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GL케미칼 (5)
어째서 이런 기사가 왜 나왔을까?
처음 기사를 쓴 건 뉴스트리거의 민홍수 기자.
다름 아닌 한정그룹 사태 당시, K문화재단 뇌물 의혹을 폭로한 기자다. 그때 뒤를 캐보니 제보자는 한미루로 추정됐다.
‘설마 그놈이 제보한 건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대체 왜?’
어째서 결백한 자신을 걸고 넘어진단 말인가?
그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서, 설마 지난번 금감원 압수수색에 대한 복수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왠지 그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이 덤터기를 씌게 될 상황이다.
그게 싫다면 해명에 나서야 했다.
[청와대, 결코 재벌 특혜 없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기금운용본부의 결정에 따른 것일 뿐]
[청와대 대변인,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
청와대는 대변인과 홍보수석까지 나서서 뉴스트리거 기사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듯하게 끼워 맞췄을 뿐,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청와대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뇌물 먹였네!
-지난번에 한정그룹 돈 먹어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정신 못 차리고 이번에는 GL그룹 돈을 처먹었네.
-ㅋㅋㅋ 미친.
-진짜 퇴임 전까지 꼼꼼하게 해드시네요~
-대체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궁금하다.
-정권 바뀌면 진짜 제대로 한번 털어봐야 한다!
-특검! 오직 특검만이 답이다!
오영환 대통령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혼자서 소리쳤다.
“아니라고! 이번에는 진짜 한 푼도 안 받았다고!”
* * *
GL엔텍 상장 문제는 GL케미칼 주주들과 주식에 관심 있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크게 관심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특혜를 줬다는 기사가 나오자, 이제는 국민적 관심 사안으로 번졌다.
-한정그룹 시즌2인가?
-그동안 GL그룹 다른 재벌들과는 달리 깨끗하다고 편들었는데, 더 이상은 커버 못 쳐주겠다.
-에잇 퉤퉤! 더러운 재벌 놈들!
-칼만 안 들었지 이게 날강도랑 뭐가 다르냐?
-한정그룹처럼 깔끔하게 해체시켜라!
-쪼개기 상장이고 뭐고 그냥 다 뒤져라~
GL엔텍 상장 문제가 논란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GL그룹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었다.
동업자와의 계열 분리도 깔끔하게 이뤄졌고, 승계 과정에서도 온갖 편법으로 상속세를 회피하는 다른 재벌그룹들과는 다르게 세금도 전부 납부했다.
또한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했고, 사회공헌활동도 열심히 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GL그룹은 다른 재벌과는 다르다며 치켜세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이미지마저 완전히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런 놈들에게 자율 규제를 맡기겠다고?
-자율 규제는 뭔 놈의 자율 규제?
-이딴 헛소리를 당론으로 정한 건 대체 어떤 놈 생각이냐?
-어떤 놈 생각이긴. 임창식 대표 생각이지.
-3L이 자율 규제 잘해서 확률 조작질하다 걸렸냐? 제대로 법으로 규제해라!
-법 만들라고 뽑아놨는데, 다들 국회에서 놀고 있냐?
-이제 믿을 건 오직 남궁석 의원뿐이다!
-남궁석 의원은 GL엔텍 상장을 막기 위해 GL케미칼 주주들과 철야농성까지 벌였습니다.
-에이튜브에서 간담회 영상 꼭 찾아보세요! 제가 몰래 녹화한 겁니다~
-남궁석 의원님 사랑합니다!
-GL케미칼 주주들은 남궁석 의원님을 지지합니다!
-부디 GL엔텍 상장을 막아주십시오!
이번 일로 인해 물적분할 후 상장을 금지하거나, 계열사 상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 그동안 법안 발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남궁석 의원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반면 기업들의 자율 규제를 내세운 임창식 대표는 상황이 난감해졌다.
‘아,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법으로 규제하겠다고 했지.’
그렇다고 얼마 전 당론으로 정한 걸 바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임창식 대표는 계속해서 신중론을 펼쳤다.
“기업들의 자율 규제가 미흡할 경우 입법으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GL엔텍 상장은 GL그룹의 향후 전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상장을 끝마치면 GL그룹은 단숨에 LK그룹을 제치고 재계 3위 그룹으로 도약할 것이다.
진작 상장예비심사를 끝마치고, 증권신고서를 제출해, 현재는 기관투자 수요예측 조사를 하는 중.
사실상 상장에 있어서 중요한 관문은 다 넘은 셈이다.
원래대로라면 조용히 상장하고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이 문제를 제기하며 공매도를 선언하는 바람에 물적분할 후 상장이 기존회사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물적분할과 상장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청와대 관련 의혹이 터지며, 뇌물이 오간 불법적인 일처럼 인식됐다.
어차피 증거 없는 억측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오해는 풀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이었다.
일단 GL그룹 제품 전반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됐다.
어차피 GL케미칼과 GL엔텍 모두 B2B 기업이라 불매에 별 영향이 없다. 그러나 GL전자와 GL코스매틱 등은 달랐다.
당장 매출 하락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GL케미칼 주가는 속절없이 하락 중이었다.
컨티뉴 캐피탈이 GL케미칼의 목표주가로 40만 원을 제시한 만큼, 다른 사모펀드들도 일제히 움직였다.
