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GL케미칼 (2)
GL케미칼 고재익 사장은 한미루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조사해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DA증권 신입사원이던 시절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폭로해 양정욱 전무를 날렸다. 그리고 토머스 모터스 사태 때는 허민웅에게 위험을 미리 알려 미리 매도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덕분에 허민웅은 허민홍의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일부에서는 허민웅이 형을 제치고 화안그룹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삼자연합을 결성해 주총에서 총수 일가를 내쫓고 한정그룹을 해체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재벌그룹의 운명이 한미루로 인해 뒤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GL그룹은 어떨까?
‘GL그룹은 한정그룹과는 전혀 달라.’
시총은 몇 배가 크고, 진작 지주회사로 전환을 끝마쳐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확고한 만큼, 절대 외부의 공격에 흔들릴 구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고재익은 한미루가 딸의 생일파티에서 한 발언을 주목했다.
그는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맹비난하며, GL엔텍 물적분할과 상장 문제를 콕 집어 거론했다.
‘설마 GL엔텍 상장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긴장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는데, 웬 야당 국회의원 하나가 GL엔텍 상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국민당 남궁석 의원.
그는 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고재익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남궁석 의원은 이전까지 이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물적분할 당시에 나서서 지적했을 것이다.
‘설마 한미루가 움직였나?’
그럼 어째서 한미루는 GL엔텍 상장을 막으려고 하는 걸까?
정의감 때문에?
그럴 리가.
‘GL엔텍 상장을 무산시켜 GL케미칼 매수로 이익을 낼 속셈?’
고재익은 주식시장을 예의주시했다.
그런데 매수세는 그대로였고, 대신 공매도가 쏟아졌다.
슬금슬금 매도량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GL케미칼은 공매도 1위로 올라섰다.
고재익은 직원의 보고를 받았다.
“외국 기관에서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현재 확인 중입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남궁석 의원은 한미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가? 컨티뉴 캐피탈의 목적은 대체 뭐지?’
그리고 WST 기사가 나왔다.
기사를 보는 순간 고재익은 상대의 목적을 확실히 깨달았다.
“국회의원까지 끌어들여 GL엔텍 상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본인들은 GL케미칼 공매도로 이익을 챙기겠다는 거로군.”
이미 여러 상황에 대해 대응책을 마련해둔 상태다.
그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즉시 언론사에 광고 뿌리고, 기사 요청하세요.”
* * *
WST 기사의 파장은 엄청났다.
대다수의 개인투자자들은 물적분할이 뭔지도 잘 모르고, 이를 왜 다시 상장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경영진들은 GL엔텍 상장을 통해 배터리 사업이 제 가치를 인정받으면, GL케미칼의 주가도 오른다고 말했고, 다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컨티뉴 캐피탈이 그게 대형 악재라며 공매도를 선언한 것이다.
리포트와 기사를 뿌려대며 공매도를 하는 사모펀드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은, 그 사모펀드가 컨티뉴 캐피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제까지 컨티뉴 캐피탈의 주장은 틀린 적이 없었다.
블랙우드 호텔이 폭락할 거라고 하면 폭락했고, 폭등할 거라고 하면 폭등했다. 얼마 전에는 랜덤박스 확률조작 문제를 폭로해 국내 최대 게임사인 LD스튜디오 시총을 반토막낸 일도 있었다.
이번에는 공매도를 선언하며 GL케미칼 목표주가로 40만 원을 제시했다. 현재 주가를 기준으로 보면 60퍼센트를 폭락시키겠다고 한 셈이었다.
남궁석 의원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만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GL케미칼 주가는 WST 기사가 나간 뒤, 하루 만에 20퍼센트 가까이 폭락해 83만 원이 됐다.
GL케미칼 주주들은 깜짝 놀랐다.
-대체 더블카운팅이 뭐야?
-이해가 안 되는데. 어째서 GL엔텍을 상장하면 GL케미칼 주가가 내려갈 거라는 거지?
-반대 아닌가? GL엔텍 상장으로 제 가치를 평가받으면 GL케미칼 주가는 오르는 거 아니야?
-그러게. 대체 뭐지?
-다들 GL엔텍 상장은 호재라고 하던데.
-저게 진짜인가요?
-물타기 해야 하나요, 팔아야 하나요?
-떡락 각 날카롭다~
-당장이라도 내던지는 것만이 살길이다.
-웃기고 있네. GL엔텍 상장하면 GL케미칼 떡상한다.
-이래서 남궁석 의원이 상장하면 안 된다고 한 건가?
* * *
GL케미칼은 보도자료를 뿌리며 적극적인 반박에 나섰고, 재벌의 광고를 먹고 자라는 언론사들은 GL그룹의 입장을 주로 보도했다.
‘지주사 할인과 더블카운팅 얘기는 억측에 불과하다. 이는 주가를 떨어트리려 이익을 얻으려는 헤지펀드의 악의적인 행태다. GL엔텍의 상장은 기업 가치를 재고시켜서 주가 상승에 도움이 된다. 회사 측에서는 주주 보호를 위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
효과가 있었는지 주가 하락에 제동이 걸렸다.
동호 선배가 말했다.
“저쪽에서는 지금 온 힘을 다해 언론플레이를 펼치고 있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해야죠.”
역시나 컨티뉴 캐피탈이 공매도를 선언하니, 국민적 관심이 어느 정도 모였다. 덕분에 남궁석 의원 역시 주목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한번 판을 벌렸으면 최대한 키워봐야지.
“우리도 언론플레이를 하죠.”
“어떻게?”
