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GL케미칼 (1)
생일파티 며칠 후.
고현지는 친구들을 만났다.
김서영, 이태희, 박가을.
이중 김서영은 사촌이고, 다른 두 사람 역시 재계 사람들이다. 다들 그날 파티장에 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날 일을 생각하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제까지 살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망신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고현지는 어떻게든 한미루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 전화해서 사과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컨티뉴 캐피탈이 그렇게 대단해?”
그녀의 물음에 김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몰랐는데, 좀 알아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지금까지 인수한 기업들이 여럿인데, 그중 스노우 크래시 하나만도 100조 원이 넘어. 얼마 전에는 레전드게임즈도 인수했고. 게다가 그렇게 기업들을 사들였는데도 현금이 수십조 원 있다는 말도 있고.”
이태희와 박가을도 동조했다.
“컨티뉴 캐피탈의 자산 규모와 보유 현금이면 대연차그룹보다도 클걸.”
“한국에서는 그나마 유성그룹 정도는 돼야 견줄 수 있지 않을까?”
‘뭐야? 그 정도라고?’
그동안 자주 듣긴 했지만, 자세히 들으니 좀 놀랍긴 하다.
“그, 그래 봐야 그 사람은 그냥 직원이잖아.”
“일개 직원은 아닌 것 같아.”
“응?”
‘직원이면 직원이지, 일개 직원은 아닌 건 뭐야?’
박가을이 말했다.
“유재호 회장님과도 가끔 만나는 것 같고, 화안그룹 허민웅 부사장과는 아예 형동생 한다고 하던데.”
“뭐야? 민웅 오빠랑 친한 척한다고? 그건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야?”
재벌가 사람과 인사만 나눴어도 친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트럭이다. 한미루 역시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박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미루가 친한 척하는 게 아니라 허민웅 부사장이 친한 척한다고. 아예 한미루 아버지 회사 일까지 직접 챙기고 있다는데.”
“…….”
허민웅 부사장은 성격이 까칠하고, 상대가 재벌가 사람이 아니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기로 유명했다.
술자리에서 유성전자 권혁준 부회장에게 반말하며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가, 분노한 유재호 회장이 허성훈 회장에게 직접 항의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
그런 사람이 한미루를 동생으로 부르며, 아버지 회사까지 챙겨주고 있다고?
“아, 아니, 민웅 오빠가 대체 왜?”
“아마도 토머스 모터스 사태 때 도움받은 것 때문이겠지. 그때 화안에너지가 제때 주식 못 팔았으면 허민웅 부사장이 덤터기 썼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얘기를 들으니, 그날 한미루가 병진공업과 거래하고 싶으면 자료를 제출하라고 대기업들 상대로 갑질(?)한 게 이해가 됐다.
정상적인(?) 중소기업이라면 납품 계약 하나라도 따내기 위해 설설 기어야겠지만, 화안에너지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 아쉬울 게 없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만약 누구든 병진공업을 건드리려고 한다면 허민웅 부사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대화 주제는 한미루가 됐다.
“한정그룹 사태 때는 주철진 부회장과 KSGI 김성권 대표를 만나 직접 협상을 진행했대. 블랙우드 사태 때 직접 텍사스에 있는 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고.”
“아! 맞다. 얼마 전 사마라 회장이 일본에서 탈출한 사건 알지? 그것도 그 사람이 관여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에이, 설마…….”
“소문에 따르면 컨티뉴 캐피탈 2인자라는 얘기도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록허트 대표의 오른팔은 되는 모양이야.”
“그 사람, 윤아가 파티장에 데려왔지?”
“설마 둘이 사귀는 건가?”
“걔는 그동안 연애 안 할 것처럼 하더니.”
“진짜. 일이 바빠도 할 건 다 하네.”
“…….”
고현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야? 그럼 그 사람이 유선 오빠보다 낫다는 건가?’
왠지 성윤아에게 밀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장유선은 대연차그룹 장희수 회장의 삼남.
그룹은 이미 장남인 장호선 부회장이 물려받기로 예정되어있는 만큼, 대연위너를 포함한 계열사 한두 개만 물려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회사들조차도 계열 분리를 하거나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대연차에 납품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평생 대연차그룹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는 신세다.
반면 사모펀드의 2인자면 웬만한 재벌그룹 계열사 사장보다도 높은 위치다. 이러니 재벌들 앞에서도 막 나가듯 행동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갔다.
‘어떻게 내 앞에서 GL그룹이 날강도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는 GL그룹 회장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후계자다. GL그룹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태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GL그룹은 괜찮은 거야?”
고현지는 눈을 치켜뜨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니. 컨티뉴 캐피탈이 손대는 기업마다 문제가 생겼잖아. 한정그룹도 그렇고, 얼마 전 LD스튜디오도 그렇고.”
컨티뉴 캐피탈은 그동안 손댄 기업들마다 폭락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래 이 분야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사모펀드는 엠프티풀 리서치였으나, 현재는 컨티뉴 캐피탈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집안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한미루의 발언을 신경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 대체 뭔데?’
GL그룹은 무려 재계 4위의 거대 재벌그룹이다. 한정그룹과는 애초에 사이즈가 다르다.
컨티뉴 캐피탈이 뭔 짓을 한다고 한들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고현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지가 그래 봐야 어쩔 건데?”
* * *
난 데이비드와 통화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스노우 크래시, 레전드게임즈, 퍼플게임즈, 오코너 버거 등 모든 회사들이 하루가 다르게 쭉쭉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보내드린 자료는 확인했죠?”
[예. 이미 시작했습니다.]
내 지시에 따라 컨티뉴 캐피탈은 슬슬 GL케미칼의 공매도에 나섰다.