엠프티풀 리서치와 KSGI도 일제히 공매도를 선언했고, 핫머니를 노리는 전세계 헤지펀드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매도 물량을 쏟아냈다.
손실을 피하기 위해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기관들 역시 매각에 나서며, 간신히 75만 원대를 유지하던 주가는 또 다시 20퍼센트가 하락해 이제는 60만 원 선까지 내려왔다.
벌써 시총이 30조 원 가까이 날아갔다.
주가가 폭락하며 여론은 더욱 안 좋아졌고, GL그룹의 광고를 받은 언론사들조차도 우려를 표했다.
[GL케미칼 5거래일 연속 하락]
[정말로 40만 원까지 폭락하나?]
[여론조사 결과 상장을 중단하거나 미뤄야 한다는 의견이 78퍼센트]
[기존 주주들의 손실을 보상할 방안을 찾아야……]
고재익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장하면 컨티뉴 캐피탈 좋은 일만 시켜주게 되겠군.”
컨티뉴 캐피탈이 공매도에 쏟아부은 자금은 대략 10조 원으로 추정했다. 만약 정말로 40만 원까지 떨어진다면 금융비용을 제하고도 10조는 챙겨갈 것이다.
투자기간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수익률이다.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GL엔텍 상장을 중단하는 것이다. 상장을 미루겠다고 발표만 해도 주가는 즉시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컨티뉴 캐피탈이 얼마를 벌든, GL케미칼이 어떤 비난을 받든, 지금은 상장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외통수에 걸렸다.
고재익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남궁석 의원을 끌어들였나 했더니……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 * *
고현지는 한미루가 생일파티에서 한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무리 유명한 투자자고, 아무리 대단한 사모펀드에서 일한다고 한들 GL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뭘 어쩌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GL케미칼 주가는 폭락했고, GL그룹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집안 분위기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다.
한 사람이 벌인 일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답답한 마음에 고현지는 집을 나와 신세기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쯤 되면 매장을 둘러보며 물건을 고르지 않는다.
백화점에 별도로 마련된 룸에서 직원들이 신상품을 가지고 올라와 순서대로 제품을 설명하고, 그중에서 고르는 식이다.
쇼핑은 그녀의 취미였다.
우울한 일이 있을 때도 쇼핑을 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옷과 가방, 구두를 잔뜩 샀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적당히 쇼핑을 끝낸 후, 고현지는 VIP라운지 카페에서 민아름을 만났다.
민아름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괜찮아? 혹시 몸 안 좋아?”
“아, 아니요.”
사실 고현지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미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날 GL그룹에 관심이 많다고 한 게 이런 거였어?’
처음에는 자신에게 관심있다는 얘기인 줄 알고 착각했는데, 설마 GL그룹을 박살(?)내겠다는 얘기였을 줄이야!
왠지 그날 그에게 했던 행동들이 마음에 걸렸다.
‘서, 설마 나 때문에 화난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서운한 일이 있다면 만나서 풀고 싶은 마음이다.
고현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언니…….”
“응?”
“한미루 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왜?”
“그게…….”
이제까지 고현지가 만난 남자들은 그녀의 부탁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왠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다. 아쉬운 소리라는 것도 먹히는 사람한테 해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 하는데, 민아름이 먼저 말했다.
“아! 맞다.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요?”
“남궁석 의원에게 제보한 게 미루 씨일 수도 있다는데.”
그 말에 고현지는 화들짝 놀랐다.
“예? 그게 정말이에요?”
“아마도.”
“말이 안 되잖아요.”
“뭐가?”
“GL엔텍 상장으로 GL케미칼이 폭락할 거라고 공매도를 하면서, 국회의원에게 얘기해 상장을 막으라고 했다는 게. 만약 상장이 중단되기라도 한다면 손실을 입을 텐데.”
민아름은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아니라니요?”
“생각해봐. 컨티뉴 캐피탈이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제일 걱정한 게 뭐겠어?”
“그, 글쎄요.”
“바로 GL케미칼이 GL엔텍 상장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거지.”
공매도는 그 자체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상장 절차를 미루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취소라도 했다면 오히려 주가가 치솟으며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GL케미칼 상황은 어때? 상장을 미루거나 포기할 것 같아? 아니면, 이대로 진행할 것 같아?”
“그건…….”
“당연히 후자일 거야. 왜냐하면 이번 일로 물적분할 후 상장 문제가 이슈가 됐고, 남궁석 의원이 법으로 규제하겠다고 밀어붙이고 있으니까. 만약 정말로 그런 법이 만들어지기라도 하면 향후 GL엔텍 상장이 힘들어질 수도 있지 않겠어?”
“그, 그렇겠죠.”
“결국 GL케미칼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상장을 끝마쳐야 돼. 다시 말해 컨티뉴 캐피탈이 공매도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지.”
그 말에 고현지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자, 잠깐만요. 그 사람이 정치권과 여론을 움직여 상장을 철회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예요?”
“응. 바로 그거야.”
“그럼 설마 대통령 관련 의혹을 제기한 것도……?”
“그것도 아마 미루 씨가 한 일이겠지.”
“마, 말도 안 돼.”
이전까지만 해도 고현지는 한미루를 우습게 여겼다.
그는 재벌가 사람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투자에 성공해 명성을 얻었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날 한미루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좀 잘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