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새로운 투자 (3)
가족끼리 식사를 끝마친 후.
난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일도 바쁠 텐데 오늘 세나 생일파티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 어렸을 때는 둘이 싸우기만 하더니, 그래도 오빠라고 동생 생일 챙겨주는 거 보니 다 컸구나.”
“…….”
사실 생일인 줄도 몰랐다.
기왕 이렇게 오해하는 거 난 뻔뻔하게 말했다.
“제가 신경 좀 썼습니다.”
동생과 부모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이런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게 효도 아니겠나?
“요즘 많이 바쁘시죠?”
“뭐, 그렇지.”
“박용진 부사장은 잘하고 있구요?”
“그럼. 박 부사장이 일을 아주 잘해. 아주 그냥 시키지 않아도 척척이야. 너무 잘해서 미안할 정도더라.”
대기업 전무 출신이니 일솜씨야 말할 게 없을 것이다.
아버지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병진공업은 아버지에게 또 하나의 자식과도 같다. 평생을 바친 회사가 나날이 커지는 걸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겠지.
아버지는 소주를 몇 잔 마신 다음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대체 넌 무슨 일을 하는 거냐? 민웅 씨한테도 물어보고, 박용진 부사장한테도 물어봤는데 다들 너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던데.”
“음…….”
하기야 허민웅과 박용진이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내가 보통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작 눈치채셨겠지.
어차피 언제까지고 계속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라면 슬슬 아실 때가 됐지.
“사실 제가 투자사를 하나를 운영 중이거든요.”
“거기에 다니는 게 아니라 니가 운영한다고?”
“예.”
“흐음, 그래?”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셨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진짜 놀랄 일은 이제부터지.
“그 회사 이름이 컨티뉴 캐피탈입니다.”
“컨티뉴 캐피탈이면…… 설마 한정그룹을 해체하고, 이번에 GL그룹을 털어먹은 거기를 말하는 건 아니지?”
“거기 맞습니다.”
“……응?”
아버지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허억! 내 아들이 컨티뉴 캐피탈을 운영한다고?”
“예. 혼자는 아니고 록허트 대표랑 같이요.”
“그거 미국 투기자본이라고 요즘 뉴스에 엄청 나오던데.”
“뭐, 회사는 미국에 있으니까요.”
“대체 어떻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니, 대체 뭘 어쩌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냐?”
“이게 또 설명하자면 깁니다.”
회사를 이만큼 키우기까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아버지는 일단 소주를 몇 잔 더 마셨다.
“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아버지께서 잘 키워주신 덕분입니다.”
“난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제가 알아서 잘 컸나 봅니다.”
이 회사가 순수한 내 회사라고 하면 뒷목 잡고 쓰러지시지 않을까?
“그, 그럼 민웅이랑은……?”
“일 때문에 만나서 친해졌어요.”
정확히는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친한 척한 거지만.
“그, 그래? 그럼 재벌 회장들도 만나고 그러니?”
“허성훈 회장도 만나봤고, 유재호 회장도 가끔 보고 그래요.”
“뭐, 뭐? 유성그룹 유재호 회장을 만나봤다고?”
“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재벌이 주는 임펙트가 큰 법이지.
“이거 참. 회사 그만뒀다고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이렇게 성공할 줄이야.”
“이제 시작이죠. 아직 성공하려면 멀었어요.”
“그, 그래?”
“어머니랑 세나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괜히 걱정하실 테니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돈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항상 건강이 우선이라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난 아버지와 소주잔을 부딪쳤다.
* * *
난 주말에 성윤아를 만났다.
“그냥 딜러만 소개해주면 되는데.”
“그래도 제가 같이 가는 게 낫죠. 마침 한가하기도 하고.”
“오늘 친구들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취, 취소됐어요.”
민트색 스커트에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입은 상큼한 모습이다. 정장을 입은 모습도 잘 어울리지만, 이런 옷을 입은 모습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갑자기 차는 왜 사려는 거예요?”
“깜빡했는데, 며칠 전 여동생 생일이었더라구요.”
“…….”
내 말에 성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나요?”
“제 눈이 어떤데요?”
“음식물 쓰레기 보는 것 같은 시선인데.”
