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새로운 투자 (2)
패션산업에 대한 투자는 한국지사가 진행한다.
내가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동호 선배에게 일을 맡겼다. 지사장이면 이제 실무도 알아서 해야지.
동호 선배는 투자와 관련한 세부 내역을 협상하기 위해 민아름을 만나러 갔다.
돌아온 것은 퇴근할 무렵.
난 동호 선배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도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지만, 이 선배는 패션테러리스트나 다름없다.
대학생 때부터 아무 옷이나 대충 걸쳐 입고 다녔고, 회사에서도 정장만 입었다뿐이지 안 꾸미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매번 후줄근한 셔츠에 귀찮다고 넥타이도 잘 안 매고 다니다가 부장에게 한 소리 듣고 그랬다.
그런데 웬일로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었고, 정장과 셔츠, 구두를 명품으로 맞추고, 넥타이핀과 커프스까지 했다.
옷이 날개라고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였다.
이전까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부티가 후광처럼 빛을 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동호 선배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 아무래도 사기당한 것 같아.”
“사기요?”
“응.”
“누구한테요?”
“그 여자한테.”
그 여자가 누구야?
“설마 민아름?”
“맞아. 재벌집 막내딸이라기에 기대하고 만났는데, 이제 보니 순 사기꾼이었어.”
“뭔 일이 있었는데요?”
동호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투자 얘기를 하던 도중 내가 실수로 셔츠에 커피를 흘렸거든. 그러자 그 여자가 셔츠를 사러 백화점에 가자는 거야. 거기가 신세기백화점 근처였거든.”
“오! 그래서요?”
이야기가 뭔가 흥미진진하다.
“처음에는 셔츠만 하나 사서 갈아입고 나오려고 했지. 그런데 셔츠를 골라주더니, 갑자기 정장을 입어 보라는 거야. 지금 입고 있는 정장은 핏이 안 맞고 디자인이 별로라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누더기 같긴 했죠.”
“그 옷이 어때서? 그거 집 앞 상설할인매장에서 30만 원이나 주고 산 거야.”
“……돈 벌었으면 좋은 것 좀 사입어요.”
누가 들으면 회사가 월급 안 주는 줄 알겠네.
“아무튼 그다음에는 구두를 신어보라고 하더니, 넥타이랑 커프스도 고르고, 나중에는 아예 시계까지 권유하더라. 그리고 백화점 안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도 자르고. 정신 차리고 보니 5천만 원을 넘게 긁었어. 나 완전 강매 당했다니까.”
“사기 싫었으면 안 산다고 하면 됐잖아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니까. 직원들과 신중하게 상의까지 해가며 골라주는데 어떻게 거절해? 다단계에 끌려가서 온 가족 건강식품을 다 사고 온 기분이야.”
“시간 내서 꾸며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전문가의 코디 받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아니야. 이건 자기 백화점 매상 올리려고 날 이용한 게 분명해. 이 시계 하나가 4500만 원이라는 게 말이 돼?”
“봐봐요. 브랜드는 뭐예요?”
“파텍 필립.”
난 시계를 한 번 살펴본 다음 말했다.
“이거 지금 중고로 내다 팔아도 1억 원은 받을걸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뭐? 진짜?”
“예.”
“어째서? 중고면 가격이 떨어져야 정상 아니야?”
나도 이쪽 시장을 잘 모를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기 있는 명품시계는 돈이 있어도 물건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중고가 신품보다 비싼 기현상이 벌어지는 중이죠.”
심지어는 매장에 언제 들어오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대기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배짱장사를 해도 다들 사지 못해 안달이다.
“백화점 오너 딸이랑 같이 갔으니 산 거지, 선배 혼자 갔으면 구경도 못 했을걸요.”
“그, 그래?”
난 손을 내밀었다.
“차기 싫으면 내놔요. 제가 가져가서 중고로 팔게.”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예전부터 시계 하나 사려고 했어.”
1억이라고 하니 갑자기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흐음, 그럼 5천만 원을 쓴 게 아니라 5천만 원을 번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상대의 호의를 강매로 받아들이다니!
이러니 아직까지 여자를 못 사귀고 있는 거다.
