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새로운 투자 (4)
신세기그룹 막내딸 민아름.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는 예술고를 나왔고, 이후 미국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로 유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하지만 패션이란 마치 예술과도 같아서,피나는 노력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디자이너로서 본인의 한계를 느꼈지만, 대신 여러 사람들과 인맥을 쌓고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민아름은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와 언니가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그룹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패션 관련 계열사를 맡는다고 해도 그저 오빠와 언니를 서포트하는 위치에 머무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루가 그녀에게 한 제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지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유통하는 것을 넘어서, 패션 자체가 온라인으로 진출한다고?’
처음에는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조사해보니 허황된 얘기가 아니었다.
메타버스 속의 패션인 메타패션(Meta Fashion)은 현재 태동 단계.
발 빠른 패션 업체들은 이미 디지털 세계에 뛰어들어 자사 브랜드를 홍보하고 판매하고 있었다.
이 시장을 선점한다면 겨우 한국 시장만 장악하고 있는 신세기 백화점이나 마트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컨티뉴 캐피탈과 손을 잡으면 그녀만의 패션 왕국을 세우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이제 신세기그룹 같은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아름은 사촌오빠인 유재호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알고 지내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게 됐네.”
* * *
민아름은 주말에도 백화점으로 출근했다.
원래 오늘은 성윤아와 함께 친구들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며 미안하다고 취소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말은 안 했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좋을 때네.’
아무래도 서비스 업종이다 보니, 백화점에서는 매일같이온갖 사건사고들이 벌어진다.직원의 실수, 고객의 갑질, 결제 오류, 도난 등등.
대부분은 매뉴얼에 따라 실무자들 선에서 정리하기에 그녀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터폰이 울렸다.
[명품관 구찌 매장입니다. 이사님 회원권으로 발행된 상품권이 방금 결제됐습니다.]
‘미루 씨가 윤아랑 쇼핑하러 왔나?’
“잠시만요. 바로 내려갈게요.”
그녀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바로 1층 명품관으로 내려갔다.
구찌 매장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넷이 함께 있었다.
그중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오빠가 생일선물로 준 거예요. 전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 말에 민아름은 반갑게 물었다.
“오빠요? 혹시 미루 씨 동생이에요?”
* * *
한세나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아까는 없던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피부, 화장, 액세서리, 귀걸이, 구두,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외모 전체에서 고급스러움과 세련미가 가득했다.
‘우와! 엄청 예쁜 사람이네.’
높은 사람인지 그녀의 등장에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쨌거나 이런 사람까지 등장했다는 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아! 오빠 때리고 싶다.’
어쩐지 요즘 들어서 잘해준다 했더니 이런 함정이 있었을 줄이야.
일단 무조건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미루 씨 동생 맞죠?”
“마, 맞는데요…… ”
‘이 사람이 우리 오빠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녀는 생긋 웃었다.
“어머! 반가워요. 미루 씨한테 여동생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네요.”
“누, 누구세요?”
“전 민아름이라고 해요. 미루 씨랑은 친구예요.”
“예? 저희 오빠랑요?”
‘우리 오빠가 이렇게 예쁜 여자랑 친구라고?’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내가 어디서 봤더라?’
그 순간, 정소진이 소리쳤다.
“어! 민아름이면…… 혹시 그분 맞아요?”
“와! 어떡해?”
“진짜인가 봐.”
한세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러자 정소진은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세기그룹 막내딸이잖아. 패션 셀럽.”
“뭐!?”
당연히 알고 있다.
민아름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웬만한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했다. 부와 미모, 그리고 패션 센스까지 다 갖춘, 그야말로 여자들의 워너비랄까?
더더욱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우리 오빠와 친구일 리가…….’
친오빠가 알고 보니 재벌가 딸과 친구라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다.
한세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카드 제가 미루 씨한테 준 건데요.”
“예? 그, 그럼 진짜 우리 오빠랑 친구예요?”
민아름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희 엄청 친해요. 자주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파티도 같이 갔는걸요.”
“…….”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 * *
민아름은 그녀들을 VIP라운지에 있는 카페로 데려갔다.
정소진을 비롯한 친구들은 작은 목소리로 한세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 이런 데 처음 와봐.”
“이거 몰래카메라는 아니지?”
“나, 나도 몰라.”
사실 지금 상황이 가장 믿기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한세나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민아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운이 좋네요. 이렇게 미루 씨 동생도 다 만나고.”
한세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오빠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예요?”
“미루 씨 예전 회사 동기가 저랑 친한 동생이거든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요.”
“아…….”
‘그런 걸로 친해질 수가 있나?’
정소진과 친구들은 용기 내서 말했다.
“언니, 너무 예쁘세요.”
“저 팬이에요.”
“전 오래전부터 린스타 팔로우했어요.”
“고마워요.”
민아름은 한세나를 보았다.
남매라 그런지 한미루와는 안 닮은 듯하면서도 눈매와 입가가 닮았다.
키는 작은 편에 염색한 금발은 말아올려 당고머리를 만들었고다.
여성스럽다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으로 복장은 맨투맨에 청바지, 신발은 캔버스화라는 대학생룩이다.
‘상품권을 동생한테 줬구나.’
한미루와는 앞으로 사업을 같이할 사이.
가족에게 눈도장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허민웅이 한미루네 아버지한테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고 있다. 최근에는 골프 레슨도 해준다고 하던데…….
