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새로운 투자 (1)
우리는 간만에 회식을 했다.
동호 선배는 고기를 먹으며 감탄했다.
“입에서 살살 녹네. 역시 돈 벌었으면 소고기지.”
“다들 고생 많았어요.”
두 사람 다 거의 잠도 못 자고, 주가와 거래량을 분석하고, 기사를 정리해서 본사로 보냈다. 덕분에 그에 맞춰 매수량을 조절하고 매도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큰 투자를 잘 끝마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두 사람 다 편해 보이는 표정이다.
건배를 하는데, 김범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잠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형님. 지금 회식 중이라서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동호 선배가 물었다.
“누구야?”
“김정규라고…….”
“어! 설마 2박3일에 나오는 그 김정규를 말하는 건 아니지?”
“맞아.”
김정규면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국민MC.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아니, 김정규가 너한테 왜 연락해?”
“지난번 방송국에서 만나서 좀 친해졌어.”
“마, 말도 안 돼.”
친구가 국민MC와 친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김범석은 그 모습을 보며 턱을 살짝 들었다.
“보면 알겠지만 형동생 하는 사이지.”
난 그에게 물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나 보네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만 보면 연락처 달라고 줄을 섭니다.”
동호 선배가 물었다.
“왜? 어째서?”
“어디에 투자하면 좋겠냐고 묻던데. 혹시 컨티뉴 캐피탈은 투자 안 받냐고도 묻고.”
“흐음, 재테크는 모두의 관심사지.”
얘기를 들어보니 김정규도 이번에 펀드 투자한 게 큰 손실이 난 모양이다. 하필 펀드매니저가 뒤늦게 GL엔텍 주식을 담는 바람에 손실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아! 그러고 보니 김정규, GL티플러스 광고모델 아닌가? GL그룹 이미지 박살났는데 괜찮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괜히 욕먹고 있나봐. 아예 위약금 물고 해지할까도 고민 중이라는데.”
“뭐, 연예인과 재벌 걱정은 하는 게 아니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걱정 없이 털어먹었다.
고기를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술에 취했는지 동호 선배는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2차 가자!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마셔야 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어! 저 노래 이별 편지 아니에요?”
거리에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버스킹 중이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음악을 감상했다.
김범석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죠.”
“가서 듀엣 한번 해줘요.”
“예? 저 지금 술도 마셨는데.”
“자, 어서요.”
난 그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김범석은 무대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청년은 노래를 부르다 말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기억 속의 희미한 너를…… 으어어!”
설마 길거리 버스킹 중 원곡 가수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듀엣으로 불러도 될까요?”
“여, 영광입니다!”
김범석은 옆에 놓은 마이크를 잡고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공연을 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뭐야?”
“몰래카메라인가?”
“진짜 김범석이잖아!”
“우와! 말도 안 돼!”
다들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술을 마셨어도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김범석은 버스킹하는 청년과 함께 자신의 노래를 열창했다.
가만히 노래를 듣던 동호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쟤가 노래를 저렇게 잘 불렀어?”
“이제 친구가 가수라는 게 실감이 좀 나요?”
“흐음, 제법 치네.”
날씨는 선선하고, 음악은 감미롭다.
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왠지 좋은 기분이다.
* * *
청담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는 성윤아와 민아름이 먼저 와있었다.
둘 다 보기 드문 미녀에 스타일도 좋다 보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슬쩍 시선을 보냈다.
민아름은 나에게 물었다.
“여기 비싼데. 저도 얻어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안 그래도 지난번 파티에서 도움받은 일도 있어서 밥 한번 사려고 했다.
“아! 선물 하나 드릴게요.”
“뭔데요?”
민아름은 봉투에 담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저희 백화점 상품권 카드예요.”
“얼마짜리인가요?”
“그건 써보면 알 거예요.”
얼마가 들었는지 왠지 궁금해진다.
한 100만 원 들었으려나?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공짜는 좋지.
“고마워요. 잘 쓸게요.”
난 상품권 카드를 주머니에 챙겼다.
민아름은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는 계열사 하나씩 쪼개서 나눠 받기도 힘들어졌네요. 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야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들 미루 씨를 원망하고 있을걸요.”
“그래요?”
뭐, 원망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만.
재벌그룹들이 끝없이 분할을 거듭하는 이유는 자식들에게 뭐라도 하나 챙겨주기 위함.
고작 프랜차이즈 하나 운영하는 회사조차도 유통업체를 만들고, 납품업체를 만들고, 포장업체를 만들어 친인척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계열사를 분리해 상장하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지금 승계를 앞둔 재벌가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민아름은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큰일이에요. 나중에 뭐 먹고 살지 고민되네요.”
신세기그룹의 주력은 백화점과 마트, 면세점, 복합쇼핑몰 등.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오빠와 언니 몫이다.
원래대로라면 신세기그룹은 패션 사업부를 분할하며 그녀가 경영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로 인해 틀어졌다.
마침 잘됐다.
말이 나온 김에 난 그녀에게 얘기를 꺼냈다.
“그럼 저희랑 같이 일해 보는 건 어때요?”
“예?”
뜬금없는 얘기였는지 두 사람 다 당황했다.
“저희가 이번에 번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하거든요.”
“무슨 사업이요?”
“패션 산업에 투자를 좀 해보려구요.”
세계 패션 산업 규모는 반도체 산업 규모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
스페인 1위 부자는 패스트패션의 선두주자 ZARA의 회장이고, 프랑스 1위 부자는 명품제국 LVMH의 회장이다.