데이비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거 참. 뭐라 말을 하기가 힘들군요. 물적분할을 했든 안 했든 자회사를 상장시키면 주주들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은 상식인데. 주주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예. 여기에서는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라서요.”
다시 말하지만 미국에서 경영자가 이런 짓거리 했다가는 바로 소송 처맞고 쫓겨난다. 고의적으로 주주들의 재산에 피해를 끼쳤다는 게 확인된다면 구속도 될 수 있고.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와 코리아 스탠다드는 다르다.
한국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한국 증시만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
괜히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행동주의 헤지펀드들마저도 한국 시장에 배팅했다가 탈탈 털려서 울고 나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일에 국회의원을 끌어들인 겁니까?]
이유는 남궁석 의원의 인지도를 높여주기 위함.
하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래야 판을 더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원래대로라면 조용히 상장하고 끝낼 문제에 컨티뉴 캐피탈만 끼어들어도 난리가 날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까지 얽혀들면?
”제 예상대로 된다면 한국 주식시장에 난장판이 벌어지게 될 거예요.“
* * *
한미루의 제보를 받은 남궁석 의원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는 국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GL엔텍 상장은 GL케미칼 주주들의 재산에 피해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즉시, 상장 절차를 중단하고 주주 보상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향후 상장사의 물적분할 후 상장을 금지하고, 계열사 상장에 대한 요건을 강화해야 합니다.”
대부분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물적분할 후 상장은 이제까지 별문제가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GL케미칼은 물적분할 이후에도 주가가 오히려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웬 국회의원 하나가 GL엔텍 상장으로 GL케미칼 주가가 폭락할 우려가 있다며, 상장 중지를 요구한 것이다.
남궁석 의원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당인 새한국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당인 우리국민당 의원들마저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면 GL케미칼 주주들 반응은 어땠을까?
박수 치며 좋아했을까?
천만에.
내 주식 떨어진다는 얘기를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GL케미칼 주주들은 분노해서 우리국민당 홈페이지에 항의 글을 올렸다.
-아니, 뭔 국회의원이 GL케미칼 주가가 떨어질 거라고 난리를 치고 있어?
-계열사 상장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
-다른 그룹들도 다 하는 거 아니야?
-GL엔텍 상장하면 100조 원 간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럼 GL케미칼 주가가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 리가 있나요?
-GL케미칼 증권사 평균 목표가가 150만 원입니다.
-이제부터 떡상이다!
-시총 100조 가즈아!
-GL케미칼 대단해! 굉장해!
-남궁석 = 주알못
-이 사람 신라대 물리학과 교수 출신이라며?
-뭔 알지도 못하는 놈이 헛소리 하고 있어?
-이런 놈이 국회의원 하는 게 한국 정치의 문제임.
-이딴 식으로 하면 이번 대선에서 니들 찍어줄 것 같냐?
-ㅅㅂ 만약 주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죽어도 우리국민당 안 찍는다!
-옳소! 소액주주들의 힘을 보여줍시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공매도 늘고 있던데, 혹시 남궁석 의원이 공매도 했나?
-ㅋㅋㅋ 국회의원이 주가조작~
-이거 조사해 봐야 한다.
GL케미칼 주주들의 거센 항의에 우리국민당 의원들은 진땀을 흘렸다.
가뜩이나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남궁석 의원의 돌출 행동은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임창식 대표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남궁석 의원 개인의 의견일 뿐, 당론과는 관련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당 의원의 발언으로 인해 피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제가 더 면밀하게 살피겠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서도 이 문제가 불거졌다.
친임계 좌장인 박성주 최고위원이 나서서 남궁석 의원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다. 몇 달 후면 선거인 만큼, 당에 피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은 자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말을 한다고 들을 남궁석 의원이 아니었다.
“당 차원에서 입법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주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주주들의 피해요? GL케미칼 주주들이 남궁석 의원 때문에 피해 보고 있다고 항의하는 거 안 보입니까?”
“진짜 피해는 상장 이후 발생할 겁니다. 그러니까 GL엔텍 상장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입법을 해도 선거가 끝나고 하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때는 이미 상장이 끝났을 텐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당내 중진들과 최고위원들의 만류에도 남궁석 의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총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우리국민당에서는 징계를 내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남궁석 의원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물적분할 후 상장은 경영자가 주주들의 돈을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이러니 한국 증시가 만년 저평가를 받는 겁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궁석 의원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GL케미칼 주가 역시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WST 단독) 컨티뉴 캐피탈, GL케미칼 목표주가로 40만 원 제시]
(전략) GL케미칼은 배터리 업계의 절대 강자로 GM, 포드, 대연차, 폭스바겐 그룹 등을 고객으로 삼고 있고, 기술력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는 중국 DATL이지만, 중국 시장을 제외한다면 GL케미칼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시총은 약 650억 달러.
그런데 록허트 대표는 이러한 GL케미칼의 주가가 현재의 절반 이하로 폭락할 수도 있다고 투자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그 근거로, GL엔텍의 상장으로 인한 GL케미칼의 투자 메리트 감소와 한국 증시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더블카운팅 문제를 거론했다.
(중략)
……따라서 GL케미칼은 더 이상 배터리 기업이 아니라는 것이 록허트 대표의 주장이다.
“핵심 사업부가 떨어져 나간 만큼 GL케미칼의 현재 주가는 과도하다. GL엔텍의 성장 가능성과는 별개로 GL케미칼은 그 수혜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GL케미칼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당장 매도할 것을 권고한다. 컨티뉴 캐피탈은 이미 공매도에 나섰고, 목표주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공매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