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GL엔텍 (7)
[(WST 단독) 한국 증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묘한 이야기]
(전략)
미국과 일본 증시가 횡보하는 가운데, 한국 코스피는 월간 기준 12.2퍼센트가 오르며 선진국 주요 증시 중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한국의 투자자들은 이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식들은 큰 변동이 없는 가운데, 배터리 기업인 GL엔텍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모 당시 80조 원이던 GL엔텍의 시총은 현재 450조 원(약 4천억 달러)으로 상장 한 달 만에 5배 넘게 올랐다.
GL엔텍의 이상 폭등 현상은 현물시장뿐 아니라 선물시장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코스피200의 변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중략)
이러한 상황은 GL그룹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GL그룹은 GL케미칼 주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GL엔텍 상장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주식 현물배당 요구를 무시하고, 이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유 주식을 3년간 보호예수로 묶어버렸다.
결국 주주들과 이익을 공유하지 않기 위한 꼼수가 이런 엄청난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증시에 투자해온 한 투자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상법상 이사의 의사결정은 오직 회사의 이익에만 충실하도록 되어 있다.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만큼, 이사들은 사실상 대주주의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증시는 대주주가 언제든 기업의 이익을 외부로 빼돌릴 수 있는 구조인 만큼, 투자자들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 * *
[한국 증시, 이상 현상 발생]
[한국 선물옵션 시장, 이상 급등락 현상 발생]
[글로벌 투자자들, 한국 떠나나?]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
그런 만큼 글로벌 증시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 종목 때문에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이 출렁거리는 중이다.
한국 증시에서 벌어지는 이 기현상에 전세계가 주목했다.
코스피200은 시가총액뿐 아니라 거래량도 함께 반영하는 만큼, 한두 종목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코스피200 지수 전체에 문제가 생길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처럼 시총 2위 종목이 폭등하면 답이 없다.
선물시장이 현물시장을 흔드는 걸 보고 보통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고 표현하는데, 이번에는 몸통이 흔들리니 꼬리까지 흔들리는 중이다.
GL엔텍의 상승은 코스피200 지수를 밀어 올렸고, 옵션을 발행한 기관들은 헤지를 위해 현물 매수에 나섰다.
그런데 헤지를 위해 현물을 매수하면 주가는 더 뛰고, 이는 다시 선물시장을 밀어올리고, 그러면 더 많은 현물을 매수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마디로 주가가 오르기 때문에 더 오르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로 인해 한국 증시의 문제점이 전세계 투자자들에게 알려졌다.
-한국은 대주주의 마음대로 기업을 쪼개고 합칠 수 있다.
-한국 경영자들은 기업이 성장할 만하면, 자회사를 무더기로 상장시켜 이익을 빼돌린다.
-주가에는 별 관심 없고, 오로지 대주주의 지배력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 있다.
-한국 기업은 똑같은 매출과 이익이더라도 미국 기업에 비해 30퍼센트 정도 디스카운트를 하는 게 맞다.
글로벌 IB들은 자회사 상장을 앞두고 있는 기업들의 목표주가를 일제히 내렸다.
일부 종목은 아예 현재 주가보다 낮은 목표가를 제시하며 매도 의견을 냈다.
증시 전체의 신뢰도가 떨어지며 글로벌 투자금은 빠르게 한국을 떠났고, 이는 환율마저 상승시켰다.
-이야! 오늘 하루만 외국인이 1조를 넘게 파네~
-ㅋㅋㅋ 한국 기업에 투자하는 게 얼마나 병신 짓인지 깨달은 거지.
-한 종목 때문에 현물시장, 선물시장, 외환시장까지 초토화되는 중.
-정부는 손 놓고 있는 중~
-ㅎㅎ뻔하지~ 대통령은 진작 GL엔텍 샀음~
-이런데도 줄줄이 자회사 상장을 하겠다니!
-대단하다, K증시!
* * *
내가 처음 이 계획을 떠올린 건 GL엔텍이 보호예수 기간을 늘린다는 발표를 본 뒤였다.
당연하게도 1회차 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GL엔텍은 별다른 반대와 비난에 부딪히지 않은 채 상장했고, 주가는 10~15만 원 사이에서 한동안 횡보했다.
기관들도 보호예수보다는 의무확약이 많았고, 대주주의 보호예수 기간도 고작 6개월이었다.
때문에 수급을 통해 주가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고, 오히려 대량 매도가 주가를 짓누르는 오버행 이슈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GL엔텍이 보호예수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바람에, 시중 물량의 절반을 매수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유재호 회장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로 시총 1위가 뒤바뀔 수도 있겠군요.”
2000년 초, 유성전자는 코스피 시가총액 1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유성전자 시총 절반이라도 쫓아온 기업조차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1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자리를 위협하는 기업이 등장했다.
바로 GL엔텍이다!
헤지 수요가 몰리면서 GL엔텍의 주가는 이제 500조 원에 근접했고, 유성전자 시총을 바짝 따라붙었다.
GL엔텍이 유성전자 시총을 넘어설지는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비록 매출과 수익 모두 유성전자에 비하면 20분의 1도 안 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실적이야 어떻든 주가만 오르면 시총을 갈아치울 수 있다.
“정남철 사장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달라고 합니다.”
“뭘요. 저도 도움을 받았는데요.”
개인투자자 주식을 공매도에 활용하는 것은 그동안 증권사들 관행이었다.
