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킹메이커 (10)
만약 미국에서 이딴 짓거리를 했다가는 바로 소액주주들의 소송을 처맞고, 배상금을 토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
기업이 성장할 만하면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계열사를 새로 만들어 그쪽으로 이익을 몰아준다.
그것도 모자라 기업을 쪼갠 다음 재상장하는 방식으로 주주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갈취한다.
이러니 기업은 성장하고, 코스피 시총은 늘어나도, 정작 내가 가진 주식과 지수는 오르지 않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난 남궁석 의원을 보며 말했다.
“이래서 한국에서는 장기투자가 불가능하고, 코스피와 코스닥이 개미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겁니다.”
물적분할 후 상장하는 일은 굳이 어렵게 예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재벌그룹들이 수시로 해왔던 일이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부작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재벌들의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
한국 언론사들은 구독자의 사랑보다는 재벌들의 광고를 먹고 산다. 때문에 어느 언론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지적을 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만 해도 물적분할 후 상장이 그렇게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GL엔텍 상장 이후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난 1회차 때를 떠올렸다.
당시 DA증권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GL엔텍이 상장되자마자 기관과 연기금은 GL엔텍을 담기 위해 대형주를 2조 원가량 팔아치우며 증시를 끌어내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아 치운 주식은 역시나 GL케미칼.
현재 100만 원 언저리에 있는 GL케미칼 주식은 GL엔텍 상장 이후 40만 원대까지 폭락한다.
만약 GL엔텍을 상장하지만 않았어도, GL케미칼 주가는 150만 원 이상으로 올랐을 것이다.
내 말을 이해했는지 남궁석 의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 한 얘기가 사실이라면, GL엔텍이 상장하면 GL케미칼 주가는 폭락하고 소액주주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남궁석 의원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GL엔텍 상장을 막아야죠.”
“이미 상장 절차를 밟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 진행되기 전에 빨리 막아야 합니다.”
그는 자료를 내려놓았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뭔가요?”
“컨티뉴 캐피탈은 GL케미칼을 공매도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만약 GL엔텍 상장을 중단시킨다면 GL케미칼 주가는 안 떨어질 테고, 그럼 컨티뉴 캐피탈은 손해를 보게 될 텐데요.”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왜 저를 찾아와서 GL엔텍 상장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겁니까?”
어째서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행동을 하는 건지 궁금하겠지.
“일종의 공익제보라고 생각해주세요.”
내 말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익제보요?”
“예. 아시겠지만 제가 원래 내부고발자 출신입니다.”
DA증권에서 쉬쉬하던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언론에 폭로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랑은 경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난 설득하듯 말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컨티뉴 캐피탈은 공매도를 할 거고, GL케미칼 주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GL엔텍 상장을 중단시키는 게 최선이고, 이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기존 주주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닙니까?”
“다른 목적이라니요?”
“말로는 공매도를 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GL케미칼 주식을 매수해서 이익을 내려는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리한 지적이다.
여기서 내가 아니라고 말해 봐야 쉽게 믿지 않겠지?
그래서 난 오히려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면 안 됩니까?”
“……뭐라구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건 GL케미칼 주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이익입니다. 그 주주들 중 컨티뉴 캐피탈이 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않습니까?”
“…….”
“GL엔텍 상장은 명백히 GL케미칼 소액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당한 행위입니다. 여기서 컨티뉴 캐피탈이 이익을 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 * *
한미루가 가고 난 뒤.
남궁석 의원은 담배를 피우며 그가 주고 간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직접 이와 관련한 기사와 논문 등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한미루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회사가 다수의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를 상장하는 경우, 자회사에 따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며 모회사의 투자메리트가 하락해 손실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GL그룹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올해에만 이런 식의 계열사 상장이 열 개 넘게 대기 중이었다.
LK그룹에서는 LK사이언스와 LK인베스트를, 대연중공업그룹은 대연오일을, 타피오카그룹에서는 타피오카 게임즈, 타피오카 쇼핑, 타피오카 엔터 등을.
재벌그룹 입장에서는 경영권에 지장 없이 그룹사의 시총을 늘릴 수고, 경영진들은 막대한 스톡옵션을 챙길 수 있다.
여기에 증권사들은 IPO를 주관하며 돈을 버니 좋고, 기관은 신규기업에 투자할 수 있어서 좋다.
손해 보는 건 오직 하나.
바로 기존 기업에 투자했던 소액주주들뿐이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남궁석 의원은 한미루를 떠올렸다.
‘공익제보라고?’
당연히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정말로 컨티뉴 캐피탈이 공매도를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 * *
회사로 돌아온 나는 동호 선배와 김범석에게 남궁석 의원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이미 자료 작성을 부탁했던 만큼, 두 사람 다 GL엔텍의 상장이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들어도 진짜 개새끼들이네.”
“개새끼들 맞아요.”
김범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GL케미칼 주주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그동안 회사를 믿고 고통을 감내한 대가가 이거라니.”
지금이야 배터리가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이었다.
하도 적자가 심해 GL그룹 내에서도 접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GL케미칼은 석유화학으로 벌어들인 이익을 배터리 사업에 계속 쏟아부었다. 때문에 GL케미칼의 영업이익은 거의 나지 않았고, 배당 역시 거의 없었다.