‘나도 질 수 없지.’
민아름은 한세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생일이라 친구들이랑 쇼핑하러요.”
“어머! 생일이었구나. 축하해요.”
“가, 감사합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생일선물로 하나 사줄게요.”
한세나는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아요.”
정소진이 재빨리 말했다.
“얘 가방 사고 싶대요. 저희 아까 에르메스 매장도 갔었어요."
“아니, 넌 그 얘기를 왜…….”
그러면서 슬쩍 눈빛을 보냈다.
‘잘했어,정소진.’
‘뭘.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민아름은 웃으며 물었다.
“에르메스 좋아해요?
“조, 좋아하죠.”
‘없어서 못 들고 다닐 뿐이지.’
있으면 잘 들고 다닐 자신있다.
“으음, 그런데 너무 비싼 거 사주면 미루 씨가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예?”
‘아니, 오빠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민아름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약속 하나 해줄래요?”
“무슨 약속이요?”
“오늘 일은 우리끼리 비밀로 하기로.”
한세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럼요. 저 약속 잘 지켜요.”
친구들도 일제히 말했다.
“저희도 비밀로 할게요.”
모두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민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쇼핑을 시작해볼까요?”
* * *
퍼스널 쇼핑룸에 있으면 직원들이 알아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올라온다.
하지만 민아름은 일부러 한세나와 친구들을 매장으로 직접 데려갔다.
“대학생이 가지고 다닐 만한 토드백 좀 보여주세요.”
처음 온 손님은 못 사는 물건이라 아까는 구경도 못 했지만, 민아름과 함께 가자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직원들은 가방을 꺼내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거 어때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꼭 명품이라서가 아니라 민아름이 골라준 가방은 한세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가방에 이름이라도 붙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가격표를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이게 대체 얼마야?’
친구 중 한 명이 명품 사겠다고 카페에서 알바 중인데, 만약 이 가방이 목표라면 상하차로 업종을 변경해 몇 달을 일해야 할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받을 만한 선물은 아니다.
“저, 저기…….”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너무 비싼 것 같아서요. 오빠 알면 혼날 것 같은데.”
민아름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괜찮아요. 미루 씨는 둔해서 여자 가방 같은 건 잘 모를 테니.눈앞에서 들고 다녀도 어떤 브랜드인지 모를걸요.”
“우리 오빠가 좀 둔하긴 하죠.”
“혹시 걸리면 레플리카라고 우기면 돼요.”
“앗! 그런 좋은 방법이.”
얘기를 하는 사이 민아름은 가방을 결제하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요.”
한세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쇼핑백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언니.”
“어머! 언니요?”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언니라고…….”
정소진은 옆에서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사주면 무조건 언니지.’
민아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너무 듣기 좋은데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줘요.”
“정말요? 그럼 언니도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민아름은 이번에는 신발을 보며 말했다.
“신발이 좀 낡은 것 같은데, 운동화도 하나 살까?”
“예? 아, 아니에요, 언니. 가방 사주신 걸로 충분해요.”
“밑창도 많이 까진 것 같은데. 미끄러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온 김에 사자.”
‘그, 그래. 운동화 정도라면 괜찮겠지?’
백화점에는 나이키와 아디다스 매장도 있으니, 적당히 싼 걸로 하나 고르면 될 것이다.
그런데 민아름이 데려간 곳은 아까의 구찌 매장.
“230 맞지?”
“맞긴 한데…….”
어느새 한세나의 발에는 낡은 운동화 대신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명품 운동화가 신겨졌다.
“우와!”
“디자인 너무 예쁘다.”
친구들은 그저 감탄만 연발했다.
민아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친구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받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잘못했다가는 질투와 시기로 번질 우려가 있다.
다행히 민아름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예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세나 생일 기념으로 친구들도 옷 한 벌씩 사줄게.”
“저희도요?”
“응.”
민아름은 한세나와 친구들을 여성 의류매장으로 데려가서 직접 골라주었다.
명품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게다가 뛰어난 패션 센스답게 고른 옷들은 하나 같이 잘 어울렸다.
정소진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 정말 받아도 되는 거예요?”
“그럼. 세나 생일이니까.”
“감사합니다!”
쇼핑이 끝난 후.
민아름은 청담동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저녁을 사줬다.
이런 곳은 처음이다 보니 다들 먹기보다는 사진 찍기 바빴다.
‘오빠가 내 인생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한세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언니.”
“앞으로도 백화점에 자주 놀러 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앞으로는 올 때는 픽업 서비스 이용해. 그 카드에 적혀있는 번호로 미리 예약하면 차량이 모시러 갈 거야.”
내친김에 두 사람은 연락처도 교환했다.
민아름은 돌아가는 차량까지 불러줬고, 네 사람은 차에 올라타 편하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녀들은 쉽게 여운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다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나야, 이게 꿈은 아니지?”
“아무래도 꿈인 것 같아.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오빠는 웬수나 다름없는데. 나도 그런 오빠 있었으면…….”
부러워하는 친구들을 보니, 저절로 어깨가 올라갔다.
“뭐, 우리 오빠가 나한테 껌뻑 죽긴 하지. 여동생 바보랄까?”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한세나의 집에 놀러갔던 정소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런데 너희 오빠는 무슨 일을 하는 거야?”
“그건…….”
대답을 하려던 한세나는 멈칫했다.
‘그러게. 우리 오빠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