그러자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어떻게 오빠가 돼서 동생 생일을 잊어먹을 수 있어요? 미루 씨 되게 나쁜 오빠네요.”
난 억울해서 말했다.
“아, 아니, 걔도 제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어요.”
이건 자기 생일은 자기도 잘 안 챙기는 우리 집 가풍 때문이기도 하다.
성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동생은 그래도 돼요. 하지만 오빠는 여동생을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째서요? 어째서 그래야 하는데?”
“먼저 태어났잖아요.”
“…….”
먼저 태어난 게 무슨 죄야?
전세계 오빠들이 들으면 들고 일어날 만한 차별적 발언이다.
“저 진짜 동생 갖고 싶었는데.”
“막상 있으면 그런 말 못할 텐데.”
“무슨 말이에요? 전 동생 있으면 엄청 잘해줬을 거예요.”
“…….”
이게 바로 동생 없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착각이지.
무남독녀인 그녀가 뭘 알겠나?
난 졌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선물 사주러 온 거잖아요.”
세나가 원하는 대로 빨간색 페라리……는 아니고 빨간색 미니쿠퍼를 사주기로 했다.
페라리는 뭔 페라리?
대학생에게는 미니도 과분하다. 그래도 기왕 사주는 거 컨버터블로 사줄 생각이다.
“아하! 그래서 딜러를 소개해달라고 한 거군요.”
“예. 참고로 얘기하지만 제 생일 땐 아무것도 못 받았어요.”
성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이 정도면 좋은 오빠네요.”
“그렇죠?”
미우나 고우나 내 동생이다.
1회차 때는 오빠다운 일을 많이 못 했으니, 이번에는 실컷 해줄 생각이다.
성윤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부럽네요. 저도 미루 씨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예?”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아, 그, 그게 다른 뜻은 아니고…….”
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전 차 사줄 누나도 형도 없어서 대학생 때는 물론이고 입사 후에도 대중교통 타고 다녔는데.”
“…….”
어째서인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생일날에는 아무것도 안 준 거예요?”
“일단 비싼 밥 사줬죠. 그리고 아름 씨한테 받은 상품권 카드가 있기에 그거 줬어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 카드 최상위 VIP로 등록되어 있을 텐데.”
“정말요?”
보통 백화점들은 결제액에 따라 VIP 등급을 부여하는데, 신세기백화점의 경우 최상위인 센츄리 등급은 딱 999명만 있다.
“그걸로 VIP라운지는 물론 퍼스널 쇼핑룸도 이용할 수 있어요. 픽업이랑 전문 코디네이터 동반 쇼핑도 가능하구요.”
“…….”
내가 대체 동생한테 뭘 준 거지?
* * *
강남 신세기백화점 식품관.
백화점 지하뿐 아니라, 지하 쇼핑몰까지 연결된 식당가는 맛집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특히 강남이라는 특성상 외국에서 인기 있는 베이커리와 디저트 카페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한세나는 이곳의 영국식 티카페에서 세 명의 친구를 만났다.
“여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 티포트 예쁘다.”
“본차이나인가?”
점심은 여기서 가볍게 먹고 쇼핑을 하기로 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정소진이 물었다.
“LBT스테이크는 어땠어?”
“엄청 맛있었어. 스테이크 짱.”
“거기 예약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오빠가 호텔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좀 쉽게 예약한 모양이야. 막 외국인 아저씨가 와서 샴페인도 주고 그랬어.”
“우와! 좋았겠다.”
“선물은 뭐 받았어?”
한세나는 보란듯이 상품권 카드를 꺼내보였다.
“짜잔! 오빠가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거 사라고 상품권 줬어.”
“얼마짜리야?”
“100만 원!”
“와! 대박.”
정소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겠다. 우리 오빠는 내 생일날 유닉클로 맨투맨 하나 사줬는데.”
오빠가 있는 다른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생일선물로 엔폰 갖고 싶다고 하니까, 케이스랑 액정필름 사주더라. 폰은 알바해서 직접 사라고.”
한세나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미루 얘기네.’
그랬던 오빠가 이제는 달라졌다.
