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킹메이커 (6)
내 발언은 재벌들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 없었다.
진규석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의 비전과 경영의 어려움 같은 건 어찌 되든, 주가만 올려주면 된다는 겁니까?”
“주가를 올리지 못할 거면 경영을 왜 하나요?”
“…….”
난 계속해서 말했다.
“그나마 경영 실패는 용서라도 할 수 있지, 일부 경영자는 주주의 재산을 훔치는 도둑질까지 합니다. 이건 용서가 안 되죠.”
“횡령과 배임을 말하는 겁니까?”
“에이, 그런 건 그냥 좀도둑질에 불과하죠.”
한국에서 재벌들의 횡령과 배임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생각하는지, 회장님들께서는 회삿돈을 자기 돈처럼 빼서 쓰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스케일도 남달라서 한 번 걸렸다 하면 수십, 수백억 원이다.
이걸 한 개인이나, 특정 그룹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10대 그룹 중에 안 걸린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는 유성그룹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쯤 되면 시스템이 문제인 건지, 처벌이 약한 건지 모르겠다.
이건 그나마 범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기라도 하지만, 합법적으로 주주들의 돈을 갈취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진짜 도둑질이란 이런 겁니다. 마침 여기 장유선 씨가 계시니 대연차그룹을 예로 들어보죠. 대연자동차의 물류를 담당하는 회사는 제노비스고, 광고를 담당하는 회사는 리노션입니다. 제노비스는 장희수 회장님의 장남인 장호선 부회장이, 리노션은 장녀인 장한나 전무가 대주주인 기업이죠. 만약 물류와 광고를 대연차가 직접 했다면 그로 인한 수익은 대연차 주주들이 가져갔을 겁니다. 그런데 기업을 따로 만들어서 일감을 몰아줬고, 결국 총수 일가 재산만 불렸죠. 조만간 장유선 씨가 대주주로 있는 대연위너도 상장한다고 하니,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것 역시 원래는 대연차 주주들이 가졌어야 할 이익을 뺏어가는 거니까요.”
장유선은 발끈했다.
“뭐라구요?”
난 못 들은 척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진규석을 보았다.
“이번에는 트리니셀에 대해 한번 말해볼까요? 트리니셀은 바이오와 제약 제품의 판매를 트리니셀HC에 위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매 수수료가 너무 높아 트리니셀HC가 트리니셀의 이익을 빼먹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트리니셀은 저평가, 트리니셀HC는 고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거래 관계가 지속되는데 장기투자가 가능하겠습니까?”
트리니셀은 진용주 회장이 동료들과 공동으로 창업해 지분이 낮은 반면, 트리니셀HC는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다.
이게 문제가 되자 트리니셀HC를 증시에 상장했고, 최근에는 아예 두 기업의 합병을 추진 중이다.
진규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쪽이야말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컨티뉴 캐피탈이 합병 비율에 대해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니까요.”
이는 언제든 합병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컨티뉴 캐피탈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합병 비율을 트리니셀HC에 유리한 쪽으로 정하기는 불가능할 거다.
그 사실을 아는지 진규석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 모인 이들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재벌그룹의 일원.
이들 중 자신의 가족이 주주들을 위해 책임 있는 경영을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난 마지막으로 고현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없던 보호본능마저 생길 것 같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기로 했다.
“사실 가장 최악은 GL그룹입니다. 다른 그룹이 한 짓이 도둑질이라면 최근 GL그룹이 한 짓은 날강도 짓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고현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얼마 전, GL케미칼이 GL엔텍을 물적분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걸 다시 증시에 상장할 예정이죠. 이게 날강도 짓이 아니고 뭔가요?”
그녀는 항변하듯 말했다.
“그, 그게 어째서 날강도 짓이라는 건가요?”
“GL엔텍이 상장하면 GL케미칼 주가는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이건 그동안 GL케미칼을 믿고 투자한 주주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일이죠.”
다른 재벌그룹들에 비해 GL그룹은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각종 회피기를 동원에 병역을 피하는 다른 재벌들과는 달리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를 다녀왔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세금도 잘 납부하고, 독립유공자 후손과 상이군경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 각종 사회 공헌 활동에도 힘썼다.
하지만…….
“백날 사회 공헌 활동을 열심히 하면 뭐하나요? 이런 식으로 주주들 재산을 수십조씩 갈취하는 판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고현지는 어찌나 놀랐는지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술은 파래졌다. 크게 뜬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까지 그녀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정도 되니까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장유선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말 다 했어? 당장 현지에게 사과해!”
이 새끼는 뭔데 날 보고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싫은데.”
“뭐? 이 자식이!”
장유선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시 보니 나보다 체격이 좋다. 참고로 그의 취미는 펜싱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연위너는 펜싱 종목 스폰서를 맡고 있다.
그냥 싸우면 내가 지겠지?
테이블 위에 장식된 꽃병이라도 집어 들려고 하는데 고현지가 외쳤다.
“그만해요!”
