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킹메이커 (8)
워낙 표 차이가 적었기에 재검표까지 진행했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무소속 정치신인에게 패한 김재희 의원은 충격에 빠졌다.
‘이, 이럴 줄 알았으면 기숙사 건설에 찬성하면 사퇴한다고 했을 때 받아들일걸.’
그 제안만 받아들였다면 쉽게 4선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회를 걷어찼고 선거는 끝났다.
김재희 의원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항의했다.
“아니, 저거 다 위장 전입신고한 학생들이 찍은 거잖아요! 선관위에서 전수조사해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실제로 거주하지 않고 주소지만 옮겨 투표한 학생들이 많은 만큼, 걸면 충분히 걸고넘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가뜩이나 들끓는 20대 표심이 당을 떠날 우려가 있는 만큼, 새한국당에서는 고발을 포기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남궁석 의원은 바로 공약이었던 기숙사 건설을 위해 구청을 항의 방문해 인허가를 요청했다.
이전에 찾아왔을 때는 실무자조차 만나주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구청장이 직접 나섰다.
이미 선거를 통해 지역 표심을 확인한 상황.
잘못했다가는 다음 지선에서 자리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구청장은 연신 땀을 닦으며 협력을 약속했다.
그렇게 기숙사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록 정치 경험이 전무하고 얼떨결에 국회의원이 됐지만, 남궁석 의원은 적극적으로 입법 활동을 펼쳤다.
그는 물리학과 교수 출신답게 과학과 통계에 근거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러나 무소속 초선의원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입법은 번번이 국회의 문턱에 가로막혔다.
그의 인기를 눈여겨본 우리국민당에서는 영입을 제안했다.
당 차원에서 기숙사 건설 및 사립학교 감시 강화, 대학 등록금 인하를 위한 입법 활동을 지지해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남궁석 의원은 우리국민당에 입당했다.
국회의원은 당선되자마자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는 얘기가 있다.
다들 선거를 위해 지역구 관리에 애쓰는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남궁석 의원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어쩌다가 국회의원이 되긴 했지만, 다음 선거는 나갈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한번은 그의 지역구에 장애인학교가 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결사반대를 외치며 집회를 벌였다. 그 자리에 남궁석 의원이 나타나자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의원님! 살기 좋은 우리 지역에 장애인학교가 웬 말입니까?”
“우리 동네만큼은 안 됩니다.”
“집값 떨어지면 어떡해요?”
“장애인학교 같은 혐오시설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주세요.”
장애인학교 결사 반대 현수막을 든 주민들 앞에서 그는 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반대하시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대한 민원 역시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장애인학교는 우리 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고, 집값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집회를 그만 멈춰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환영하던 주민들은 분노했다.
“이따위로 하면 다음 선거 때 당신 찍을 것 같아?”
“주민들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놨더니 뭐 하는 짓이야?”
“당신 집 앞에 장애인학교가 들어와도 찬성할 거냐?”
“집값 떨어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항의하는 주민들 앞에서도 남궁석 의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예. 저도 이 동네에 살고, 저희 집 앞에 장애인학교가 들어오는 거 찬성합니다. 만약 집값 떨어지면 책임지고 다음 선거 때 불출마하겠습니다.”
“…….”
너무 당연하게도, 장애인학교가 들어왔음에도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궁석 의원의 이러한 태도는 지역이기주의를 활용해 표를 얻으려던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됐고, 그는 다음 총선 때도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당선됐다.
* * *
얘기를 들은 동호 선배는 혀를 내둘렀다.
“이야! 대단한 사람이네.”
김범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지. 남궁석 의원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기숙사든 장애인학교든 삽도 뜨지 못했을 테니까.”
동호 선배는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궁석 의원에 대해서는 왜 물어본 거야?”
난 대답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올해 대선이잖아요.”
“그렇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아요?”
내 물음에 동호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임창식 대표 아닐까?”
김범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남궁석 의원을 한번 밀어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응?”
동호 선배는 당황했다.
“자, 잠깐. 남궁석 의원을 대통령으로 밀겠다고?”
“예.”
“어째서?”
“잘할 것 같아서요.”
난 1회차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무너져가던 대한민국을 되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미 늦기도 늦었고, 더군다나 국회의원 하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김범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잘할 거라 생각합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임창식 대표보다는 남궁석 의원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죠.”
“역시 그렇죠?”
동호 선배가 물었다.
“그럼 뭐해? 될 가능성이 없는데.”
“그건 모를 일이죠.”
그렇게 따지면, 학생들 기숙사 문제 해결하겠다고 선거에 나간 교수가 그 지역에서 내리 3선을 한 현역 국회의원을 꺾고 당선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하게? 정치 후원금이라도 내게?”
난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 정도로 되겠어요? 밀어줄 거면 제대로 밀어줘야죠.”
