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성공 투자법-231화 (226/529)

231. 킹메이커 (9)

GL케미칼은 주업이 석유화학이고, 부업이 배터리다.

그런데 이제는 GL케미칼이라고 하면 배터리를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배터리가 석유화학보다 커졌다.

이렇게 되자 GL케미칼은 전문성 확보와 효율성 증대, 그리고 투자 유치 등을 목적으로 기업분할에 나섰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난 남궁석 의원에게 GL케미칼과 관련한 자료를 내밀었다. 동호 선배가 열심히 그래프 그려가며 작성한 것이다.

“기업을 분할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인적분할과 물적분할이죠.”

이게 살짝 복잡한 얘기긴 한데, 만약 본인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한국 기업들은 재벌들의 필요에 의해 쪼갰다 붙였다를 반복하니까.

인적분할은 말 그대로 주주의 인적구성이 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분할이다.

기존회사의 주주들은 자신이 가진 지분만큼 신설회사의 주식을 새로 받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신설회사의 주주 구성비율이 기존회사와 100퍼센트 동일하다.

만약 내가 10퍼센트 가지고 있는 A라는 기업이 인적분할해 B라는 기업을 새로 만든다 치자.

그럼 분할 후에는 다음과 같이 된다.

A(기존회사)

주주구성: 나 10%, 기타 90%

B(신설회사)

주주구성: 나 10%, 기타 90%

물론 하나의 기업을 둘로 쪼갠 것인 만큼 지분 가치는 동일하다.

100억짜리 기업의 10퍼센트나, 30억짜리와 70억짜리 기업 두 개의 10퍼센트나, 똑같이 10억이니까.

반면 물적분할은 A기업이 B기업을 분할한 다음 자회사로 두는 방식이다.

A(기존회사)

주주구성: 나 10%, 기타 90%

B(신설회사)

주주구성: A기업 100%

나는 여전히 A기업의 10퍼센트를 보유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B기업의 주식은 단 한 주도 갖지 못한다.

대신 A기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B기업을 소유한다.

남궁석 의원은 담배를 꺼내들었다.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아! 피우셔도 괜찮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자료를 훑어보았다.

“물적분할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외국 기업들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물적분할 자체에는 문제가 없죠.”

기존에 하던 업종을 직접 하느냐, 자회사로 만들어서 밑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 물적분할을 하든 안 하든 기업의 가치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물적분할한 신설회사를 상장할 때 발생합니다.”

* * *

현재 코스피의 시가총액은 약 2400조 원.

여기에 80조 원짜리 기업이 새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코스피 지수가 3퍼센트 넘게 치솟으며 모두가 행복해질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신규종목이 증시에 입성하는 경우, 거래가 시작되는 시초가를 0으로 잡는다. 한마디로 100조짜리 기업을 상장하든 1000조짜리 기업을 상장하든, 지수는 그대로다.

그럼 정말로 신규종목 상장은 지수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GL엔텍 상장은 증시 전체를 하락시켜 다른 투자자들의 피해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공모가를 기준으로 보면 GL엔텍의 예상 시총은 80조 원입니다. 시총이 고작 수백억인 코스닥 잡주도 아니고, 무려 80조 원짜리 기업이 새로 증시에 들어오는 겁니다. 코스피 시총순위로는 유성전자와 LK닉스에 이어서 3위. 증시를 대표하는 기업이자 업종을 대표하는 기업인 만큼 당연히 코스피200 지수에도 포함되겠죠. 기관과 연기금이 운용하는 자금은 지수를 추종합니다. 따라서 좋든 싫든 비율만큼 GL엔텍을 매수해야 합니다.”

증시에 투자하는 펀드의 대부분은 인덱스 펀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패시브 펀드라고도 하는데, 특징은 지수를 추종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대형주를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율대로 매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주식을 가득 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경우 다른 대형주를 팔고 GL엔텍을 매수해 다시 비율을 맞춰야 한다.

“다른 대형주들도 피해를 보겠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역시나 GL케미칼 주주들이겠죠.”

기관이나 연기금이 투자할 때는 보통 섹터별로 구분해서 투자한다. 건설이면 건설, 반도체면 반도체 이런 식으로 같은 업종 안에 담긴 다른 주식을 팔고 매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A건설을 사야 한다면, B반도체를 팔고 사는 게 아니라, C건설을 팔고 사는 식이다.

“현재 GL케미칼은 세계 2위의 배터리 회사입니다. 따라서 ‘글로벌 배터리 ETF’나 ‘아시아 전기차 ETF’ 같은 경우 이미 상당한 양의 GL케미칼 주식을 담고 있죠. GL케미칼이 GL엔텍을 100퍼센트 자회사로 두고 있을 땐 GL케미칼은 분명히 배터리 회사입니다. 그런데 GL엔텍이 상장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도 GL케미칼을 배터리 회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전까지 GL엔텍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은 GL케미칼 주식을 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GL엔텍에 따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당연히 해당 펀드는 GL케미칼을 전량 매도하고, 그만큼 GL엔텍 주식을 살 것이다. 이 경우 GL케미칼은 떨어지고 GL엔텍은 오르게 된다.

남궁석 의원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서 껐다.

“GL케미칼의 얘기는 다르지 않나요? 상장을 통해 GL엔텍이 제 가치를 인정받으면, 오히려 GL케미칼이 오를 거라고 주장하던데.”

GL엔텍은 신주발행과 구주매출로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분을 공모할 예정이다. 나머지 80퍼센트는 상장 후에도 GL케미칼이 보유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GL엔텍이 오를수록 GL케미칼도 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다 헛소리입니다. 종속회사를 상장할 경우 더블카운팅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한국 증시의 마법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번 알아보자.

100억 원짜리 A라는 기업이 있다 치자.