그러고 보니 1회차 때 이 선배는 독거노인이었다. 이번 생에는 결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직접 만나보니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긴 하더라. 완전 셀럽이 따로 없던데. 린스타 팔로워가 웬만한 연예인보다 많아.”
“이번 기회에 한번 잘해봐요.”
“뭘 잘해봐?”
“아름 씨랑요.”
내 말에 동호 선배는 펄쩍 뛰었다.
“그게 뭔 소리야? 그쪽은 재벌인데.”
“재벌인 게 뭐 어때서요?”
“너, 재벌이랑 사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아?”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요?”
“그쪽 부모가 몰래 찾아와서 ‘자네, 내 딸을 사랑하나?’라고 물어서 ‘예,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면, ‘어디서 근본 없는 놈이 감히!’라고 소리친 다음 돈봉투를 쓱 내밀며 ‘이 돈 받고 내 딸이랑 당장 헤어지게’라고 하겠지.”
쓸데없이 디테일한 걸 보니 드라마를 많이 본 모양이다.
“돈봉투에 얼마 들어있는데요?”
“신세기그룹이니까 돈 대신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있지 않을까?”
“일리가 있네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고, 잘못하면 상품권으로 싸대기 맞을 수도 있어.”
“요즘도 많이 때리나 보죠?”
“그럼. 얼마 전 보니까 김치 싸대기, 파스타 싸대기에 이어 바게트 싸대기도 등장했어.”
“아팠겠네요. 부모가 빵집 재벌이었나 봐요?”
“아니. 프랑스 재벌이라는 설정이었어.”
“…….”
그럼 명품백으로 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바게트로 때려? 제작비가 부족했나?
“재벌이 뭐 대수인가요? 신세기그룹 시총 다 합쳐봐야 10조도 안 돼요.”
“듣고 보니 그러네……가 아니라, 10조가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그 정도야 우리가 투자 한번 잘하면 벌 수 있죠. 안 그래요?”
“그, 그런가?”
왠지 설득된 것 같은 표정이다.
“재벌이라고 어디 가서 기죽을 것 없어요. 어깨 쫙 펴고 다녀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우리도 어디서 꿀리지 않지.”
“그렇죠.”
컨티뉴 캐피탈 한국 지사장이면 웬만한 재벌그룹 회장 못지않다. 우리가 다루는 자본이 얼마인데.
재벌집에 인사하러 가면 싸대기는커녕 두 팔 벌려 환영해주지 않을까?
* * *
컨티뉴 캐피탈은 알렉스 프레스턴에게 쿨라우드(스노우 크래시)의 잔금 80억 달러를 지불했다.
이걸로 실리콘밸리에서 맺었던 계약이 완전히 끝났다.
난 데이비드와 통화했다.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만 해도 기간 내에 지불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죠.”
[제 생각이 틀려서 다행입니다.]
80억 달러라고 해봐야 이번 투자로 번 돈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1년 사이 컨티뉴 캐피탈은 이 정도쯤이야 쉽게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게 다 내가 고생한 덕분이다.
그사이 다른 일도 많았다.
오코너 버거는 실리콘밸리에 프랜차이즈 1호점을 열었다. 개점 이후 주변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역시나 돈 냄새를 맡은 사모펀드와 실리콘밸리 부호들이 앞다퉈서 투자를 제안했지만…… 당연히 다 거절했다.
그리고 퍼플게임즈가 만든 블록 밸리는 레전드게임즈를 통해 서비스를 오픈했다. 예상했던 대로 첫날에만 100만 카피가 다운로드되는 대박을 쳤다.
뭐, 이건 레전드게임즈가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기본 플레이는 무료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유저가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블록 밸리의 특성상 한번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일단 최대한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게 중요하다.
프리즈너는 빛의 속도로 좀비네이도3 제작에 들어갔다. 좀비네이도2가 극장 개봉에서도 성공한 덕분에 더 이상 제작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잘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투자한 기업들이 잘나간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조만간 미국에서 뵙죠.”
[알겠습니다.]
* * *
난 오랜만에 본가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아! 오빠 왔어?”
“넌 공부 안 하니?”
“남이사.”
