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킹메이커 (7)
고현지의 생일파티에 다녀왔다고 하자 동호 선배는 깜짝 놀랐다.
“어! 진짜? 나도 좀 나도 데려가지.”
“파티 좋아해요?”
하기야 이 선배도 이제 상류층 파티에 데뷔할 때가 되긴 했지.
“파티도 파티인데, 고현지 엄청 예쁘다며? 웬만한 아이돌이나 연예인보다 예쁘다며?”
“잘 아네요.”
“당연히 알지. GL그룹 고현지를 모를 리가 있나? 재계 원탑이자, 1픽이라며? 예전에 찌라시 보니까 대연그룹 삼남이랑 사귄다는 얘기가 있던데. 진짜야?”
“저야 모르죠.”
남의 연애에는 별 관심없다.
“직접 보니까 어때?”
“뭐, 예쁘긴 하던데요.”
“성윤아랑 비교하면?”
“…….”
둘을 왜 비교해?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난 성윤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입사 동기가 먼저다!
“그래서 파티에서는 뭐했어?”
“일이 좀 있었는데…….”
어제 파티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자 동호 선배는 흥미롭게 들었다.
“으하하! 니가 컨티뉴 캐피탈 오너인 거 알면 다들 기절했겠는데.”
그럴 것 같아서 거기까지는 말 안 해줬다.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자 동호 선배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뭐라고? 고현지를 울렸다고? 여자를 울리다니!”
“제가 울린 건 아니고…….”
동호 선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누가 봐도 니가 울린 거잖아.”
“……하나의 사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도 있는 법이죠.”
이래서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얘기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서 김범석이 등장했다.
“오! 인기가수 왔어?”
“인기가수는 무슨.”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김범석의 인기는 엄청났다.
뛰어난 음악성과 가창력에 컨티뉴 캐피탈에 다닌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며 1회차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음악 프로그램과 각종 예능에서 출연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경제방송에서도 출연해 달라고 했다는데.
동호 선배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보니까 이번에 망고 차트에서 지유를 꺾고 1위 했던데.”
김범석은 씨익 웃었다.
“너도 봤어?”
“응. 니가 뭔데 우리 지유의 앞을 가로막아?”
“…….”
김범석은 ‘이 미친놈은 뭐지?’라는 표정으로 동호 선배를 쳐다본 다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어제 유성전자 홍보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매직캐슬을 광고 BGM으로 쓰고 싶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동호 선배는 재빨리 말했다.
“설마 니가 로비한 거야?”
“제가요?”
“맞구만! 너 재타이거한테 부정청탁했지?”
뭐, 만나서 얘기를 하긴 했다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생각해보세요. 유성전자쯤 되는 글로벌 기업이 자사 이미지와는 상관없는 아무 노래나 가져다 쓰겠어요? 다 노래가 좋아서 그런 거죠.”
그래서 1회차 때도 광고에 썼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서야 걸그룹 노래 놔두고, 얘 노래를 선택했을 리가.”
“가서 걸그룹 노래나 들어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김범석을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생각났다.
“신라대 나오셨죠?”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남궁석 의원 아세요?”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학교 교수님이셨죠.”
동호 선배가 물었다.
“혹시 강의 들은 적 있어?”
“아니. 내가 이공계도 아닌데 물리학과 교수 강의를 들었을 리가. 그리고 내가 입학하기 전에 그만두셨고.”
“하긴, 그렇겠네.”
“그래도 선배들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지.”
난 그에게 물었다.
“어떤 얘기요?”
“어째서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당선이 됐는지, 그런 거요.”
“한번 얘기해주세요.”
“흠, 다 아는 내용일 텐데…….”
김범석은 남궁석 의원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 * *
신라대 물리학과 교수 남궁석.
40대의 젊은 나이에 종신교수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생활고 때문에 좌절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편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꾸준히 성적우수장학금 폐지를 주장했다.
“장학금은 말 그대로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주는 돈입니다. 이러한 돈은 필요한 학생들에게 가는 게 맞습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남들 노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점을 받은 학생들은 뭐가 되냐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석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면학의 대가가 좋은 학점이지, 좋은 학점의 대가가 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신라대는 성적우수장학금을 폐지하고, 모든 장학금이 저소득층 학생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남궁석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고, 물리학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정치에 뛰어들게 된 데에는 어떠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기숙사 건립 문제였다.
당시 신라대는 학교 부지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 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위한 예산을 배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동네 시끄러워진다, 아파트 조망을 가린다, 교통이 안 좋아진다, 원룸 장사 힘들어진다, 범죄가 우려된다, 아이들 교육에 안 좋다, 공원이나 만들어줘라, 그냥 싫다, 무조건 싫다, 아무튼 싫다 등등.
주민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반대하자, 지역구 표를 의식한 현역 국회의원까지 거들고 나섰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기숙사를 막무가내로 짓는 것. 이런 건 행정 폭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전 이런 게 매우 잘못됐다고 봅니다. 주민들을 설득하는 절차가 우선 돼야 합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는 주민들 의견을 듣기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지만…… 아예 주민들 반대로 열리지도 못하고 무산됐다.
결국 구청에서는 이미 내준 인허가를 취소했고, 공사는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중단됐다.
남궁석 교수는 어이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서울의 비싼 월세에 신음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월세를 내기 위해 알바를 몇 개씩 하고 있기도 했다.