A기업은 물적분할을 해서 80억의 가치를 지닌 B기업이라는 자회사를 만들었다.

이때 A기업의 사업의 가치는 20억으로 줄어들지만, B기업이라는 80억짜리 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니, 여전히 기업가치는 100억이다.

이후, B기업은 20억의 투자를 받아 증시에 상장한다.

B기업은 기존 80억의 가치에 20억의 투자금이 더해지며 총 100억이 되었다.

외부투자로 인해 A기업이 보유한 B기업의 지분율은 80퍼센트로 낮아졌지만 B기업의 가치가 100억으로 오른 만큼, A기업이 가진 B기업의 지분가치는 여전히 80억이다.

따라서 A기업은 100억이고, B기업도 100억이다.

이쯤 되면 뭔가 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저 100억짜리 기업을 물적분할 후 상장했고, 그 과정에서 추가 투자금은 20억이 들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증시에는 100억짜리 기업 두 개가 생기는 기적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A기업이 B기업의 80억 원어치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다시 말해 B기업의 가치 80억 원이 중복으로 계산된 것이다.

이를 더블카운팅(Double Counting)이라고 한다.

“자회사를 상장할 경우 모회사가 가진 자회사의 지분 가치는 평가절하됩니다. 보통은 50퍼센트, 심하면 70퍼센트가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주회사가 100억 원어치 자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작 그 지주회사의 시총은 30~50억밖에 안 한다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지주회사들이 이런 할인율을 적용받고 있다.

“신설회사 상장으로 인해 기존회사가 피해를 받게 된다면, 어째서 GL케미칼은 물적분할을 택한 겁니까?”

GL엔텍은 3년 안에 매출과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대규모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사실 투자금이 필요하다면 방법은 많았다.

GL케미칼이 유상증자를 하거나 BW 발행을 해도 됐고, 인적분할 후 GL엔텍이 투자를 받아도 됐다.

배터리 산업의 전망이 밝은 만큼 회사가 공장 증설을 목적으로 유상증자를 하겠다고 했으면 주주들이 반대하지도 않았을 테고, 투자자들은 기꺼이 돈을 넣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는…….

“그게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면서도 경영권을 지키기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상법에 따르면 기업분할은 인적분할을 기본으로 하고, 물적분할은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재벌들은 이상하리만치 물적분할을 선호한다.

대주주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현재 GL케미칼의 총수 일가 지분은 34퍼센트.

만약 기업을 분할하지 않고 유상증자를 했다면 총수 일가 지분율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인적분할 후 GL엔텍이 유상증자를 했다면, 총수 일가의 GL케미칼 지분율은 그대로겠지만 GL엔텍의 지분율이 줄어드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물적분할 후 유상증자를 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GL케미칼의 지분율은 여전히 34퍼센트고, 상장 후에도 GL케미칼은 GL엔텍의 80퍼센트를 보유한다.

따라서 GL케미칼의 경영권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GL엔텍을 지배할 수 있는 것다.

“다시 말해 최대주주의 경영권을 보호해주기 위해 일반 주주들만 희생하는 셈입니다.”

남궁석 의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GL케미칼 주가가 하락하면, 고재익 사장도 손실을 보게 될 텐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재벌과 소액주주들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전문경영인이라면 더 많은 연봉과 더 많은 보너스와 더 많은 스톡옵션을 목표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열중했을 테지만, 한국 재벌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대주주 입장에서는 주가가 오르든 떨어지든 상관없습니다. 주가가 올라봐야 자신이 가진 주식을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주가가 저평가되면 더 많은 주식을 살 수 있고, 상속과 증여에도 유리합니다.”

한국 증시에서는 지주회사 종속회사, 모회자 자회사 할 것 없이 같은 이름을 쓰는 재벌 그룹사들이 주르륵 상장해있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성그룹만 해도 유성물산, 유성전자, 유성전기, 유성ES, 유성중공업, 유성엔지니어링, 유성생명, 유성증권, 유성카드 등 수십 개의 계열사들이 상장되어 있으니까.

그럼 이걸 한번 외국 기업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현재 세계 최대 기업은 엔플.

만약 엔플이 한국 기업이었다면, 모회사인 엔플뿐 아니라, 엔폰 제조사, NOS 소프트웨어 회사, 앱스토어 회사, 매장을 운영하는 회사, 홍보를 하는 회사, 제품을 유통하는 회사 등이 줄줄이 상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증시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엔플이라는 회사 딱 하나만 상장되어 있을 뿐이다.

엔플은 밑에 수천 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 상장할 계획이 없다.

때문에 엔플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은 전부 엔플 주주들의 몫이다.

그래서 엔플 주가가 미친 듯이 오른 거고.

이는 구블, NS, AMZ 등 다른 빅테크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

에이튜브는 구블이 100퍼센트 지분을 가진 자회사다. 하지만 구블은 에이튜브를 상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에이튜브가 벌어들이는 모든 이익은 구블 주주들의 이익이 되고, 에이튜브에 투자하고 싶은 투자자는 구블 주식을 사야 한다.

AMZ는 모두가 아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기업.

하지만 실제 이익의 70퍼센트는 이커머스가 아닌, 클라우드 서비스인 ZWS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AMZ는 ZWS를 분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 재벌이 AMZ를 운영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장담컨대 애초에 ZWS를 물적분할한 다음 재상장시켰을 것이다.

“외국 증시의 경우 지주회사 하나만 상장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약 증시에 상장된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경우에도 합병을 통해 모회사의 주식으로 전환시키거나, 공개매수를 통해 상장폐지를 시키고 단 하나의 기업만을 남깁니다. 그런데 한국은 멀쩡하게 상장되어있는 기업마저도 쪼개서 재상장시킵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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