그래. 남매면 충분히 남이지.
세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내 선물은?”
“응? 웬 선물?”
“오늘 내 생일이잖아. 그래서 밥 먹자고 한 거 아니었어?”
“…….”
뭐야? 얘 생일이 오늘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세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는 것이 보였다.
“이거 봐, 이거 봐. 선물 안 사왔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보니 괜히 지기 싫은 마음에 저절로 거짓말을 나왔다.
“훗, 그럴 리가. 당연히 사왔지.”
“뭔데? 봐봐.”
“기다려봐.”
현금이라도 좀 뽑아올 걸 그랬나?
괜히 찾는 척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뭔가 손에 집히는 게 있었다.
아! 맞다. 이게 있었지.
난 자연스럽게 그걸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신세기백화점 상품권 카드. 내 동생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직접 가서 사라고 준비했지.”
내 말에 세나는 반색했다.
“진짜? 얼마짜리인데?”
“글쎄. 아마도 100만 원?”
“우와! 대박!”
세나는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먼 길 달려왔더니 목마르네.”
“주스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재빨리 부엌에 가서 오렌지 주스를 따라오는 걸 보니,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한 모금 마시자 오코너 버거에서 팔던 오렌지 주스가 그리워진다. 오렌지는 역시 캘리포니아지.
잠시 후,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일하다 오셨나 해서 봤더니, 복장은 골프웨어에 등에는 골프백을 메고 계셨다.
“골프도 치세요?”
아버지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게 박 부사장이 사업하려면 좀 배워두는 게 좋다고 해서. 요즘 레슨 받는 중이야.”
하기야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나? 운동도 좀 해야지.
“골프채는 어디서 났어요? 비싸 보이는데.”
“크흠, 이건 민웅이가 선물해줬어. 나중에 같이 필드 나가자고.”
“…….”
‘민웅 씨’도 아니고 ‘민웅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친해진 모양이다.
“실력은 좀 늘었어요?”
“그냥 헛스윙 안 하는 정도야. 아직 필드 나가려면 한참 더 연습해야지.”
나름 재미를 붙이신 모양이다.
“어머니도 좀 배우라고 하세요. 나중에 부부동반으로 골프 모임 다니면 좋잖아요.”
“안 그래도 니 엄마 계속 꼬시는 중이다.”
골프까지 배우시는 거 보니, 이제 진짜 사장님 같은 느낌이다.
“얼른 옷 갈아입고 식사하러 가시죠.”
* * *
저녁 식사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송도의 JR블랙우드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기가 미국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맛집이에요. 전에 뉴욕에서 먹어봤는데 맛있어서 찾아봤더니, 다행히 한국에 지점이 두 곳 있더라구요.”
어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비싸지 않니?”
“할인도 되니까 걱정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왜냐하면 난 JR블랙우드의 VVIP기 때문이지.
세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우와! 그럼 다 시켜도 돼?”
“너 다이어트한다고 하지 않았니?”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 다시 할 거야.”
“…….”
잠시 후, 티본과 엘본 스테이크가 차례대로 나왔다.
비주얼만 봐도 압도적이다. 세나는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인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한창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정장을 입은 중년 백인 남성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영어로 말을 건넸다.
“한미루 님 되시죠?”
“예. 맞습니다.”
“전 이 호텔 지배인 마크 드리스켈입니다. 저희 호텔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뒤에 있던 직원은 우리 테이블에 케이크와 샴페인을 올려놓았다.
“가족분이 생일이라 들었는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감사합니다.”
공짜는 사양하지 않는다.
준비를 해달라고 미리 연락하긴 했는데, 설마 지배인이 직접 올 줄이야.
그는 손수 샴페인을 따서 잔에 따라주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세나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누구야? 무슨 얘기했어?”
“…….”
인간적으로 이 정도 영어는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난 적당히 둘러댔다.
“호텔 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신경 써준 모양이야.”
정확히는 이 호텔 회장이랑 좀 친하다.
“우와, 진짜?”
“응.”
여동생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존경의 시선을 보내니, 왠지 어깨가 으쓱해진다.
난 샴페인잔을 들며 말했다.
“세나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