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새로운 투자 (6)
허민홍이 직접 만나본 한미루의 모습은 의외로 평범했다.
하기야 그는 재벌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권사를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재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한미루라는 존재는 평온하던 재계에 나타난 포식자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름이 재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한정그룹 사태 당시.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그가 한국 10대 재벌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한정그룹의 해체였다.
그나마 한정그룹은 10대 재벌 중 말석이었고, 이전부터 문제가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GL그룹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로 인해 재벌을 규제하는 법안마저 통과되며 상당수 재벌의 손발이 묶였다.
손해는 재벌들이 보고, 이익은 컨티뉴 캐피탈이 챙겨간 상황.
컨티뉴 캐피탈이 지닌 막강한 자금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운용하는 사모펀드의 경우 투자자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외부 투자 없이 개인자산으로 운용되는 패밀리 오피스는 그저 오너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자금을 집행할 수 있다.
컨티뉴 캐피탈의 대표는 데이비드 록허트.
하지만 한국에서의 투자는 사실상 한미루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L엔텍 사태 당시 거의 모든 증권사들이 피해를 입을 때도 화안증권은 위험을 비껴갔다.
한미루와 화안증권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허민웅.
덕분에 그룹 내에서 허민웅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럴수록 허민홍을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 넥스트로젠이 수소차 플랫폼을 성공적으로 공개하며, 화안그룹 내에서 시총이 뒤집히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때 내가 직접 미국을 갔더라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허민홍은 씁쓸한 심정을 숨긴 채 말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소 산업에 있어서 화안에너지는 매우 중요한 파트너니까요.”
허민홍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한미루는 그 손을 붙잡았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 * *
난 허민홍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나를 만나자고 한 건 자신이 그룹을 물려받더라도 협력 관계는 변함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누구랑은 다르게 좋은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난 허민홍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로군.]
“예. 오랜만이네요, 회장님.”
[오늘 시간 괜찮나? 이따 술 한잔 했으면 하는데.]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다.
“어디로 갈까요?”
* * *
밤 9시 반.
술 한잔 하자기에 와인바나 위스키바를 생각했는데, 약속장소는 종로 부근의 한 김치찌개집이었다.
난 영업종료 간판이 걸린 가게 앞으로 다가섰다. 밖에 있던 경호원은 문을 열어주었다.
“회장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허성훈 회장이 앉아있었다. 그 외에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다.
“지난번에는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쳐들어오더니, 요즘에는 왜 안 놀러 오나?”
“놀러 가도 되나요?”
“그럼. 언제든 환영이네.”
난 빈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때 말씀하신 김치찌개 맛집이 여기인가요?”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절부터 자주 왔던 곳이네.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어디를 가든 시켜 먹는데 도저히 여기서 먹는 맛이 안 난단 말이지. 소고기나 회는 비쌀수록 맛도 올라가지만, 김치찌개는 그렇지가 않아. 호텔에서 10만 원에 파는 김치찌개가 시장에서 파는 1만 원짜리 김치찌개보다 꼭 맛있는 건 아니지.”
“그야 주재료가 김치니까요.”
집집마다 김치 맛은 차이가 나기 마련.
그래서 김치찌개는 어느 집이 더 맛있다고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힘들다.
“바로 그거네. 결국 이 맛을 즐기려면 이곳에 올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옴니보어(Omnivore)는 용어가 있다.
하류층은 하류층의 문화만 즐기지만, 상류층은 상류층의 문화만 즐기는 게 아니라 하류층의 문화까지 같이 즐긴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은 호화 저택에 살면서 전용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햄버거를 즐겨 먹는다.
돈이 있으면 김치찌개든 최고급 스테이크든 골라 먹을 수 있고, 배낭여행과 초호화 크루즈 여행 중 선택할 수 있다.
좋은 한식당이나 비싼 호텔 레스토랑 놔두고 허성훈 회장이 굳이 이곳을 찾아오는 건, 그저 그의 입맛에 잘 맞을 뿐이겠지.
“설마 가게를 통째로 빌리신 건 아니죠?”
“하하, 여기는 9시면 닫네. 그러니 이건 연장영업인 셈이지.”
대화를 하는 사이 주인이 양푼에 담긴 김치찌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허성훈 회장은 그에게 말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 나 때문에 일찍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러자 젊은 사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렇게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새벽에라도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다.
“주인이 친절하네요.”
“자랑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여기 건물주네.”
“정말요?”
“한 20년쯤 됐나? 건물주가 재건축을 하겠다고 쫓아내겠다고 하는 바람에 문을 닫을 상황이었지. 하지만 난 이곳이 좋단 말이지. 맛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그래서 이 건물을 내가 샀네. 그래서 이렇게 대를 이어 가며 장사를 하는 중이지.”
좋아하는 맛집을 지키기 위해 건물을 사다니.
역시 소문대로 화끈하다.
얘기를 하는 사이 김치찌개가 끓기 시작했다.
“이제 들지.”
우리는 각자 떠서 먹기 시작했다.
허성훈 회장은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맛이 어떤가?”
맛있긴 한데, 사실 엄청 특별하거나 대단한 맛은 아니다. 근처에 있다면 가끔 왔겠지만, 멀리서 올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럴 때는 맛있다고 리액션을 해주는 게 예의겠지?