“명품회사라도 인수하게요?”
“그건 힘들겠죠.”
이미 이름이 알려진 명품들은 이미 어딘가에 인수된 상태다. 이걸 다시 사들이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신생 브랜드를 키워보게요. 요즘 신진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엄청나게 생겨나는 중이던데.”
“음, 쉽지 않을 텐데요.”
패션은 IT와는 다르게 성능으로 차별화를 주기가 힘들다.
디자인과 이미지로 차별화를 해야 하는데, 이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특히 하이엔드로 갈수록 기존 브랜드들의 시장 지배력이 확고하다.
하지만…….
“앞으로 패션계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거예요.”
내 말에 민아름은 귀를 기울였다.
“새로운 시장이요?”
“아시다시피 현재 모든 기업들의 화두는 디지털화죠. 패션업계 쪽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나요?”
민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최근에는 생산, 유통, 판매를 전부 디지털화하는 추세예요. 온라인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을 하나로 연결하고, 고객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재고 관리와 신상품 개발에 활용하고 있죠. 그럼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 제품을 빠르게 개발할 수 있고, 맞춤형 유통과 생산으로 재고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패션 브랜드들은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뭔가요?”
“가상공간…… 즉, 아예 패션이 디지털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안에서 광고도 하고, 생산과 판매도 하고.”
내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메타버스로 인해 패션계에도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 열릴 거예요. 매장 홍보는 물론이고, 실제로 디지털 세계에서 옷과 신발을 생산하고 판매하게 될 겁니다.”
“캐릭터를 꾸미는 데 돈을 쓴다는 거예요?”
“바로 그거죠.”
가상공간의 패션이란 그저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데이터는 얼마든지 돈이 된다.
“혹시 아바타 꾸미기 이런 거 안 해봤어요? 게이머들은 성능과는 전혀 관계없는 스킨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죠. 한정판 스킨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가격이 수십 배씩 뛰기도 하구요.”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때문에 디지털 세계에서도 패션은 중요하다.
이 흐름에 빠르게 올라타는 브랜드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방법은 어떻게 돼요?”
“먼저 아름 씨가 독립 법인을 만들어요. 사람은 알아서 뽑구요. 그러면 거기에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가 투자할게요. 지분 70퍼센트를 사들이는 방식으로요.”
“얼마나 투자할 건데요?”
“1차로 3000억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투자 상황 봐서 1조까지는 더 넣을 거예요.”
그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재벌에게도 엄청난 금액이지.
재벌들 중 이 정도 현금 들고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직접 투자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이 분야는 잘 모른다.
그리고 신생 브랜드들은 디자이너 한 명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투자 이후 디자이너가 그만두기라도 하면, 브랜드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관리가 필수적이다.
그녀는 신세기그룹 사람으로 지금도 패션계의 유명인사다. 능력도 있고 인맥도 있으니, 일을 맡기기에 이 이상 적임자를 찾기 힘들다.
신세기그룹은 백화점과 면세점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메타버스를 가지고 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브랜드를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나서서 투자하겠다고 하면 디자이너들은 기꺼이 반기지 않을까?
“장담컨대 5년 안에 신세기그룹보다 훨씬 커질 겁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패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향후 뜨는 브랜드 몇 개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것들만 미리 인수해도 투자금의 수십 배를 벌어들일 수 있다.
어차피 오빠와 언니가 있는 이상 그녀가 그룹을 물려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면 신세기그룹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지분 30퍼센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사실 엄청난 거다.
어차피 신세기그룹도 총수 일가 지분이 30퍼센트가 안 되니까.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민아름은 손을 멈춘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예요. 기존 브랜드도 인수하고, 디자이너도 관리하고, 생산과 유통망도 구축해야 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천천히 고민해보고 대답해주세요.”
민아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대답할게요. 저 할래요.”
“정말이죠?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요.”
“그럼요. 미루 씨야말로 말 바꾸기 없기에요.”
성윤아는 부럽다는 듯 말했다.
“좋겠네요, 언니. 사업 시작도 하기 전에 3천억 투자를 받다니.”
민아름은 해맑게 웃었다.
“건배 한번 해요.”
기쁜 마음으로 다 같이 와인잔을 부딪치는데, 식당 안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
그녀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나도 속으로 놀라며 성윤아에게 물었다.
“혹시 윤아 씨가 불렀어요?”
“그, 그럴 리가요.”
아무래도 우연인 모양이다.
인형같이 생긴 외모에 세련된 복장을 한 20대 여성.
다름 아닌 GL케미칼 고재익 사장의 딸 고현지다.
그녀의 옆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들 그날 파티장에 있었던 모양인지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또 뵙네요, 고현지 씨.”
그녀는 당황했는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여, 여기는 무슨 일이죠?”
“밥 먹으러 왔는데요.”
“아, 밥 먹으러…….”
고현지는 이내 허리를 세우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저,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아! 고마워요.”
“예?”
“제 조언을 무시해줘서요. 만약 제 말을 새겨들었다면 이런 수익을 내는 건 불가능했겠죠. 전부 현지 씨 덕분입니다.”
“…….”
고현지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성윤아는 고개를 내저었고, 민아름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감사의 의미로 오늘 식사는 제가 사죠.”
“됐어요! 안 먹어요!”
고현지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몸을 획 돌려 식당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민아름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미루 씨, 이제 보니 나쁜 남자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