* * *
국회의원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사무실로 연락해서 약속을 잡으면 된다. 그런데 그냥 찾아가 보기로 했다.
동선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순대국집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만큼 가게는 한산했다.
구석진 자리에서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재킷을 벗고 순대국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겉모습만 봐서는 평범하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덩치, 낯빛은 좀 어둡고, 머리는 살짝 벗겨져 있다.
정치인은 말과 능력만큼이나 외모도 중요하다.
외모만 봐서는 확실히 임창식 당대표가 좀 더 대통령에 어울린다. 그는 큰 키에 훤칠한 외모를 지녔으니까.
생긴 게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정장은 해진 곳 없이 깔끔하고 구두는 새것처럼 반짝반짝 광이 났다.
그러고 보니 어떤 정치인은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구두를 10년째 신고 다니기도 하던데.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이해라도 하지. 얼마 버는지 뻔히 아는데, 다 떨어진 구두를 계속 신고 다닌 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남궁석 의원님 맞으시죠?”
그러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누군가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일이 드물지 않은지 그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식사 중이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난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본 그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컨티뉴 캐피탈 한미루?”
“혹시 절 아시나요?”
남궁석 의원은 실소를 흘렸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겠죠. 한정그룹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야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는데요.”
“그냥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부터 제가 할 얘기가 중요하죠.”
남궁석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요?”
“혹시 오해를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청탁이나 로비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단순 제보입니다.”
대체 사모펀드 직원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식사 중이니, 먹으면서 얘기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일단 앉으시죠.”
난 맞은편에 앉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배가 고파진다.
나도 하나 시킬까?
메뉴판을 보니 보통과 특이 있다. 기왕이면 특으로 시키고 싶다.
오늘의 나는 특별하니까.
“뭘 제보하겠다는 겁니까?”
난 찾아온 용건을 말해주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현재 대규모 공매도를 준비 중입니다. 타겟은 GL케미칼. 실행하면 한국 증시 전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
그는 숟가락질을 멈췄다.
* * *
남궁석 의원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화분 하나 없는 단출한 사무실이다. 정리를 잘 안 하는지 내부는 좀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는 직접 커피를 타주었다.
아메리카노는 아니고 믹스커피다.
모카골드의 깊고 그윽한 향이 느껴졌다.
“존경하는 남궁석 의원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정치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그는 예외다.
그가 이제까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한다면 존경받아 마땅하다.
“인사치레는 됐습니다. 그보다 아까 한 얘기가 뭡니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컨티뉴 캐피탈이 GL케미칼을 공매도할 겁니다.”
“컨티뉴 캐피탈이 GL케미칼을 폭락시킬 거라는 겁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만히 놔둬도 GL케미칼은 폭락할 겁니다. 다만 컨티뉴 캐피탈은 그 과정에서 이익을 챙길 뿐이죠.”
“어째서 GL케미칼이 폭락한다는 겁니까?”
“엄청난 악재가 있으니까요.”
“악재요?”
난 그에게 물었다.
“혹시 GL케미칼의 주력 사업이 뭔지 아십니까?”
물리학과 교수 출신인 그가 이를 모를 리 없다.
“2차 전지죠.”
“맞습니다.”
GL케미칼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석유화학 기업으로 시작했다.
석유화학은 석유를 가공할 때 나오는 물질을 활용해 에틸렌, 부타디엔, 벤젠 등 다양한 합성 원료를 만들어내는 산업이다.
석유화학 기업이 배터리에 투자하게 된 계기는 고본승 회장 때문.
고본승 회장은 일찌감치 배터리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보았고, GL케미칼 주도로 90년대 후반부터 배터리 산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엄청난 적자를 보며 고전했고, 반대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뚝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투자한 덕분에 점차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디지털화와 전기차 시대를 맞이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현재 GL케미칼의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중국 DATL 다음으로 2위고, 기술력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덕분에 주가 역시 폭등해 얼마 전 주당 100만 원까지 찍었다.
현재 GL케미칼의 시총은 약 70조 원.
코스피 시총 순위 무려 3위로, 현재 GL그룹의 주력 계열사라 할 수 있다. 사장은 고본승 회장의 장남 고재익, 바로 고현지의 아버지다.
전망 역시 밝다.
내연기관차의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만큼, 배터리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GL케미칼은 3년 안에 배터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향후 주가가 오를 일만 남은 것 같지만…….
“작년에 GL케미칼은 배터리 사업부를 떼어내 GL에너지테크놀로지, 즉 GL엔텍으로 물적분할했습니다. 그리고 GL엔텍은 현재 상장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이게 악재라는 겁니까?”
“예. 자회사 상장이 현실화되면 GL케미칼은 현재보다 최소 50퍼센트 이상 폭락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