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GL케미칼 (6)
GL엔텍 상장 문제를 놓고 정치권에서 거센 공방이 벌어졌다.
우리국민당은 대통령이 GL그룹의 청탁을 받은 게 사실인지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새한국당은 근거 없는 의혹 제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 중심에는 남궁석 의원이 있었다.
그는 여야가 합의해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당장 입법을 한다고 해도 GL엔텍 상장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남궁석 의원은 GL케미칼 측에 대책을 요구했다.
“현재 GL케미칼 주주들은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GL그룹이 상장을 강행하려면 GL케미칼 주주들에 대한 보상안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GL케미칼이 보유한 GL엔텍 주식 20퍼센트를 기존 주주들에게 현물배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주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GL케미칼 주가가 폭락하는 이유는 핵심사업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 주주들에게 GL엔텍 주식을 나눠준다면 손실을 어느 정도 보상할 수 있다.
이러면 주가 하락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GL케미칼에게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GL엔텍이 신주발행과 구주매출로 공모하는 주식은 20퍼센트. 비율만 놓고 보면 적절하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금액이다.
공모가 기준으로 무려 16조 원.
이는 코스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모액이다.
남궁석 의원의 요구는 그만한 액수의 주식을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지급하라는 것이다!
현재의 공모가는 20퍼센트를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여기에 20퍼센트의 주식이 추가로 풀린다고 하면, 물량 부담으로 인해 공모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배당을 받은 주주들이 주식을 팔기 시작하면, 주가가 폭락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문의가 빗발쳤고 거래소 측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다.
이 문제에 대해 GL그룹 내부에서도 수차례 논의가 오갔다.
“상장 이후에라도 현물배당을 하지는 않을지 투자자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공모 참여 철회 의사를 밝혔습니다.”
“20퍼센트를 현물배당으로 한다고 하면, 공모가 미달될 가능성이 큽니다.”
“안 그래도 반대를 무릅쓰고 상장하는 겁니다. 이후에 주가가 폭락하기라도 한다면, 무리한 상장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될 겁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주식 현물배당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결국 GL케미칼 측에서는 입장을 밝혔다.
“공모에 참여하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GL케미칼이 보유한 GL엔텍 주식에 대해 기존 6개월인 보호예수 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기관들의 보호예수 기간 역시 최소 1년 이상으로 하겠습니다.”
* * *
보호예수란 해당 기간 동안 주식을 처분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3년 동안 주식 현물배당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GL케미칼 측에서는 주주보호 대책이랍시고 배당성향 증가, 중간배당 실시, 그리고 본업인 석유화학에 대한 투자와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주식 현물배당이 빠진 만큼 폭락하는 주가를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때 100만 원을 넘었던 주가는 반토막나서 이제는 50만 원 선까지 내려왔다.
GL케미칼 소액주주들은 망연자실했다.
-소문 듣고 왔습니다.
-여기가 공매도 맛집이라면서요?
-이 집 떡락 잘하네!
-아직 멀었습니다. 컨티뉴 캐피탈이 주당 40만 원까지는 폭락시킬 거라고 하니 지금이라도 파세요.
-응. 폭락 더 해봐, 병신아~ 자살하면 그만이야~
-ㅋㅋㅋ시발
-그러고 보니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면 주가가 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뭐지, 이 새끼는?
-미친 새끼인가?
-아니, 듣고 보니 일리 있어! 달리는 기차 안에 있으면 차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듯, 내 몸이 주식보다 빠르게 떨어지면 주가는 오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
-오오!
-ㅅㅂ 이거 보고 당장 뛰어내리러 간다!
-지금 한강물 차가울 텐데.
-뜨거운 열정을 지닌 GL케미칼 주주들이 다 같이 뛰어내리면 한강 수온도 오르지 않을까?
-그냥 고재익 잡아다가 한강에 내던지자. 우리가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듯.
* * *
난 유재호 회장을 만났다.
먼저 일 얘기부터 했다.
“넥스트로젠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넥스트로젠은 우리가 인수했다가 러시 펀드에 매각한 수소차 플랫폼 회사.
토머스 모터스 사태 때 한번 데었기 때문인지, 대중들은 수소트럭에 대해 전반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넥스트로젠 역시 시제품을 공개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번에는 또 뭔 사기를 치려는 건가’라는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사우디가 투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선이 달라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유성ES와 협력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GL엔텍에서 공을 들이고 있었을 텐데, 설마 저희 쪽으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차와는 달리 수소차는 수소로 전기를 생성해서 움직인다.
이렇게만 보면 배터리와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수소차에도 소량의 배터리가 들어간다.
수소로 만든 전기를 일시적으로 저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가 추천했습니다. 아는 사이끼리 협력하면 좋잖아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발표가 나면 유성ES에는 상당한 호재고, GL엔텍에는 악재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남궁석 의원을 어떻게 밀어줄지 궁금했는데, 설마 이런 방법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기상천외한 방법이다.
남궁석 의원도 밀어주고 돈도 챙길 수 있으니까.
