 회사에도 가끔 타고 왔었잖아요.”
그래서 딜러를 소개해달라고 한 거였고.
“그러고 보니, 미루 씨 동생은 뭐하고 있어요? 직장인? 사업?”
“대학생이에요. 이제 2학년.”
“어! 그럼 나이 차이가 꽤 나네요.”
“그렇죠.”
“혹시 동생도 한국대?”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인천 저어어기 어딘가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어요.”
“학생 때 미루 씨가 공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사실 부모님도 좀 기대했다.
내가 열심히 가르치면 혹시 세나도 좋은 대학 가는 거 아닌가, 하고.
하지만…….
“좀 가르쳐본 결과 깨달았죠.”
“뭘요?”
“세상에는 공부를 해도 되는 애와 안 되는 애가 있다는 걸요.”
안타깝게도 내 여동생은 후자였다.
부모님도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원래 공부를 강요하는 편도 아니고.
성윤아는 턱을 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루 씨는 정말로 동생을 좋아하나 보네요.”
“왜 그런 오해를 해요?”
“그거 알아요? 미루 씨 동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웃는 거.”
“……제가요?”
그건 아까부터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오빠가 첫 차로 미니를 사주다니. 부럽네요.”
“윤아 씨 미니도 부모님이 사준 거 아니에요?”
“에이, 엄마가 사준 거랑 오빠가 사주는 건 다르죠.”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다르다면 다른 거겠지.
“그러고 보니 미루 씨 첫 차는 뭐였어요?”
난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첫 차는 잘 모르겠고, 한때 오토바이를 열심히 탔죠.”
“어! 오토바이 라이딩이 취미에요?”
“취미는 아니고, 비즈니스 때문에요.”
“무슨 비즈니스요?”
난 씨익 웃었다.
“훗, 자랑 같아서 말 안 하려 했는데, 제가 소싯적에 치킨 배달의 기수였습니다.”
성윤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보통 배달 알바라고 하지 않나요?”
난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설명해주었다.
“노노. 그냥 알바가 아닌 ‘치킨이 식기 전에 고객 입속으로’라는 사명감과 주인의식을 갖고 일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었으니까.
참고로 그룹이 해체되면서 한정치킨은 미국계 사모펀드에 팔렸고, 지금도 잘나가는 중이다. 어쨌거나 치킨은 맛있으니까.
“그런데 오토바이는 좀 위험하지 않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죠. 엄청 위험해요.”
사실 오토바이의 위험성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사고 한번 잘못 나면 10년을 회귀하는 수가 있다.
혹시 또 회귀할까 봐 걱정돼서 이제는 두 바퀴 달린 건 거들떠도 안 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