사실 거래량만 놓고 보면 유성증권이 가장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는 조용히 주식 대여를 금지했고, 이는 화안증권과 DA증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행과 마찬가지로 증권사도 한번 계좌를 만들면 잘 옮기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주식을 공매도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분노한 개인들은 이를 안 하겠다고 선언한 증권사들로 계좌를 옮겼다.
다른 증권사들은 비상이 걸린 반면, 세 증권사는 계좌 개설이 폭주 중이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증권사 순위가 뒤바뀔 것이다.
“금융당국의 항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뭐, 어차피 끝날 정권인데요.”
오영환 대통령 임기는 올해 끝난다.
진작 레임덕이 시작됐는데, 이번에 GL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상장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지지율은 20퍼센트 이하로 폭락했다.
재밌는 사실은 임창식 대표의 지지율도 같이 폭락했다는 것이다.
유재호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재익 사장은 난감한 모양입니다.”
재벌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우호지분이 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의 손실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그들의 이익은 세심하게 챙겨주었고, 그들은 총수 일가의 경영을 강력하게 지지해왔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해 고재익의 경영 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경영권을 빼앗기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멋대로 경영하기 힘들 것이다.
난 피식 웃었다.
“뭐, 본인이 선택한 길인데요. 악과 깡으로 버티겠죠.”
* * *
[(속보) GL엔텍 60만 원 돌파!]
[시총 1위 뒤바뀌나?]
[정부, 금융시장 안정에 나서야…….]
GL그룹의 재계 서열은 4위.
GL엔텍 상장 덕분에 LK그룹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번 GL엔텍 주가 폭등 덕분에 대연차그룹마저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만약 GL엔텍이 유성전자마저 제친다면, 정말로 유성그룹을 넘어서 재계 1위 자리까지 올라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GL그룹은 환호하기는커녕 초상집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GL케미칼과 GL엔텍 사태를 거치며, 그룹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지하실을 뚫고 내려갔다.
본사 앞에서는 연일 소액주주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거센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GL엔텍 주식이 자고 일어나면 폭등하는 반면, GL케미칼 주가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사람이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고, GL케미칼 주주들은 허탈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다른 주식은 다 죽 쑤는데 GL엔텍만 미친 듯이 오르네.
-대체 이거 어디까지 올라가냐?
-GL엔텍 주가 480조인데, 80퍼센트를 보유한 GL케미칼 시총은 40조. 니들이 보기에는 이게 정상이냐?
-팔지도 못할 주식 들고만 있으면 뭐하나?
-팔 때쯤 되면 개떡락해있음 ㅋㅋㅋ
-GL엔텍 주식 가졌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ㅜㅜ
-주주들에게 GL엔텍 주식을 현물배당만 해줬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야?
-그거 해주기 싫어서 보호예수를 3년으로 늘려 이렇게 됨 ㅎㅎ
-애초에 컨티뉴 캐피탈이 GL케미칼 공매도했을 때 GL엔텍 상장을 안 했으면, 컨티뉴 캐피탈 손해 보고 끝났음.
-꼼수 쓰다가 회사 완전 병신 됐네~
-증시도 개박살이네. GL그룹 때문에 외국계 자본 다 빠져나가며 다른 회사들도 폭락 중.
-야, 이 미친놈들아! 이거 어떻게 할 건데?
고재익은 GL엔텍 주가를 보았다.
GL엔텍은 GL그룹의 가장 핵심 계열사다. 차기 회장으로서 GL엔텍을 최대한 성장시키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경영을 맡기도 전에 주가는 이미 여섯 배 넘게 올랐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오를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주가를 여기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은 이를 한 달 만에 해냈다!
문제는 이 모든 게 거품이라는 것.
결국 이 사태는 컨티뉴 캐피탈이 사들인 주식을 되팔아야지만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주가는 폭락이다.
일을 저지른 것은 컨티뉴 캐피탈이지만, 비판은 GL그룹에게로 쏟아졌다.
국제적인 망신을 샀고, 부도덕한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소액주주들은 전부 등을 돌렸고, 우호지분마저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몇몇 연기금은 아예 지주사 주식을 전부 매각하고 떠났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거대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여러 선택의 순간이 온다. 가끔은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후회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후회가 됐다.
‘GL엔텍 상장을 미뤘다면…… GL케미칼 주주들에게 현물배당을 해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걸 무시한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고재익은 한미루의 말을 떠올렸다.
‘GL그룹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GL그룹은 주주들을 배신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는 중이었다.
* * *
오영환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GL그룹을 강하게 질타했다.
“최근 증시 불안이 확대되며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GL그룹에서는 조속히 대책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뇌물 논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GL그룹과 선을 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GL그룹이라고 해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계속되는 증시 불안과 정부의 압박, 그리고 소액주주들의 분노와 우호지분 이탈로 인해 결국 고재익 사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머리를 숙였다.
“GL엔텍의 무리한 상장으로 인해 금융 불안이 발생한 점에 대해 깊은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드립니다. GL그룹은 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향후 주주 보호를 위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배당을 늘리겠습니다. 또한 보호예수가 풀리는 대로 GL케미칼 주주들에게 GL엔텍 주식 현물배당을 검토하겠습니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ㅋㅋㅋ 이제 와서 현물배당? 미친놈들인가?
-ㅅㅂ 주식 받으려면 2년 11개월을 팔지 말고 기다려야 하네~
-아니, 그래서 몇 주나 줄 건데? 설마 100주 사야 1주 주는 거 아니야?
-니들 생각에는 내가 그때도 GL케미칼 주주일 것 같냐?
-어차피 그때 되면 또 말 바뀜. 한두 번 당해보냐?
-그냥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