유재호 회장에게도 미리 언질을 줬으니, 진작 비자금을 투자해 상당한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이번처럼 돈이 복사가 되는 기회는 흔치 않다.
“다들 GL엔텍 상장이 이렇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고재익 사장 입장이 상당히 난처하게 됐군요.”
보통 이런 경우 공매도를 한 사모펀드에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
그러나 이번에는 컨티뉴 캐피탈이 아닌 GL그룹에 비난이 쏟아졌다. 주가 폭락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장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1회차 때는 조용히 상장하고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컨티뉴 캐피탈에 국회에 청와대까지 얽혀들며,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재벌들은 남궁석 의원의 법안을 싫어하는 것 같던데. 회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여론이야 찬성이지만 재벌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사람들은 재계의 맏형이라 할 수 있는 유성그룹의 입장을 궁금해했지만, 언론들의 취재 요청에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유재호 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반기지는 않습니다. 편하게 돈 벌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솔직해서 좋네요.”
“정말로 법안이 통과되면 승계를 준비 중인 기업들은 골치가 아파질 겁니다.”
재벌그룹의 자회사 상장이 가장 활발하기 이뤄지는 시기는 언제일까?
바로 자식에게 그룹을 물려줄 때다.
자회사는 보통 자식들의 지분이 크다.
이걸 우후죽순 상장시켜 주식을 판 다음, 그 돈으로 물려받은 기존회사 지분에 대한 상속세를 납부하는 식이다.
계열사 상장 덕에 기존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면 그만큼 상속세도 줄어드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소액주주들 주머니를 털어 상속을 진행하는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니 한국 증시가 맨날 그 모양 그 꼴인 것이다. 이런 문제만 해결돼도 주가는 크게 오르겠지.
“이제 그런 방식으로 기업이 성장하는 시기는 지났어요. 앞으로는 주주들도 예전 같지 않을 겁니다.”
사실 법으로 규제한다고 해서 기업 활동에 타격이 될 것도 없다.
어차피 소액주주들 돈 빼먹기일 뿐. 경제적으로 대단히 효용이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남궁석 의원이 꽤나 주목받고 있긴 한데······ 과연 이 정도로 임창식 대표를 이길 수 있을까요? 어차피 GL엔텍 상장이 마무리되고 나면 이슈는 가라앉을 겁니다. 법안 통과 역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구요. 지금의 인기를 경선까지 끌고 가기는 힘들 텐데요.”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모두가 모르고 있지만, GL엔텍 상장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
난 유재호 회장에게 말했다.
“혹시 유성증권 사장님 좀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 * *
서초동 JR블랙우드 호텔.
난 이곳 커피숍에서 성윤아를 만났다.
“대화만 하는 건데 뭐 이렇게 비싼 곳을 잡았어요?”
“어차피 공짜라서요.”
내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공짜예요?”
“블랙우드 호텔 문제 생겼을 때 도와줬더니, 테일러 회장이 전 세계 블랙우드 호텔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카드를 주던데요.”
“진짜요? 좋겠다.”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공짜는 참을 수 없지.
“아! 그러고 보니 어제 현지한테 전화 왔어요.”
“뭐래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미루 씨에 대해서도 좀 묻던데요.”
“저에 대해서요?”
“예. 직접 얘기는 안 하는데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난 그날 봤던 고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쁘긴 예뻤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윤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왜요? 설마 만나고 싶어요?”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봐서 뭐하겠어요?”
보더라도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얘기를 하는 사이 약속 시간이 다 됐다.
난 성윤아와 함께 일어났다.
“올라가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룸 안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성윤아와 닮은 중년 여성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영전하셨다고 들었는데,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이름은 양자은.
DA금융그룹 양현성 회장의 딸이자 성윤아의 엄마다.
DA카드에 있던 그녀는 영전해서 DA은행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상 후계자 코스를 밟고 있다고 봐도 좋다.
성윤아에게 DA증권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도 오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 승낙했다.
그런데 부르지도 않은 사람 한 명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난 그를 보며 물었다.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형이 도와주러 왔지.”
“굳이?”
“어허! 자꾸 이러면 형 서운해.”
쫓겨날까 봐 걱정됐는지, 허민웅은 재빨리 성윤아에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어! 윤아야.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오빠.”
“둘이 입사 동기라며? 이야!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나? 이래서 한국 사람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가 봐.”
쫓아낼까 하다가 관뒀다.
들어서 안 될 이야기도 아니고.
나머지 셋은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유성증권 정남철 사장, DA증권 안호중 사장, 그리고 화안증권 허석윤 사장이다.
이중 유성증권은 3대 증권사 중 하나고, 화안증권과 DA증권은 시총 5천억이 안 되는 중견 증권사다.
재벌들과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나지만, 그래도 이 세 그룹과는 친분이 좀 있는 편이다.
난 안호중 사장과 인사했다.
처음 증권사에 입사했을 당시 사장은 프리머스 사태 이후 잘려나갔고, 그다음 부임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저희 회사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DA증권이라 할 수 있다.
난 다른 두 사장과도 차례대로 인사했다.
인사가 끝난 다음.
난 그들 앞에 서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몇 가지 전달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