‘학교가 학교 부지에 기숙사를 지어 학생들 거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반대한다는 거지?’
알아보니 이건 신라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민 반대로 인해 기숙사를 못 짓는 대학이 서울에만 열 곳이 넘었다.
남궁석 의원은 직접 국회의원 사무실과 구청을 찾아가 설득해보려 했지만,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언론 역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남궁석 의원은 이를 세상에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총선 시즌.
분노한 남궁석 교수는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한국 정치진영은 이미 양당 구도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웬만큼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이나 기존의 유력 정치인이 아닌 이상, 무소속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남궁석 교수 역시 출마하면서도 당선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출마 목표는 단 하나.
바로 대학생들 기숙사의 필요성을 알리고, 가능하면 여야 후보에게 기숙사 건설 확답을 받아내는 것이다.
공탁금을 내고 나니, 선거캠프를 구성할 만한 돈이 없었기에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정책을 알리기 위해, 또는 유명세를 얻기 위해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때까지만 해도 남궁석 교수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위는 현역 의원인 새한국당 김재희, 2위는 우리국민당 최홍재였다. 총 일곱 명의 후보 중 남궁석 교수의 지지율은 꼴찌였다.
그런데…….
본격적인 선거를 앞두고 최홍재 후보에게 문제가 생겼다.
선거캠프 참모의 와이프와 불륜을 하다가 딱 걸린 것이다. 남편은 당장 사퇴하지 않으면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미 선거는 물 건너간 상황.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1야당 후보가 그냥 사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퇴를 위한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민수찬 의원은 묘수를 내놓았다.
“그 지역에 남궁석 교수라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한 사람입니다. 반면 김재희 의원은 기숙사 건설을 반대하고 있죠. 차라리 이 사람을 지지하면서 사퇴하면 당의 이미지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선거 전략에 따라 우리국민당 최홍재 후보는 남궁석 교수에게 지지를 보내며 사퇴를 선언했다.
이 일로 인해 남궁석 교수의 출마 이유가 새삼 이슈가 됐다.
[학생들 기숙사 건설을 위해 총선에 뛰어든 남궁석 후보]
[남궁석 후보, 존경받는 학자에서 정치인이 된 사연은?]
[무소속 남궁석 후보 인터뷰. ‘당선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숙사는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집권여당이자 3선의 현역 국회의원 김재희.
남궁석 교수는 김재희 의원에게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의원님께서 이전의 발언을 철회하시고 기숙사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시면, 전 당장 후보를 사퇴하고 후보님을 지지하겠습니다.”
대학은 중고등학교와는 달리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성적에 맞춰서 간다.
대학생들 중 투표권을 가진 주민이 몇이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전체 재학생의 10~20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지역주민과 원룸업자들은 전부 소중한 유권자들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게다가 유명세를 얻어 지지율이 올랐다지만, 여전히 남궁석 교수의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김재희 의원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숙사 건설 문제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여기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남궁석 의원이 출마한 곳은 신라대와 한천대 등 세 개의 대학과 네 개의 전문대가 몰려 있는 서울 최대의 대학 밀집 지역.
남궁석 교수의 출마 이유를 들은 대학생들이 일제히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거캠프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캠퍼스에서 남궁석 교수 지지 유세에 나섰다.
“남궁석 교수를 국회로 보냅시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 선거운동 열풍이 점차 이상한 쪽으로 번졌다.
-남자냐 여자냐, 보수냐 진보냐, 일반대냐 전문대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갈등을 내려놓고 대학생들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주소지를 자취방으로 옮겨서 이 지역에서 투표합시다!
-선거인명부 작성 이전에만 주소지를 이전하면 됩니다!
-집주인이 전입신고 반대하는데 어떡하죠?
-그거 불법입니다. 계약서에 적혀있어도 그냥 하면 됩니다.
-다른 동이나 구에 사는 학우들도 가급적 친구 자취방 등으로 주소지를 옮겨서 투표해 주세요.
-어차피 기숙사가 지어져도 대부분의 재학생들은 그 전에 졸업해 이용 못 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후배들은 좋은 기숙사에서 마음 편하게 공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한 표로 후배 사랑을 실천합시다!
-부모님과 친척도 설득합시다!
-이게 우리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 전역에 주민 반대로 기숙사 못 짓는 대학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표로 보여주자!
-찍어서 응원하자!!
-남궁석 교수를 국회로!!!
기숙사 문제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아예 주소지를 옮기는 집단행동에 나서자, 김재희 의원은 깜짝 놀랐다.
“선거일 이전에 단체로 주소지를 옮기는 건 조직적인 선거부정행위이고, 전입신고 위반이라는 중범죄행위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보나 선거캠프에서 지시한 것도 아니고,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위를 일일이 조사해 처벌하기는 힘들었다.
대학생들이 집단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초유의 사태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대학교 기숙사 문제가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되며 남궁석 교수의 지지율은 점점 치고 올랐고, 기숙사 건립을 반대해왔던 김재희 의원은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대학생들 표를 얻자고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선거만 끝나면 가라앉을 이슈야.’
김재희 의원은 최대한 기숙사 문제에 대한 대응을 피하며 선거운동에 주력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78,371표 대 78,470표.
모든 지역구 중 가장 적은 99표라는 차이로 남궁석 교수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겠다며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선 교수가 3선 현역 의원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