동생 생일이라고 비싼 데서 밥도 사고, 상품권까지 주다니. 그야말로 개과천선했다랄까?
한세나는 자랑스럽게 카드를 흔들며 말했다.
“이걸로 오늘 생선 사려고.”
“그래서 여기서 보자고 한 거구나.”
“응.”
“뭐 사게?”
“가방 사야지.”
“오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남녀할 것 없이 명품 사는 게 유행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 명품 가방 하나 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사겠는가?
“가자, 얘들아!”
한세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호기롭게 명품관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에르메스.
평소라면 근처에도 못 갔지만, 주머니에 있는 상품권을 생각하니 용기가 샘솟았다.
한세나는 당당하게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친절한 태도로 물어보았다.
“저희 매장은 처음이신가요?”
“네. 가방 좀 보고 싶은데요.”
“처음 오신 고객님께서는 가방 구매는 힘드시고, 이쪽 상품들부터 구매가 가능하십니다.”
거기에는 스카프와 액세서리 등이 있었다.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작은 상품들부터 지속적으로 구매해 등급을 올려야 가방을 구매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뭔 천 쪼가리 하나가 수십만 원이다.
100만 원으로는 작은 지갑 하나도 못 산다.
다른 고객들을 보니 어느 정도 나이가 있고 다들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정소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나야. 여기는 우리가 올 데가 아닌 것 같아.”
“그, 그렇지?”
확실히 대학생에게 에르메스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슬쩍 뒷걸음질을 쳐서 나온 다음, 이번에는 옆에 있는 구찌 매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에르메스보다는 덜했지만, 역시나 비싸기는 마찬가지.
한세나는 점원이 추천해준 가방을 몇 개 살펴본 다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역시 100만 원으로 명품 가방은 무리구나. 그냥 지갑이나 살까?’
잠시 고민하던 도중 예쁘게 생긴 키링이 눈에 들어왔다.
‘상품권으로 내 것만 사지 말고 먼저 오빠 걸 하나 사주는 게 어떨까? 동생이 이렇게 챙겨주면 감동해서 미니를 사주지 않을까?’
요즘 하는 일도 잘 되고 돈도 엄청 버는 것 같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다.
이거야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다!
“이 키링 하나 구매할게요.”
“알겠습니다.”
점원은 새제품을 꺼내 그녀에게 다시 보여주었다.
가격은 20만 원.
‘뭔 키링 하나가 보세 가방 하나 살 돈이네.’
막상 결제할 생각을 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인 만큼 과감하게 지르기로 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품권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한세나는 오빠에게 받은 상품권 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은 그것을 카드단말기에 꽂았다. 그러더니 놀란 표정으로 작은 탄성을 냈다.
“아.”
정소진이 물었다.
“뭐야? 잔액이 부족해?”
“그, 그럴 리가 없는데.”
한세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설마 10만 원짜리였나? 이 인간이 거짓말을?’
그러고 보니 금액을 말하면서 ‘글쎄’랑 ‘아마도’라는 단어를 붙인 것 같기도 하다.
한세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모자란가요?”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매니저에게 뭐라고 보고했고, 매니저는 놀란 표정을 하더니 인터폰을 들고 또다시 어딘가로 보고했다.
갑자기 직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모습.
같이 온 친구들은 당황했다.
“무슨 일이야?”
“왜 저래?”
한세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상품권 잔액이 부족하면 추가 결제를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보고를 한다는 건 설마……?
‘혹시 이 상품권이 도난카드?’
그러고 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 같다. 도난카드 잘못 써서 신고당해 경찰서로 끌려가는…….
한세나는 오빠를 떠올리며 속으로 절규했다.
‘아악! 이 미친 인간이!’
줄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그녀는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냥 안 살래요. 저 이만 가볼게요.”
그러자 직원이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내려오고 계신다고 하니, 괜찮으시면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뭐야? 벌써 경찰을 불렀어? 아니, 백화점 경비원인가?’
오빠 잘못 만난 죄로 전과자가 되게 생겼다!
한세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 이 카드 제 거 아니에요!”
“예?”
“오빠가 생일선물로 준 거예요. 전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 순간,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오빠요? 혹시 미루 씨 동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