그녀의 외침에 장유선은 걸음을 멈췄다.
고현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흐흑!”
조용한 가운데 고현지가 우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처음에는 그냥 소리 내서 우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난 작은 목소리로 성윤아에게 물었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녀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같네요.”
“…….”
내가 여자를 울리다니!
유치원 때 여자애랑 싸워서 울린 이후로는 처음이다.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라는 한 언론사의 논리를 바꿔 말하면, 눈물을 흘리면 곧 피해자가 된다.
따라서 지금 상황은 나에게 무조건 불리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울 걸 그랬나?
문제가 생겼을 땐 일단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게 최선이다.
빠르게 판단을 끝마친 나는 장유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쪽이 욕하는 바람에 현지 씨가 울잖아요!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내 말에 그는 당황했다.
“뭐? 아니, 이건…….”
“여자를 울리다니! 천하의 나쁜놈!”
그러자 울던 고현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다행히 그 순간 민아름이 나서서 그녀를 안고 달래주었다.
“어머! 괜찮아, 현지야? 울지 마.”
그러고는 우리를 쏘아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두 사람 다 현지 생일파티에서 뭐하는 짓이에요?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 * *
난 쫓겨나듯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잠시 후 근처 카페에서 성윤아를 만났다.
“파티장 분위기는 어때요?”
“누구 때문에 엉망이죠. 다들 집에 가는 분위기예요.”
그 ‘누구’가 설마 나인가?
“민아름 씨는요?”
“언니는 현지 달래주고 있어요.”
민아름이 나서줘서 다행이다.
그녀가 우리를 쫓아내준 덕분에 내가 고현지를 울린 게 아니라, 남자들끼리 싸울 뻔하는 바람에 운 걸로 상황이 정리됐으니까.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성윤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
“왜 웃어요?”
“미루 씨랑 같이 있으면 재밌어서요.”
“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재벌들 다 있는 자리에서 재벌들의 문제를 지적하다니.”
“물어보기에 대답해준 거죠.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오히려 전부 맞는 말이라서 문제겠지.
내 얘기를 듣고 한 명이라도 감명을 받아 좋은 경영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현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상관없어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한다면, 어차피 GL그룹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는 글렀다.
머릿속에 이미 계획을 다 짜놨다. 이걸 어떻게 실행하느냐가 중요하지.
“윤아 씨는 저 믿어요?”
“예?”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성윤아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믿죠.”
“좋아요.”
내 말에서 성윤아는 뭔가 눈치챈 듯했다.
“설마 또 뭔가를 하려는 거예요?”
“예.”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재벌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궁석 의원을 끌어들인다면, 그가 정의를 위해 싸웠다는 걸 전국민이 알게 되겠지.
* * *
GL케미칼 사장 고재익.
젊은 나이에 결혼한 그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뒀다.
건장하게 자라 경영을 배우고 있는 두 아들도 자랑스럽지만, 그의 가장 큰 자랑은 바로 막내딸이었다.
아기 때부터 예뻤던 딸은 자랄수록 더욱 예뻐졌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집에 일찍 돌아와 딸과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나 피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딸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줬다.
이번에 지인들을 불러다가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고 해서, 파티도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그런데…….
생일파티 후 고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매일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그놈이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저 진짜 그날 완전히 웃음거리 됐어요.”
이제까지 그녀가 만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알아서 몸을 낮췄다.
하지만 한미루만은 달랐다.
그녀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줬다.
“저보고 날강도라고 했단 말이에요! 으아앙!”
정확히는 GL그룹 보고 날강도라고 한 거지만, 그녀가 듣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다.
그런 딸이 생일파티에서 어떤 놈한테 굴욕을 당했다고 하니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그놈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붙들고 따지고 싶었다.
‘한미루라고?’
당연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어떻게 좀 해줘요. 아빠는 내가 이런 꼴 당했는데도 괜찮아?”
만약 재벌가 사람이 그랬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과를 받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재벌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인도 아니었다.
“일단 진정하렴.”
“어떻게 진정해요? 저 진짜 이대로는 못 살아요.”
고재익은 우는 딸을 달래주었다.
사실 딸의 얘기에서 굴욕을 당했다는 것보다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미루가 한 발언의 내용이다.
‘GL엔텍 상장이 날강도 짓이라고?’
GL케미칼은 얼마 전 GL엔텍을 물적분할했고, 현재 상장을 앞두고 있었다.
상장만 하면 단숨에 코스피 시총 3위로 올라설 거라는 전망이 있을 정도로, 이제까지 한국 증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장이다.
향후 GL그룹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이 한미루라는 게 문제다.
고재익은 4대 그룹의 후계자인 만큼 한정그룹 사태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한정그룹 해체는 사실상 한미루가 판을 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성권 대표와 연합을 결성하고, 주현진을 설득해 위임장을 받아낸 것 모두 그가 한 일이었다.
한미루만 아니었어도 주철진 부회장이 경영권을 빼앗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GL엔텍 상장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거지?’