“이렇게 맛있는 김치찌개는 처음입니다. 왜 회장님께서 좋아하시는지 알 것 같네요.”
허성훈 회장은 기분 좋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지? 여기 데려온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군.”
“…….”
회장님이 맛집이라고 데려왔는데 맛없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잔하지.”
난 그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았다.
그는 잔을 가볍게 부딪친 다음 소주를 들이켰다.
“이번에 큰돈을 벌었다고 들었네만.”
“제 돈도 아닌데요.”
“그중 10퍼센트만 해도 우리 그룹 1년 영업이익과 맞먹지 않나?”
사모펀드의 경우 큰 투자를 성공시켰을 때 운영팀들이 수십 퍼센트씩 성공보수를 챙긴다. 내 몫으로 10퍼센트 정도는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재벌그룹도 아니고 한 개인이 2조를 넘게 벌어들였다고 하면 기가 찰 일이겠지.
“우리 때 금융이라고 하면 그저 돈을 빌려주는 역할만 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어. 허석윤이한테 들으니 덕분에 화안증권이 위험을 피했다고 하더군. 고맙네.”
“뭐, 저도 도움을 받았는데요.”
“화안증권쯤이야 뺐어도 계획을 진행하는 데는 별 상관없지 않았나? 거래와 호의를 구분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구요.”
“낮에 민홍이를 만났다지? 아!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감시한 건 아니니까.”
아마 허민홍 비서실에서 보고한 모양이다.
“예.”
“무슨 얘기를 했나?”
어차피 짐작하고 있을 테니, 난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누가 그룹을 물려받을지 걱정이 많은 모양이던데요.”
“그렇군.”
허성훈 회장은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내가 몇 살에 회장이 됐는지 아나?”
“스물여덟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덜컥 회장이 됐지.”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테니, 일단 회장 자리에 앉아서 하나씩 배워나갔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창업주였다.
온가족이 힘을 합쳐 그룹을 일군 만큼, 아버지의 형제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조력자가 아닌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나이 많은 가신들에게 일부러 호통을 치고 반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허민웅이 안하무인으로 반말하고 다닌 것도 혹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허성훈 회장은 화안그룹을 지금의 초거대 그룹으로 키워냈다.
그는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일 끝내고 동료들과 술 마시던 도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수십 년이 지났군. 내가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게 가끔은 믿기지가 않아. 앞으로 천년만년 회장직에 있을 것도 아니니 슬슬 누구에게 그룹을 물려줄지 정해야 할 텐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엔플 창업자 이름은 알아도 그 자식 이름은 모른다. NS나 AMZ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은퇴할 때가 되면 전문경영인에게 자리를 넘기고 떠나니까.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한국 재벌들은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자식 농사라는 게 그룹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첫째 녀석은 다행히 내 말을 잘 따라줬지. 둘째 녀석은 진작 포기했네. 뭐, 자식 농사라는 게 다 잘될 수는 없는 거고, 한 놈만 제대로 건지면 되는 거니,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뒀는데, 이번에 아주 대형사고를 쳤어.”
“토머스 모터스 얘기인가요?”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조언해준 덕분이겠지만.”
“허민웅 부사장이 제 조언을 들은 덕분이기도 하죠.”
“그게 중요하단 말이지. 회장은 꼭 똑똑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회사에 똑똑한 놈들은 많으니까. 중요한 건 따라야 할 조언과 아닐 조언을 구분해내는 거지. 놀기만 할 줄 알았던 놈이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태양광이 모내기라면, 수소는 금광 채굴이다.
전자가 투자한 만큼 수익을 거둘 수 있다면, 후자는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대박이 터질 줄은 몰랐겠지.
중요한 것은 수소트럭은 수소 경제의 서막일 뿐이라는 거다. 그리고 화안에너지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분명 앞서 있다.
이건 전부 허민웅의 공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둘째 녀석의 덩치가 너무 커졌어. 이대로라면 자식들끼리 치고받고 싸울지도 모르지. 그러다 보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거고. 죽은 뒤라면 모를까 살아생전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그 사이에 경영권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는데, 형제끼리는 오죽하겠는가?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대체 내가 왜 재벌그룹의 후계 상담까지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허성훈 회장은 두 아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달라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컨티뉴 캐피탈은 넥스트로젠과 사우디 자본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난 내가 아는 정보를 종합해 냉정하게 판단했다.
“먼저 허민홍 부사장이라면 이제까지 그래왔듯 화안그룹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겁니다.”
“흠, 그런가?”
“예.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서 아는데, 성실하고 믿을 만한 경영자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자식 칭찬하는데 싫어할 부모는 없다.
허성훈 회장은 흡족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허민웅은 어떨까?
그는 원래 토머스 모터스 때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이후에는 적당한 계열사 하나 받아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 그가 화안그룹을 맡아 잘 경영할지 못 할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허민웅 부사장에게는 형에게는 없는 큰 장점이 하나 있죠.”
“그게 뭔가?”
“저랑 친합니다.”
허성훈 회장은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장점이라는 건가?”
난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내 말에 허성훈 회장도 피식 웃었다.
“거, 무슨 실없는 농담을.”
말은 농담이라고 했지만,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인맥은 중요하다.
그리고 나만한 인맥은 쉽게 찾기 힘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