배터리 사업부가 흑자로 돌아선 것은 작년.
20년 넘는 세월 동안 적자를 감당하며 물 주고, 비료 주고, 가지치기해서 드디어 열매가 열렸다.
그 과실을 따먹으려는 순간, 누군가 나무를 통째로 뽑아간 것이다.
동호 선배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래서 한국에서 장기투자하면 미친놈 소리 듣는 거지.”
투자의 대가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우량기업에 대한 장기투자는 반드시 수익이 난다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의 이익이 다른 곳으로 새나가지 않았을 경우.
기업이 좀 커졌다 싶으면 일단 빨대를 꽂는 거래처들이 생겨난다. 놀랍게도 그 거래처의 사장은 창업주의 가족이나 친인척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경영자가 직접 거래처를 운영하는 일도 있다.
국내 3대 엔터 중 한 곳인 에스오티 엔터의 경우 모든 앨범의 프로듀싱을 베리굿 기획사라는 회사에 맡긴다.
이 회사는 따로 사무실도 없이 에스오티 건물 본사에 입점해있고, 별도의 장비도 없어서 에스오티의 시설을 빌려서 쓴다.
그럼에도 에스오티 엔터는 인세로 베리굿 기획사에 매년 매출의 6퍼센트를 지불한다.
6퍼센트면 얼마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익의 6퍼센트가 아닌 매출의 6퍼센트다.
작년에 지불한 돈은 영업이익의 절반이 넘는 200억 원.
이 회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에스오티 엔터 최대주주인 임수천 대표. 심지어는 법인도 아닌 개인회사다.
이런 비정상적인 거래가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곳이 바로 한국 증시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처럼 멀쩡한 회사를 둘로 쪼개 상장시킨다. 상장만 하면 GL그룹사의 시총은 단숨에 수십조가 늘어 LK그룹을 제치게 될 것이다.
재벌그룹들의 덩치는 나날이 커지지만, 이상하게도 소액주주들은 항상 손실을 본다.
이러니 장기투자가 가능할 리가 있나?
장기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 피터 린치, 워렌 화이트의 공통점은 미국 증시에 투자했다는 것.
만약 이들이 코스피나 코스닥에서 투자했으면 진작 망해서 개털 됐을 것이다. 아니면 HTS 들여다보며 단타나 치고 있었겠지.
“GL엔텍 상장 문제는 한동안 증시의 이슈가 될 겁니다. 여기에 컨티뉴 캐피탈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에서 컨티뉴 캐피탈의 명성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한정그룹을 해체했고, 얼마 전에는 LD스튜디오를 비롯해 대형게임사들을 폭락시켰으니까.
악명도 명성이다!
컨티뉴 캐피탈이 GL엔텍 문제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전국민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될 것이다.
“아하! 남궁석 의원으로 하여금 GL엔텍 상장을 막게 하고, 이걸 이슈화시켜서 띄워주겠다는 거구나.”
“그렇죠.”
사태가 커지면 커질수록 남궁석 의원의 인지도는 치솟게 될 것이다.
김범석은 신중하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남궁석 의원이 정말 이 문제 해결에 나설까요?”
“그럴 거예요.”
속으로는 확신하고 있었다.
GL엔텍 상장은 1회차 때도 크게 논란이 됐던 일이다.
이후 물적분할 후 상장을 금지하는 법안과 기존 주주에게 주식현물배당, 신주인수권 부여 등의 법안 등이 쏟아졌다.
이때 입법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이 바로 남궁석 의원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줬으니, 반드시 GL엔텍 상장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동호 선배는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오호! 그럼 이제부터 GL케미칼 주식을 사면 되는 거야?”
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 돈을 벌 수가 없어요. 그렇게 대충 생각하면 돈을 벌 수가 없어요.”
대체 애널리스트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판단을 못 해?
이러니까 투자하는 것들마다 줄줄이 말아먹었지.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아, 아니. 왜? 그럼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이미 말했잖아요. GL케미칼을 공매도할 거라고.”
“……응?”
동호 선배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자, 잠깐. 이건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남궁석 의원한테 GL엔텍 상장을 막으라고 했다며?”
“그랬죠.”
“GL엔텍 상장이 불발되면 GL케미칼 주식은 오를 거 아니야?”
“지금보다 최소 30퍼센트는 오르겠죠.”
“그런데 공매도를 왜 해?”
동호 선배는 김범석을 보며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넌 이게 이해가 돼?”
김범석도 살짝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저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두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이런 일이 하루이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벌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사안을 일개 국회의원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이렇게 K재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물적분할과 자회사 상장은 재벌들이 가장 손쉽게 소액주주들의 주머니를 털어먹을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
이를 제한하겠다고 하면 어느 재벌이 좋아하겠는가?
기업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 투자와 고용에 악영향이 우려된다, 외국기업과의 역차별이다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며,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다.
재벌이 반대하면, 언론도 반대하고, 정치권도 반대한다.
남궁석 의원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한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난 딱 잘라 말했다.
“남궁석 의원은 GL엔텍 상장을 절대 못 막아요.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GL케미칼을 공격해 최대한 털어먹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