“뉴스에 나가서 GL케미칼이 폭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겁니다.”
내 말에 동호 선배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흠, 어쩔 수 없군. 드디어 내가 나설 땐가?”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선배가 왜 나서요?”
“응? 나보고 나가라는 거 아니었어?”
“아니, 조별과제 발표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뭔 TV에 나가요? 선배 때문에 기초 통계학 과목에서 우리 조 전부 B 나온 거 기억 안 나요?”
그러자 동호 선배는 화들짝 놀랐다.
“뭐? 그게 나 때문이었어? 난 이제까지 너 때문인 줄 알았는데.”
“…….”
책임 전가하는 거 보니 나중에 정치인해도 될 것 같다.
“그럼 나 아니면 누가 나가?”
마침 우리 회사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한 명있다.
난 김범석에게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을 대표해 뉴스에 한번 나가시죠.”
“예? 뉴스요?”
“방송 많이 해봐서 익숙하시잖아요.”
“전 음악 프로그램만 나갔는데…….”
“어차피 카메라 앞에 서는 거니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 그런가요?”
김범석은 자신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동호 선배를 가리켰다.
“아니면 저 선배를 생방송에 내보내야 합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제가 나가겠습니다.”
동호 선배는 손뼉을 쳤다.
“아! 이러려고 얘 가수 활동시킨 거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그래. 닭 잡는 데 굳이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 있나? 얘 내보내면 되겠네.”
병아리도 못 잡을 것 같은 사람이 뭔 소리래?
동호 선배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니가 가라, 방송사.”
“…….”
* * *
TJBS 8시 뉴스.
지상파가 아닌 종편 뉴스지만 스타 앵커인 박영기 덕분에 종편 중에서는 가장 시청률이 높은 뉴스 방송이다.
최근 경제 분야의 가장 큰 이슈는 바로 GL엔텍 상장 문제.
주로 GL케미칼의 입장을 중심으로 다루는 다른 언론들과는 다르게, TJBS는 그나마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와 관련해 김범석이 출연하겠다고 하자 제작진은 바로 특별 인터뷰를 편성했다.
뉴스가 끝나갈 무렵 박영기 앵커가 말했다.
“오늘 초대석에는 정말 모시기 어려운 분을 모셨습니다. 가수이자 펀드매니저로 유명한 김범석 씨입니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김범석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범석입니다.”
박영기 앵커는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노래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김범식 씨를 가수로만 알고 계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이번에 다시 가수로 활동하시기 전까지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계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현재는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사모펀드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가수와 펀드매니저 중 어느 쪽이 본업이라고 생각하시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둘 다 제 본업이라 생각합니다. 가수가 연기를 하거나, 요리사나 체육인이 예능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사모펀드에서 일하면서 가수 활동을 하기 힘들지 않으신가요?”
“회사 측에서도 최대한 배려해주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쉴 시간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요.”
“정말 좋은 회사네요. 부럽습니다.”
박영기 앵커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다음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음악 활동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오늘은 컨티뉴 캐피탈 직원으로서 이 자리에 나오신 만큼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최근 컨티뉴 캐피탈이 GL케미칼에 대해 공매도를 선언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GL케미칼은 분명히 좋은 회사입니다. GL엔텍 상장 문제만 없다면 매수를 하라고 추천했을 겁니다. 하지만 GL엔텍이 상장하면 더블카운팅 문제로 인해 주가가 크게 하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저도 기사로 접하긴 했습니다만, 지주사 할인과 더블카운팅이 정확히 뭔지, 어째서 그게 문제가 된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처럼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시청자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범석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예.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총이 200억인 A와 B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여기서 A가 B의 지분 50퍼센트를 인수했습니다. 그럼 A의 시총은 얼마가 될까요?”
박영기 앵커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원래 시총 200억에 B의 가치 절반 100억을 더해 300억이 되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B도 A의 지분 50퍼센트를 인수했다면, B는 얼마가 될까요?”
이번에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300억이겠죠. 마찬가지로 200억에 A 가치 절반 100억을 더할 테니까요.”
김범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350억이 됩니다.”
박영기 앵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방금 A의 가치가 300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B는 200억에 A 가치 절반 150억 더해 350억이 돼야 합니다.”
박영기 앵커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네요.”
“그런데 B가 350억이 되면, 이번에는 A가 375억이 돼야겠죠.”
“그럼 또 B는 387억 5천만이 돼야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시총 200억짜리 기업이 서로의 지분 50퍼센트씩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걸 중복계산하면 무한대로 불어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게 바로 더블카운팅 문제입니다.”
“아! 이제 이해가 됐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투자자들이 A와 B가 가지고 있는 지분 가치를 온전하게 계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영기 앵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GL케미칼 측에서는 지주사 할인과 더블카운팅 문제를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한 기업이 다른 기업 주식을 10조 원만큼 가지고 있으면 10조 원이지, 왜 멋대로 반값으로 계산하냐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GL케미칼의 주장은 GL그룹의 상황으로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GL그룹의 지주회사인 GL을 한번 살펴보죠. GL은 현금과 부동산 자산 2조 원을 제외하고도 GL케미칼 34퍼센트, 그 외에 GL전자, GL코스매틱 등 35조 원어치의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GL의 시가총액은 13조 원입니다. GL케미칼의 주장대로라면 이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요.”
김범석은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신랄하게 말했다.
“당장 GL그룹 지주회사 주가가 이런 데도 지주사 할인과 더블카운팅 우려가 없다는 건 둘 중 하나입니다. 알고도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주주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